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七情이 과하면 병이 된다
1. 喜
백수 7년 째인 A씨는 요즘 주가가 폭락하든 환율이 뛰든 걱정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2년 전 상하이 증시에서 40%의 이득을 본 이후 일찌감치 주식 투자에서 손을 뗐으니 펀드니 키코니 하는 파생상품들로 손해볼 일이 없습니다.
집값이 내려 종부세 걱정도 덜게 됐고, 미국 영주권을 가진 두 아들이 보내 주는 달러예금이 8만 달러나 돼 몇 달 새 원화로 얼마나 올랐는지 계산해 보는 게 낙이 되었습니다. 영주권까지 얻어 군에 가서 썩지 않아도 되는 자식들은 아버지 덕분이라며 전화도 자주 걸어 와 웃음이 절로 납니다.
2, 怒
외아들을 군에 보낸 B부인은 일 주일 전 사료용 냉동닭을 군부대에 납품했다는 보도를 접하고는 화가 머리끝까지 뻗쳤습니다. 1년 이상 냉동 보관된 닭은 동물 사료로 쓰도록 돼 있는데, 이것을 국토를 지키는 군인들에게 먹였다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병역 면제를 받은 ‘신의 아들’도 아니어서 내 아들이 ‘어둠의 자식’으로 국방의무를 져야 하는 것도 속이 쓰린데 상해서 냄새까지 나는 고기를 먹게 하다니.... B부인은 당장 군납업자나 이를 허용한 축협 간부들을 찾아가 머리카락을 쥐어 뜯어 주고 싶은 심경입니다.
3. 思
올해 환갑을 맞은 C씨는 의료기술의 발달로 앞으로 30년은 더 살 거라는 친구들의 이야기가 한편 반갑기도 하지만 온갖 잡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 합니다. 노후대책도 별로 없어 필리핀이나 말레이시아로 나가 살 수도 없고, 자식들에게 기댈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생계를 뒷받침할 만한 연금도 못 받는 주제에 30년이란 세월이 까마득하기만 합니다.
4. 憂
별미로 꼽히는 산낙지 값이 자꾸 뛰고 있습니다. D씨는 웨이하이에서 생선을 수입해 국내로 반입하고 있는 친구가 중국의 낙지 소비가 늘면서 국내 반입량이 엄청나게 줄었다는 말을 듣고 앞으로 우리 밥상이 어떻게 차려질까 하는 생각으로 근심이 가득합니다.
얼마 전 패키지 투어로 중국을 다녀 온 그는 “중국은 쌀 소비량의 삼분의 일을 수입하고 있다”고 한 가이드의 말이 지워지질 않습니다. 중국의 블랙홀 현상이 본격화되면 우리 밥상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중국산 식품마저 구하기조차 힘들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무겁게 합니다.
5. 悲
3년 전 남매를 캐나다로 유학 보낸 E씨는 걷잡을 수 없는 경제 사정으로 힘이 들어 곧잘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월급쟁이 벌이는 뻔한데 송금액은 올려야 되니 집을 줄이는 방법 밖에 없어 안절부절못하는 지경입니다.
더구나 아이들 뒷바라지 한다고 함께 따라 간 아내도 걱정입니다. “여자들이 현지에서 할 일이 없으면 뭐 하겠니. 돈 있는 교포가 집이나 한 채 얻어 주면 임도 보고 뽕도 따는 여자가 한둘이 아니야” 친구들이 무심코 내던진 현지의 세태 이야기도 마음에 걸립니다.
6. 恐
“북한이 서울을 무력화시키는 일은 식은 죽 먹기입니다. 장사포로 당인리 발전소를 때리면 하루아침에 암흑의 도시로 변하고, 무인 글라이더로 팔당댐에 극약을 뿌리면 식수가 없어 아비규환이 될 수도 있습니다” F씨는 얼마 전 한 군사전략전문가의 이 같은 가설을 듣고 전율에 가까운 공포심을 느꼈습니다.
핵도 미사일도 필요 없이 서울이 순식간에 아수라가 될 수도 있다니 기가 막힙니다. 전기가 끊기면 엘리베이터 TV 냉장고 가스레인지가 무용지물이 되고, 물이 없으면 밥도 못 짓고 변기도 쓸 수 없게 됩니다. 설사 동요를 막기 위해 정부가 쌀을 한 가마니씩 준다 해도 그걸 어떻게 아파트 20층까지 옮길 수 있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7. 驚
추석을 앞두고 들여 온 북한산 송이 수백 톤이 3일만에 동이 났다고 합니다. 성묘하러 고향인 경북 북부지방을 다녀온 G씨는 귀경길에 송이 산지인 산모퉁이에 수백개의 상자가 널브러져 있어 무심코 살펴 보았더니 ‘북한산 송이’라고 적혀 있었다는 것입니다.
올 여름 잦은 비에다 추석이 예년보다 빨라 송이가 흉년인 터에 G씨는 서울의 백화점과 대형 마트에 가 보았더니 모두 국내산만 전시해 놓고 kg당 50만~60만원을 호가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Kg당 18만원인 수입가격의 두 세 배나 비싼 값이었습니다. 과연 국내산인지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중국산 참깨를 수입하는 상인들은 시골 할머니들을 시켜 한 두 말씩 시장에 내다 팔게 하고 품삯을 준다고 합니다. ‘직접 농사지은 참깨’라는 설명과 함께 시골 할머니에 대한 믿음을 주어 두 세 배의 이득을 챙긴다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한의학에 기쁨(喜) 분노(怒) 생각(思) 근심(憂) 슬픔(悲) 공포(恐) 놀람(驚)의 칠정(七情)이 과하면 병이 된다고 합니다. 일곱 가지 정황이 과도하고 강렬하게 지속되면 장부기혈(臟腑氣血)의 기능에 영향을 미쳐 내장에 병변이 생기고, 정신활동에까지 병이 악화된다는 것입니다.
멜라민 식품 파동, 악플 등으로 인한 자살 신드롬에다 재산을 반토막으로 만든 국제 금융위기의 내우외환으로 국민은 지금 극심한 정신적 외상(Trauma)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거기에다 칠정을 부채질하여 ‘남의 불행’을 초래하도록 해서는 안되겠지요. 혹시 내가 그 장본인 중의 한 사람은 아닐까요.
필자소개
김홍묵
동아일보 기자, 대구방송 이사로 24년간 언론계에 몸담았다. 이후 (주)청구 상무이사, 서울시 사회복지협의회 사무총장, (주)화진 전무이사 등을 역임했다. 언론사 정부기관 기업체 등을 거치는 동안 사회병리 현상과 복지분야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기사와 기고문을 써왔으며 저서로는 한국인의 악습과 사회구조적 문제를 다룬 '한국인 진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