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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의 발달
  • 뉴스관리자
  • 등록 2008-10-10 18:3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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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시월입니다. 10월은 열 번째 달에 불과하지만 ‘시월’은 ‘詩月,’ 곧 시 읽는 달입니다. 문태준의 “그늘의 발달”을 들고 아무데나 펼칩니다. 하필 “百年”입니다. “와병 중인 당신을 두고 어두운 술집에 와 빈 의자처럼 쓸쓸히 술을 마셨네” 하는 첫 문장이 가슴 속에 바람을 일으킵니다. 꼭 두 줄 만큼 빈칸이 있고 “내가 그대에게 하는 말은 다 건네지 못한 후략의 말”하는 둘째 줄이 이어집니다. 이내 코가 매워옵니다.

시월의 다른 이름은 서정(抒情)이지만 지금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말처럼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일 뿐만 아니라 ‘서정시를 읽기도 힘든 시대’입니다. 갈팡질팡하는 시대에 마음을 다잡기엔 혁명가의 목소리가 제일일 것 같아 ‘체 게바라 시집’을 집어 듭니다. “너무/외로워하지 마!/네 슬픔이 터져/빛이 될 거야!” 겨우 두 문장으로 이루어진 “리얼리스트”를 읽으니 단식 투쟁중인 와이티엔(YTN) 사원들이 생각납니다.

이명박 대통령 후보의 특보를 지낸 구본홍씨가 임시주총에서 사장으로 선임된 지난 제헌절 이후, 와이티엔 노조원들은 언론 장악을 위한 ‘낙하산’ 인사를 비난하며 구씨의 임명철회를 요구해왔습니다. 구사장은 12명의 노조원을 업무방해 등의 혐의로 고소하는 한편, 33명에 대해 징계를 내리고 10여명의 부팀장 인사를 단행했습니다.

노조원들이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있을 때 회사 인사위원회의 선배직원들이 핸드폰 문자를 보내어 밤 10시에 징계위원회에 출두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현덕수 전 노조위원장이 "후배들이, 그것도 언론사상 유례없는 12명이 한꺼번에 경찰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고 있는데 징계를 위해 인사위원회에 출두하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것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며 서운해 한 건 당연해 보입니다.

제가 연합통신(후에 연합뉴스와 와이티엔으로 분리됨)에 다닐 때 일이 떠오릅니다. 당시 국제국 해외부에서 영문 기사를 쓰던 저는 1991년 12월 13일 남북한의 총리가 합의한 “남북기본합의서”에 대한 뉴스 해설을 쓰고 저녁 늦게 퇴근했습니다. 한국관련 소식을 에이피(AP)나 로이터, 에이에프피(AFP)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바깥 세상에 전하겠다는 포부를 안고 입사했던 만큼 정확하고 균형 있는 해설을 쓴다고 나름 노력했습니다.

긴장했던 머리를 식히느라 아직 잠을 이루지 못하던 11시 무렵,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전화를 받고 “여보세요” 하자마자 “무슨 기사를 그렇게 쓰는 거요!” 성난 목소리가 울렸습니다. 마지막 “거요!”의 “요”는 “야!"에 가까웠지요. 누군지 짐작이 갔지만 상대를 진정시키고 싶어 물었습니다. “누구세요?” “나, 사장이오.”

다음날 출근하니, 선배 하나가 간밤에 해설을 다시 써서, 제가 쓴 해설을 대체한다는 설명과 함께 내보냈다고 했습니다. 제가 쓴 해설을 미처 보지 못했던 외국 외교관 중엔 그 설명을 보고 제 해설을 찾아 읽는 우스꽝스러운 일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더 재미있는 일은 그 후에 있었습니다. 국제국장 선배가 근무시간 틈틈이 저를 불러 사표를 내라고 한 것이지요. 그렇지 않아도 정이 떨어진 참이라 사표를 내고 싶었지만 후배들이 만류했습니다.

잘못 없는 사람이 부당한 요구에 굴복해 사직하면 나쁜 선례가 된다는 거였습니다. 그 말도 옳다 싶어 그때부턴 국장에게 저를 해고해달라고 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사표를 내요!” “해고해주세요!”를 주고받던 어느 날, 국장이 갑자기 미소를 띠고 없었던 일로 하자고 하더군요. 왜냐고 물으니 그건 알 것 없다고, 그냥 없었던 일로 하자는 겁니다. 오랜 후에야, 회사가 정부쪽 심기를 의식해 저를 사직하게 하려 했으며, 오히려 정부쪽에서 문제될 것 없다고 하는 바람에 사직 요구를 거두었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건 그것만이 아닙니다. 회사의 높은 분들이 제 거취를 놓고 회의할 때 제 직속부장이, 제가 광주의 5·18 기념행사 기사를 필요이상으로 잘 썼었다며 원래 좀 “빨간” 사람이라고 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부장이 하라는 대로 광주주재 연합통신 기자가 써 보낸 걸 취합해 영어로 썼을 뿐인데 말입니다. 그 부장은 제가 입사 후 처음 쓴 해설 기사를 보고 “노태우씨를 싫어하나 보죠?” 하더니, 연합에서 일하려면 청와대를 불쾌하게 하는 기사를 쓰면 안 된다고 조언해준 사람입니다. 말이 안 된다고요? 이 나라 현대사엔 말이 안 되는 일이 참 많았습니다.

누군가 제게 연합통신 시절에 대해 물으면 늘 “달걀로 바위치기”를 했다고, 3년이 채 안 되는 기간이 30년처럼 길게 느껴졌다고 대답합니다. 회사를 그만둘 때 보통 쓰는 “일신상의 이유로”라는 표현 대신 “회사의 인사정책에 문제가 있어”라고 쓴 사직서를 내고 연합을 떠난 지 거의 16년이 되었습니다.

연합통신이 연합뉴스와 와이티엔으로 바뀌고 회사의 분위기도 아주 달라졌다는 얘기를 들으면서도 반신반의했는데, 190여 노조원들의 단식투쟁을 보니 가슴이 뭉클합니다. “쇠도 녹여 먹는다”는 한창 때 사람들이 단식을 하니 얼마나 힘들까 마음이 아프고, 벌써 여기자 두 사람이 병원에 실려 갔다는 보도를 보니 도움은 못 되면서 소화제 신세만 지고 있습니다.

이럴 때 나온 정 병국 한나라당 미디어산업발전특별위원회 위원장의 위협은 진부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달 안에 방송통신위원회가 와이티엔 재허가 여부를 심사하게 되는데, 와이티엔이 이 사태를 풀어갈 능력이 없다고 판단하면 재허가를 내주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니 말입니다. 위협은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만 통합니다. 단식중인 노조원들을 서운하게 한 선배들처럼, 지금 갖고 있는 걸 잃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런 선배들을 보며 분노를 느끼는 건 당연하지만, 어쩜 지금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관대함 없이는 진정한 혁명가가 될 수 없다”는 체 게바라의 시 “사랑”을 기억해야 할 때인지 모릅니다. 게다가 정의와 부정(不正)의 드문 공통점은 “나중”까지 잊히는 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와병 중인 당신을 두고 어두운 술집에 와 빈 의자처럼 쓸쓸히 술을” 마시는 사람은 “당신”을 잊은 게 아니고 “당신”과 함께 아파하고 있습니다. 배고픔을 참고 싸우는 와이티엔 노조 여러분, 너무 외로워 마십시오. 슬픔이 터져 빛이 될 테니!







필자소개



김흥숙


코리아타임스와 연합통신 기자, 주한 미국대사관 문화과 전문위원을 역임했으며,
코리아타임스에 "Random Walk"라는 제목의 칼럼을 연재중이다.
저서로 "그대를 부르고 나면 언제나 목이 마르고"와 "시선"이 있고,
김 태길의 "소설에 나타난 한국인의 가치관" 을 영역한 것을 비롯, 10여 권의 번역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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