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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며칠 전 지방에 다니러 간 사이에 네가 일자리를 잃었다는 소식을 할머니께 안부 전화를 드리면서 전해 들었다. 하루 전만 해도 일이 재밌다고, 하지만 열심히 하지 않으면 자리가 위태롭다고 자못 긴장하는 모습에서 엄마는 오히려 대견함을 느꼈는데 일이 어떻게 잘못되어 결국 밀려나게 되었는지 가슴이 아프구나.
네 말마따나 열심히 하지 않아서 그리 되었는지, 아니면 무슨 실수를 했는지…
새로 산 양복 바지를 유니폼 대용으로 입었길래 옷 버린다며 기겁을 했건만 이젠 그럴 일도 없게 되었구나.
오래 전 1964년에 한국의 김 승옥 이라는 작가가 쓴 <차나 한잔> 이라는 단편 소설이 있다. 엄마가 전에 실직을 했을 때 그 글을 통해 막연하나마 위안을 얻고 그 이야기를 기둥 줄거리 삼아 글 한편을 써서 상실의 감정을 마무리했던 기억이 난다. 처량하고 막막하기 짝이 없던 그 때의 엄마로서는 비록 지어낸 이야기지만 주인공의 심정을 십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제 네가 잡(Job)을 잃었다고 하니 그 소설을 다시 집어들게 되는구나.
호주에서 자란 너의 현실과는 사뭇 다르고 전혀 동떨어진 상황설정이지만 잠시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지 않으련? 일자리를 잃은 너에게 엄마의 마음을 대신하여 주는 위로라고 생각해도 괜찮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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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만화 연재로 단칸방에서 아내와 겨우 먹고 사는 주인공이 연유도 모른 채 자신의 만화가 하루, 이틀 지면에서 빠지게 되자, 직장을 잃게 될까봐 스트레스성 설사병까지 걸려가며 불안한 마음으로 며칠을 전전긍긍 하게 된다.
실의에 빠져 폭음을 한 다음날 아침, 평소보다 더 일찍 눈을 뜬 주인공은 그날도 조간신문에 자신의 만화가 실리지 않은 것을 확인하지만 별 뾰족한 도리없이 평소대로 당일치 만화를 그려 신문사로 가져간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불안했던 예감이 적중하여 문화부장으로부터 더 이상 만화를 그릴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
문화부장은 주인공에게 '차나 한잔 하러 가자'고 말하는 것으로 '해직 통보'의 운을 에두르며 껄끄러운 상황을 무마하려 하지만 주인공에게 그 말은 곧 '올 것이 왔다'는 암시와 불운의 예고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그는 해고 사실을 알리기 위해 '차를 권하는' 행위는 위선이며, 일종의 추파라고 분노한다.
실직으로 망연자실한 채 다시금 호구지책을 강구해야 하는 주인공은 진땀을 흘리며 취직 부탁을 하기 위해 그 길로 지인들을 찾아 나선다. 구차하고 절박한 속내를 감추고자 그 또한 어쩔 수 없이 '차나 한잔' 하자는 말로 일자리 부탁의 운을 어렵사리 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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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서 엿보자면 60년대 직장 문화의 코드는 ‘차 한잔’이 아니었을까 싶구나. 해고를 하는 쪽이나 취직 부탁을 하는 쪽이나 선뜻 입이 열리지 않기는 매 한가지였을 테니 어쩌면 찻잔 크기 만큼의 온기가 머물 때까지만이라도 그 순간을 유예하고 싶어서가 아니었을까.
이 대목을 접하면서 네가 맞이했을 실직의 순간을 생각하니 마음이 짠하다.
소설의 주인공처럼 너의 매니저도 어색한 표정으로 ‘차나 한잔’ 하자고 했는지, 아니면 전에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면전에서 ‘잘려’버렸는지, 어쩌면 한국에서 흔히 한다는 방식대로 휴대폰 메시지로 남겼는지, 너한테 물어볼 수도 없어서 더 속이 상하다.
어떤 식이 되었건 사람의 다양한 감정 중에 ‘거절과 거부’를 처리하기란 정말 쉽지 않다는 걸 알기에 엄마는 네가 겪었을 상황을 마음 아프게 곱씹어본다. 방금 전까지 ‘우리들’의 회사가 이제는 ‘저희들’의 회사라고 하니 말이다.
그 동안 열심히 일한 것이 억울한 나머지 순간적인 분노가 솟구쳤을까, 속았다는 생각에 배신감이 들었을까, 아니면 동료들 보기에 수치스럽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감을 주체하기 어려워 그 순간 ‘어딘가로 홀연히 사라져버렸으면’ 싶었을지도 모르지.
그렇다고 자기 비하감에 괴로워할 정도는 아니었을 테니 큰 걱정은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솔직히 행여 남탓을 하거나 쓸데없는 변명거리를 찾아 합리화를 궁리하게 될까봐 염려스럽구나. 그렇게 되면 비록 실직이라는 안타까운 상황 중에도 체험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는 귀한 가치마저 놓치게 될 테니, 그것이야말로 황량한 일이 아니겠니. 건질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고 더디게 수습될 상한 감정만 끌어안게 될 테니 말이다.
엄마의 잔소리가 또 길어지는구나. 편지를 시작하던 처음 마음은 너에게 분위기 좋은 곳에서 ‘차나 한잔’ 하자던 것이었는데.
필자소개
신아연
ayounshin@hotmail.com
신 아연은 1963년 대구에서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를 나왔다.
16년째 호주에 살면서 <호주 동아일보> 기자를 거쳐 지금은 한국의 신문, 잡지, 인터넷 사이트, 방송 등에 호주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민 생활 칼럼집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 과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공저 <자식으로 산다는 것>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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