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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의 달인이 되고 싶다면 -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 뉴스관리자
  • 등록 2009-06-09 08:4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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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에 다닐 때 여러 학교 학생들이 모인 연구소에서 공부를 한 적이 있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가 되기 싫어 제 발로 찾아간 연구소였지만 첫 세미나 시간부터 주눅이 들어 입도 벙긋 못했습니다. 저보다 어린 친구들이 어쩜 그리 똑똑한지, 저는 밑줄을 치며 읽어도 모르겠는 책을 놓고 갑론을박을 하는데, ‘와!’ 입이 딱 벌어졌습니다. 소설책 빼곤 끝까지 읽은 책이 드물던 제가 그날부터 하루 열두 시간을 꼬박 책상 앞에 붙어 있었을 만큼 충격이 컸지요.

그렇게 몇 달을 지나자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겠고 조금씩 적응이 되더군요. 그런데 이번엔 다른 문제가 저를 괴롭혔습니다. 토론에 한몫 껴서 제 주장도 하고 싶고 반론도 펴고 싶은데 그게 쉽지가 않은 겁니다.

무엇보다 곤란한 건 제 ‘겸손’이었습니다. 반론을 할 때마다 “잘은 모르지만” 같은 말을 했더니 그게 상대에게 말꼬리를 잡히는 빌미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엔 일종의 수식어로 사용한 말인데 치사하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상대의 허점을 지적하고 내 주장을 설득하는 자리에서 ‘모른다’는 말은 자제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모르는 게 없도록 최대한 준비하는 것이 토론자의 기본자세라는 것도요.

그때의 경험 덕분에 지금은 토론에 꽤 능한 사람으로 통합니다. 때론 지나치게 논쟁적이어서 피곤하단 말까지 들을 정도니 지난날을 생각하면 성공한 셈이지요. 하지만 지금도 저와 생각이 전혀 다른 사람을 만나면 입을 닫습니다. 토론을 해서 설득할 자신도, 이길 자신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를 읽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잘하면 이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더군요.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의 코끼리는 미국의 공화당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이 책은 민주당이 공화당을 이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쓴 일종의 정치 지침서입니다. 그런데 책을 쓴 조지 레이코프는 ‘인지언어학’을 창시한 저명한 언어학자입니다. 레이코프의 스승이자 학문적 라이벌이기도 한 노엄 촘스키 역시 정치학 책을 여럿 냈지요. ‘언어학자가 웬 정치?’ 할 수도 있지만 언어의 힘을 생각하면 이해 못할 것도 아닙니다.

인지언어학이란 무의식적인 마음의 작용을 통해 언어의 성질을 이해하려는 학문입니다. 특히 레이코프는 관습적으로 사용하는 은유에 주목합니다. 익숙한 은유들이 인간의 사고와 마음을 지배하기 때문이지요. 가령 ‘시간을 절약해라’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같은 말을 볼까요. 레이코프는 이 말들에는 ‘시간은 돈’이라는 은유가 담겨 있으며, 그것은 서구 문명의 경험을 반영한다고 분석합니다.

‘시간은 돈’이란 은유는 삭막하지만 그래도 사람의 목숨을 위협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이라크=사담 후세인’ ‘북한=김정일’ ‘깡패국가’ 식으로, 국가를 사람에 빗대는 은유는 다릅니다. 레이코프는 이런 은유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고 비판합니다. ‘사담을 막아야 한다’며 쏟아 부은 폭탄으로 죽은 것은 사담이 아니라 수십 만 명의 이라크 민간인들입니다.(그 중에는 사담 반대자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사담=이라크’라는 은유는 이들의 죽음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은유가 사람을 죽이는 현실 앞에서 언어학자는 정치가가 됩니다.

이 책의 부제는 ‘미국의 진보 세력은 왜 선거에서 패배하는가’입니다. 책을 쓸 당시(2004년) 미국은 공화당이 정권을 잡고 있었고 부시는 재선에 성공했습니다. 부제는 그런 상황을 반영합니다. 민주당 지지자인 레이코프는 연이은 패배를 지켜보며 공화당이 왜 승리하는지, 가난한 서민들이 왜 부자를 대변하는 정당에 투표하는지 묻습니다. 질문에 대한 답은 한 가지, “프레임(frame)을 바꿔라” 입니다.

프레임이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형성하는 정신적 구조물”입니다. 프레임을 재구성한다는 건 “대중이 세상을 보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며 “상식으로 통용되는 것을 바꾸는 것”입니다. 쉽지 않은 일이지요. 그 쉽지 않은 일의 첫 단추가 언어입니다. 레이코프는 새로운 프레임을 위해서는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다르게 생각하려면 먼저 다르게 말해야 한다는 거지요.

레이코프에 따르면, 공화당이 승리할 수 있었던 건 프레임의 중요성을 깨닫고 모든 쟁점을 프레임으로 구성하는 방법을 터득한 덕분입니다. 그는 부시 대통령이 사용해 성공한 ‘세금 구제(tax relief)’라는 말을 예로 듭니다. ‘구제’라는 말은, 세금은 고통이며 그걸 없애주는 사람은 영웅이라는 프레임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프레임은 알게 모르게 사람들의 의식에 영향을 끼치지요. 그런데도 민주당은 그 말을 가져다 그대로 씁니다. 자신들의 세제안까지 세금 구제라고 부르면서 말이지요.

멀리 미국의 예를 들 것도 없습니다. 과거 참여정부가 부동산 세제개혁을 추진하자 일부 언론이 나서서 ‘세금 폭탄’이라고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정부가 세금 폭탄을 투하해 국민을 죽인다는 무시무시한 은유지요. 물론 세금은 폭탄으로 쓰일 만큼 나쁜 것이란 프레임은 미국과 같습니다. 이 은유는 엄청난 성공을 거뒀고, 세제개혁의 실제 내용을 따져볼 새도 없이 대다수 국민들은 그 정책에 대해 반감을 갖게 되었지요. 정부가 ‘세금 폭탄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그건 오히려 그 프레임에 포섭되었음을 보여줄 뿐이었습니다.

레이코프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는 백 마디의 말보다 한 마디의 프레임이 더 큰 힘을 가진다고 역설합니다. 공화당의 ‘세금 구제’를 비판하는 것은 얼핏 보면 중요하고 필요한 일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세금=고통’이란 프레임을 강화하는 결과만 낳을 뿐입니다. 대신 ‘세금=투자’라는 새로운 프레임을 제시한다면 국민은 새로운 눈으로 세금을 보게 될 것이고, 세금정책에 대해서도 종전과는 다른 생각을 갖게 될 것입니다.

정치투쟁만이 아닙니다. 가족 간의 사소한 다툼에서도 누가 프레임을 선점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립니다. 왜 공부를 안 하느냐고 야단치는 부모에게 아이들은 조금만 놀고 할 거라고 볼멘소리를 합니다. 반항을 하긴 해도 아이는 이미 공부를 해야 한다는 프레임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아이가 공부를 왜 해야 하느냐,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선언하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공부가 가진 절대적 지위가 흔들리면서 프레임이 이동하는 거지요.

레이코프는 ‘객관적 사실이 증명할 것’이라거나 ‘우리가 옳으니까 결국 승리할 것’이라는 진보주의자의 속설을 “헛된 희망”이라고 일축합니다. 그리고 민주당이 승리하고 싶으면 공화당과는 다른 새로운 프레임을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주장에 민주당원들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처음엔 출판사도 찾지 못해 한 시골 출판사에서 간신히 펴낸 책이 순식간에 20만 부가 넘게 팔렸지요. 그 덕분인지 민주당은 4년 뒤 대선에서 승리를 거뒀습니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제목은, 공화당을 이기고 싶다면 공화당을 비판하지 말고 자신의 방식대로 생각하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욕하면서 닮는다.”는 말이 있듯이, 상대방을 비판하는 데 열을 올리다보면 상대방에 매인 나머지 나를 잃게 됩니다. 그러므로 정말 이기고 싶다면 상대방의 말을 반박하지 말고 프레임을 재구성해서 대응하십시오. 그리고 자신이 믿는 것을 말하십시오. 하지만 반대파로만 이루어진 토론 자리에는 나가지 마십시오. 프레임을 바꿀 수 없는 자리에선 이길 수도 없으니까요. 참 쉽죠~잉?








필자소개



김이경


"취미로 시작한 책읽기가 직업이 되어 출판사 편집주간으로 일했고,
지금은 프리랜서로 책을 읽고 쓰고 기획하는 일을 하고 있다.
시립도서관에서 독서회를 11년째 지도 중이며, [청소년을 위한 삼국유사][인사동 가는 길]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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