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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 ‘제주올레’ 걷기모임에 참여해서 모슬포 일대를 걸었습니다. 제주도에서도 가장 바람이 거칠어 ‘못살포’라는 별명은 얻은 곳인데, 초겨울이었지만 날씨가 화창해서 참 좋았습니다.
국민(초등)학교 3학년 때쯤이어서 기억이 희미합니다. 소풍인지 동원인지 모르나 전교생이 선생님들의 인솔 아래 아침에 먼 길을 떠났습니다. 군사훈련을 구경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산비탈을 넘어 모래사장을 밟고 소나무 숲을 지나 두어 시간 만에 도착한 곳은 나지막한 야산이었습니다.
나무는 하나도 없고 잡초가 온 동산을 덮고 있었는데 노란 꽃이 수를 놓은 듯 고왔습니다. 그 야산엔 군용트럭이 수십 대가 세워져 있었고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모자에 별을 단 장군과 양복을 입은 사람들은 의자에 앉아 있고 나머지 사람들은 풀밭에 그냥 주저앉았습니다.
동산에서 앞을 바라보니 나무가 하나도 없이 역시 잡초만 파랗게 자란 산기슭에 커다란 원이 3개가 그려졌는데 그 원 속에는 알 수 없는 글자(영어알파벳)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바로 인접한 바닷가엔 군함이 몇 척 떠 있고 오른쪽 넓은 풀밭에는 프로펠러 군용기가 뜨고 내리는 소리가 윙윙거렸습니다. 그렇게 멋있는 광경을 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친구끼리 떠들고 장난치고 있던 중 갑자기 ‘쉭’하는 소리와 함께 공중에 물감을 뿌려놓은 것 같은 연기가 치솟았습니다. 섬광이 번쩍이고 고막을 찢는 것 같은 굉음이 사방에서 들리는 데 폭탄이 내 귀를 스쳐가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습니다. 굉음이 들릴 때마다 조금 후면 산기슭에 그려진 원에서 흙 구름이 피어오르는 게 여간 신기한 게 아니었습니다.
한참 동안 들리던 포격소리가 멈추자 철모에 나뭇가지를 꽂은 군인들이 총을 쏘며 산기슭을 기어오르는 것이었습니다. 군인들은 산꼭대기에 올라 총을 흔들며 고함을 질렀고 참석했던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 박수를 보냈습니다.
50여 년 전 내 눈앞에서 군사훈련이 벌어졌던 곳은 제주도 서남단에 자리 잡은 송악산, 속칭 절울이 오름입니다. 지금은 제주도에서 인기 있는 관광지의 하나가 되었지만 ‘육군제1훈련소’ 시절 그곳은 군사지역이고 가끔 불발탄을 건드려 사람들이 죽는 사고가 빈번했던 ‘접근금지구역’이었습니다.
지난 11월 30일 ‘제주올레’ 길의 코스 출발점은 모슬포 멸케(멸치가 많이 잡히는 해변이라는 뜻)였는데 이곳에서 20여분 걸어서 도착한 곳이 섯알오름이었습니다. 이 섯알오름은 21세기 들어 4.3비극의 아픔이 한 획을 그은 곳으로 알려졌습니다.
수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4.3사건이 진정된 한참 후인 1950년 한국전쟁이 터졌습니다. 정부는 ‘예비검속’을 실시하도록 군경에 지시했고, 제주도에 주둔하던 군은 예비검속된 주민 중 210명을 재판도 없이 이 섯알오름의 분화구에 몰아넣고 집단으로 총살하여 묻어버렸습니다. 학살된 사람들의 시체는 누구의 시신인지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땅속에서 뼈가 뒤엉켜 버렸습니다. 그래서 여러 성씨의 아들들이 하나로 엉킨 이 비극의 상황을 ‘백조일손(百祖一孫)’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50여 전 송악산 군사훈련을 재미있게 구경하며 앉아 있던 그 야산이 섯알오름이라는 걸 이번 올레걷기로 알게 됐습니다. ‘제주올레’는 이 코스를 ‘삶과 죽음이 공존했던 길’이라고 인터넷 게시판에 설명해놓았습니다. 정말 적확한 표현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 일대처럼 평화롭고 목가적인 곳은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마라도를 향한 관광유람선이 물살을 가르고 오름 기슭에는 조랑말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모습을 사시사철 볼 수 있습니다.
제주도를 좀 자세히 여행해본 분들은 느끼겠지만 모슬포 일대는 제주도에서도 지형이 특이합니다. 한라산은 제주도 그 자체인데 이곳에서만은 한라산이 저 먼 곳에 동떨어져 보입니다. 제주도에서도 보기 드물게 광활한 평야가 형성된 곳입니다.
그러나 동중국해의 바닷바람이 거칠게 불어 나무가 자라기 어려울 정도여서 고구마 감자 마늘 등 뿌리식물이 주로 재배되는 곳입니다. 제주도의 다른 땅이 귤 밭으로 변해도 이곳에선 귤나무를 거의 볼 수 없습니다. 바람 부는 날 모슬포 거리를 보면 에 그 옛날 서부극에서 보던 미국 소도시를 방불케하는 황량함이 느껴지는 곳입니다. 그래서 관광객들도 별로 찾지 않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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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김수종
1974년 한국일보에 입사하여 30여년 기자로 활동했다. 2005년 주필을 마지막으로 신문사 생활을 끝내고 프리랜서로 글을 쓰고 있다. 신문사 재직중 신문방송편집인협회 이사와 정보통신윤리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환경책 '0.6도'와 '지구온난화와 부메랑(공저)'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