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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행어사 출두야!”
광한루 삼문짝을 몽치로 두드리며 벽력같이 웨는 소리 천지가 진동한다. 좌수 별감 넋을 잃고, 이방 호장 실혼하고, 삼색나졸 분주하네. 각 읍 수령 정신 잃고 도망갈 제 거동 보소. 인궤(印櫃) 잃고 과줄 들고, 병부(兵符) 잃고 송편 들고, 탕건(宕巾) 잃고 용수 쓰고, 갓 잃고 소반 쓰고, 칼집 쥐고 오줌 누기, 부서지느니 거문고요, 깨지느니 북 장고라. 본관 똥을 싸고 멍석 구멍 새앙쥐 눈 뜨듯 내아(內衙)로 들어가서 “어 추워라. 문 들어온다, 바람 닫아라. 물 마르다, 목 들여라.”
춘향가 중 암행어사 이몽룡이 남원 관아를 덮치는 대목입니다. 그 옛날 탐관오리들이 들끓던 시절 암행어사의 출두는 바로 하늘의 심판이었습니다. 온갖 권세를 내세워 백성들을 핍박하고 고혈을 짜던 무리들에겐 불벼락이었고, 죄 없이 들볶이던 백성들에겐 구원의 손길이었습니다. 짓눌려 살아온 백성들로선 평생의 한을 털어내듯 통쾌함마저 맛보는 순간이었습니다.
수재혐의 수사에 정치탄압이라고 국회에서 농성벌이는 정당 최고위원, 동료의 구속영장 막겠다고 집단 탄원서를 내는 국회의원들, 인허가와 인사 청탁 대가로 허겁지겁 금품 집어삼키는 시장, 군수님들, 벌금과 추징금, 장애인 지원금 수십억 원씩을 가로챈 공무원들… 지금이야말로 ‘암행어사 출두’를 소리 높여 외치고 싶은 때입니다.
암행어사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박문수(朴文秀)입니다. 그의 암행 거동은 워낙 통쾌무비해서 오늘날까지 소설로 만화로 드라마로 숱한 설화들이 보태어져 암행어사의 전형처럼 굳어져 있습니다.
영조 때 병조판서, 호조판서, 예조판서, 우참찬 등 요직을 지낸 박문수는 특히 세정과 군정에 밝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백성들의 세 부담을 줄이기 위한 균역법(均役法) 시행에 기여했고, 어명을 받들어 「탁지정례(度支定例)」, 「국혼정례(國婚定例)」등을 펴내기도 했습니다. 모두 검약한 나라살림의 규범을 정하거나 혼례의 사치와 허례를 경계하는 책들입니다.
그러나 역시 박문수의 명성은 어사로서의 결기와 백성들을 위한 선행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30대 청년기에는 영남 일대를 암행하며 부정한 지방관리들을 징치해 이름을 날렸습니다. 마흔 살에는 호서어사(湖西御使)로, 쉰 살에는 함경도 진휼사(賑恤使)로 기아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구휼해 칭송을 들었습니다. 함흥 만세교(萬歲橋) 옆에는 그의 덕을 기리는 ‘북민비(北民碑)’가 세워져 있다고 합니다.
조선 후기사회의 부패상은 잘 알려진 대로입니다. 고관대작들은 매관매직과 수뢰, 착취로 제 배 불리기에 바빴고, 백성과 살을 비비고 사는 아전(衙前)들마저 관아에 빌붙어 백성들 등쳐먹기에 바빴습니다. ‘신이 내린 직장’으로 부러움을 사는 요즘 공무원들 가운데서도 서민들 지원금을 떼어먹는 자가 하나둘이 아닌데 급료라곤 땡전 한 닢 없던 당시 아전들의 폐해야 이루 말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부패한 조선 말기에도 어사 박문수 못지않은 강직함과 애민정신으로 탐관들을 고발하고 백성들을 구제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조선의 마지막 문장’으로도 유명한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입니다. 이건창은 강화에서 태어나 고종 3년 15살에 문과에 급제했지만 너무 어려서 4년 후에야 비로소 옥당(玉堂: 홍문관)에 들어갔습니다. 고종은 동갑나기인 그에게, 또 그의 뛰어난 문장에 각별한 정을 보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의 벼슬살이는 순탄치 않았습니다. 할아버지의 피로 이어받은 그의 의기와 망국으로 치닫던 조선 말기 부패상의 간극이 너무 컸던 탓입니다. 혈기 왕성하던 23살 처음 암행어사로 나서 충청도관찰사의 탐학(貪虐)을 탄핵했다가 어처구니없는 화를 당했습니다. 상대는 권문세가의 조병식(趙秉式), 호랑이 코털을 뽑은 것이지요. 암행어사가 도리어 모함 받아 저 멀리 벽동으로 유배되었으니 그 시절의 썩은 냄새가 지금도 느껴지는 듯합니다.
조병식은 철종 때 좌의정, 고종 때 영의정에까지 오른 조두순(趙斗淳)의 일가붙이입니다. 그 자신도 능란한 처세로 나중 외무대신에 오른 재간꾼입니다. 그 조병식이 10여년 후 두 번째 충청도관찰사로 있는 동안 동학교도들의 교조[崔濟愚] 신원(伸寃)을 탄압해 농민혁명의 불씨를 심었습니다. 일족인 조병갑(趙秉甲)은 고부군수로 있는 동안 군민의 고혈을 짜내는 학정으로 동학운동에 불을 질렀습니다. 결국 둘은 탐욕으로 뭉쳐 동학혁명을 부른 기이한 악연을 나누어 가진 꼴입니다.
이건창의 할아버지는 사기(沙磯) 이시원(李是遠)입니다. 순조 때 문과에 급제해 헌종, 철종, 고종 3대에 걸쳐 三司의 여러 관직과 형조, 예조, 이조 판서를 지냈습니다. 젊은 시절 그도 경기어사로 민폐를 살피고 강직한 성품 탓에 권력을 가진 자들과 충돌이 잦았다니 祖孫의 곧은 성품은 내력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시원은 말년에 향리인 강화도에 은둔해 지내다가 병인양요로 강화 땅이 외침에 더럽혀지자 아우와 함께 자결했습니다. 나라에서는 충정(忠貞)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영의정을 추증하여 충절을 기렸습니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로부터 학문을 익히고 또 의분을 못이긴 자결을 지켜보며 이건창은 할아버지의 애국충정이나 애민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벽동 유배에서 풀려난 후 이건창은 한동안 벼슬의 뜻을 버리고 향리에 묻혀 가업처럼 물려받은 학문(양명학)과 문장에만 몰두했습니다. 그러나 28살 되던 1880년 고종의 간곡한 부름을 받아 다시 경기어사로 나섭니다. 광주 일원을 돌며 부정한 관리들을 고발하고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했습니다. 그 행적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마침내 그의 공덕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지게 됐습니다.
서울 송파구 송파여성문화회관 옆 화단에는 ‘暗行御史 李公建昌 永世不忘碑’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예전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中垈面),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바로 송파에 살던 백성들이 이건창 어사의 은덕을 영원히 잊지 말자고 세운 것입니다.
그 옆에는 ‘乙丑 大洪水 紀念’ 비석도 서 있었습니다. 1925년의 대홍수를 기억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 한 해에 낙동강에서 금강, 한강, 대동강, 압록강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으로 4차례나 덮친 큰물로 사망자 6백여 명, 가옥유실 6천여 채를 기록했던 것입니다. 옛 중대면, 지금의 송파는 특히 그해 7월 650mm의 폭우로 극심한 피해를 입었던 곳입니다.
안타깝게도 ‘이건창 어사 송덕비’도 ‘대홍수 기념비’도 지금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 짓고 있는 송파1동 주민센터 신축공사에 떠밀려 흙더미 속에 뒹굴다가 지금은 공사 관리막사 옆에 천덕꾸러기처럼 밀어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나마도 언제부턴가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게 아예 좁은 철제 담장 속에 유폐되어 있습니다.
주민센터는 지난해 11월부터 송파구청이 32억여 원이나 들여 초현대식 4층짜리 건물로 지어지고 있습니다. 올 9월 주민센터가 완공된 후에는 그 기념비들이 어떻게 처리될지 알 수 없습니다. 구청 내 여러 부서를 돌아 간신히 주워들은 설명은 “송파구엔 워낙 문화재가 많아 그런 민간이 세운 기념물은 특별히 관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永世不忘碑’를 세웠던 옛 송파 주민들의 생각은 어떨지 궁금합니다. 공사장 담장에는 송파산대놀이 사진과 함께 ‘격조높은 문화도시 송파구’라는 문구가 선명합니다.
필자소개
방석순
스포츠서울 편집국 체육부장, 부국장, 경영기획실장과 2002월드컵조직위원회 홍보실장을 역임했다. 여러 차례의 올림픽과 월드컵축구 등 세계적인 스포츠대회의 현장을 취재했고, 국제스포츠이벤트의 조직과 운영에도 참여하며 스포츠경기는 물론 스포츠마케팅과 미디어의 관계, 체육과 청소년 문제 등에 깊은 관심을 두고 이와 관련된 글들을 집필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