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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그 집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 뉴스관리자
  • 등록 2008-07-01 18: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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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그 집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전에 살던 집의 두 번째 옆집에서 몇달 전, 아버지가 10대의 딸을 살해한 후 자신도 스스로 목숨을 끊은 끔찍한 일이 있었습니다.

경찰차와 구급차가 몇 대나 오고 도로가 차단되고 하는 통에 지척에 있었어도 수상쩍은 분위기만 느꼈을 뿐, 정작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그 날 저녁 뉴스를 통해서 알았습니다.

딸아이의 이성 교제를 못마땅해 하던 아버지가 아내와 아들이 외출한 사이에 딸과 말다툼을 하다 순간 격분하여 일평생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질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몇마디 나무라는 거라면 모를까, 요즘 세상에 이성 문제로 부모가 자식을 죽이기까지 했다니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데다 본인 또한 그 충격과 죄책감으로 자살을 했다니 정말이지 허망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갈등의 당사자들이 모두 죽은 터에 그사정과 연유를 정확히 알 길은 없고, 다만 비운의 그 가정이 중동계 이민자라는 사실에서 추측과 여운을 남길 뿐입니다.

호주는 전세계 2백 여개의 다양한 민족과 인종이 모여사는 다민족 다문화 국가입니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마주보고 있는 집이라 해도 각기 문 안쪽의 사정은 동과 서, 남과 북의 차이만큼 판이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부모들이 가정에서 아이들을 기르는 잣대는 일차적으로 부모 세대가 기준인지라, 그렇다면 조금 과장하여 이 나라에는 2 백 개가 넘는 가정 교육 관습이 있다고 봐야 할 겁니다. 그러다보니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각 커뮤니티마다 호주에서 자라는 2세들과 본국의 관습대로 가르치려는 부모 세대들 사이에 이런저런 충돌이 잦을 수밖에 없습니다.

한인 커뮤니티를 예로 들자면60년대에 이민 온 사람은 60년대 가치관을, 70년대, 80년대에 한국을 떠난 사람은 그 시대 한국 사회의 정신적 가치를 마냥 고수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정작 떠나온 고국은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데 이민을 오는 순간, 마치 고장난 시계처럼 한국을 떠난 그 시점에서 생각과 가치관이 그대로 멈추는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부모 자식간의 세대적 단절만 해도 버거운 상황에서 백인 중심의 개방적 서구문화와 맞닥뜨려야 하는 이민 가정의 현실은 충돌의 차원을 넘어 거대한 벽처럼 아득합니다.

저는 딸이 없지만 딸내미 있는 친구들을 통해서 10대의 딸이 가슴을 훤히 드러낸 옷을 입고 나갈 때마다 실랑이를 벌인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호주 애들은 섹시하라고 다 이러고 다니는데 왜 나만 숨 막히게 하고 다니라는 거냐’며 대든다는 겁니다.

이 정도는 애교랄 수 있지만 종교적 배경의 분위기 엄한 회교도 가정의 갈등 양상은 보다 심각한 것 같습니다.

발랄한 10대 소녀들이 무시로 오가는 거리에는 거의 반라에 가까운 차림의 백인 소녀들이 지나가는가 하면, 머리에 반드시 히잡을 쓰고 더러는 보기에 안쓰러울 만큼 몸을 절반 정도까지 가린 중동계의 같은 또래를 볼 수 있습니다.

제 나라의 문화 전통이야 어떻든 같은 반 친구는 옷을 거의 벗다시피하고 거리를 활보하는데 자신들은 몸을 꽁꽁 여밀 것을 부모로부터 강요받는다면, 또래의 영향이 가장 큰 청소년기에 강한 반발심이 들지 않을까 싶어 예사로 봐지지 않습니다.

한인 가정에서 가슴 드러난 옷을 입네 마네 하는 실랑이가 벌어지듯, 그네들도 머리에 히잡을 쓰네 마네 하면서 외출할 때마다 난리가 날 지도 모르지요.

어쩌면 쓰기는 쓰는데 좀 야한 색깔이나 알록달록한 것으로 쓰겠다며 점잖은 색의 히잡을 권하는 부모와 의견대립을 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아버지에게 살해당한 소녀의 가족도 중동계라고 하니 모르긴 몰라도 가정 분위기가 매우 보수적이었을 것 같습니다.

들은 이야기로는 호주의 회교도 가정에서는 딸이 혼기가 되면 본국으로 데려가 강압에 가까운 정혼을 시킨다고 합니다. 다소 과장된 면도 있겠지만 어린 딸을 방학 중에 여행가자고 속이면서까지 자기 나라로 데려가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남자를 사위감으로 정하고 온다는 말까지 있습니다.

그런 문화권의 기성세대인 아버지로서는 아마도 딸자식의 자유로운 이성 교제가 매우 위태롭고 불온해 보였을 것입니다.

결국은 부모의 불안과 두려움이 절반의 가족의 목숨을 앗아가고 남은 가족도 살았으되 이미 산 목숨이 아닌 지경에 이르게 했던 것 같습니다.

세인의 관심에서 그 일이 흐려질 무렵, 우연히 ‘그 집 앞’을 지났습니다. 정원은 단정했지만 어머니와 아들은 이사를 갔는지 손길 닿지 않은 특유의 눅눅함과 괴괴한 냉기가 감돌았습니다.
멈추어 잠시 기도하며 부모 자식간에 만만치 않은 위기를 겪는 호주내 한인 가정에 타산지석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품고 안타까운 걸음을 옮겼습니다.







필자소개



신아연


ayounshin@hotmail.com
신 아연은 1963년 대구에서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를 나왔다.
16년째 호주에 살면서 <호주 동아일보> 기자를 거쳐 지금은 한국의 신문, 잡지, 인터넷 사이트, 방송 등에 호주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민 생활 칼럼집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 과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공저 <자식으로 산다는 것>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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