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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잘 알려진 어느 소설가는 매일 아침 정장을 차려입고 안방에서 건넌방으로 ‘출근’을 한다고 합니다. 집에서 작업을 하다보니 자칫 절도있는 생활 감각을 잃을까 염려되어 마치 사무실에 나가듯이 아침마다 옷을 갖추어 입고 옆방으로 글을 쓰러 간다는 것입니다.
‘변변한 옷이 없어서’ 그렇게까지는 못하지만 저도 매일 아침 아홉 시면 컴퓨터 앞으로 ‘출근’을 해서 저녁 다섯 시 무렵까지 이런저런 원고를 꾸립니다.
어떤 글이 되었건 글을 쓰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화면의 커서는 입력을 재촉하며 연신 깜빡대지만 막막하게 펼쳐진 백지를 메우기란 매번 여간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여북하면 내로라 하는 소설가조차도 집안에서 정장까지 하고 날마다 결연한 자세를 다잡겠습니까.
“글쓰는 사람이 참 부러워요. 그래서 나도 해 보려고 하는데 시작을 막상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엄두가 안 나는 거 있죠.”
제가 소위 글쟁이라는 것을 알고 주위에서 이렇게 말을 붙여오는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정말 제게 글쓰는 법에 대해 묻는다기보다 요전 번 글 잘 읽었다는 치렛말을 이런 식으로 해서 저를 기분좋게 해주려는 의도이지만, 개중에는 정말로 한 수 배우고 싶다며 진지하게 접근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한국의 대표적 노작가는 한 때 주위에서 그렇게 물어올 때마다 “쓰지 마세요, 아예 시작도 마세요” 라고 말렸다는데, 그런 말이 설마 “흥, 니까짓 게 무슨 글?, 글쓰는 일이 그렇게 만만해 보여?, 글은 뭐 아무나 쓰는 줄 알아?” 하는 식의 고약한 맘보에서 나왔을 리는 없고, 한마디로 그 ‘형극의 길’에 애초 걸음을 떼놓지도 말라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어떤 사람은 피를 짜내듯 한다며 자못 엄살을 떨기도 하고, 혹자는 문학 하는 일이 너무 대단해서 목숨을 걸었다고까지 하니, 글쟁이들의 과장하는 습성을 감안하더라도 글쓰는 일이 쉽지 않은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피를 쏟는 고통으로 ‘문학 씩이나’ 하는 것도 아닌 제가 ‘쓰지 마시라’며 대가의 흉내를 낼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아니 그보다는 저를 그런 대가의 반열에 놓고 글쓰기에 대해 한마디 해보라고 했을 리는 만무할 테고 “나도 너 정도는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만만함으로 물어오는 것이니, 저 또한 “그냥 쓰세요, 저도 그냥 씁니다.”라고 대꾸할 밖에요.
‘내 이야기는 소설로 몇 권, 아니면 아예 시리즈 대하소설’ 이라는 식의 흔한 신세한탄도 실은 풀어내고 싶은 내면의 욕구가 통로를 찾지 못해 내지르는 아우성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지금껏 생의 마디마디를 시난고난, 굽이굽이 넘어 온 스스로에 대한 대견함과, 앞만 보며 아등바등 달려오다 문득 고개를 든 순간, 형언할 수 없이 밀려드는 허전함과 허무함에 영화 속 주인공의 절규처럼 “나 다시 돌아가고 싶어!” 하며 속울음을 삼키는 이는 왜 없겠습니까.
‘행복한 사람은 일기를 쓰지 않는다’고 했던가요. 일상이 순조롭고 일생이 그럭저럭 평탄한 사람은 내면의 아픈 소용돌이를 겪을 일이 적기 때문에 풀어낼 응어리나 한도 그만큼 덜하다는 말일 것입니다.
억울하고 답답하고 내 맘대로 되는 일이 도무지 없을 때, 글이라도 쓸 수 있다는 것은 그나마 숨쉴 통로를 마련하는 방편이 되는 것 같습니다.
현실의 내 삶은 남루하고 초라하고 감추고 싶은 것들 투성이지만, 글을 통해 가만가만 풀어내노라면 그런대로 견딜 만 해지면서 다시금 스스로를 다독여 각다분한 현실을 감내하게 하는 내적 힘을 얻습니다.
힘들게 사는 것이 자랑거리가 아님에도 글에서는 그게 힘일 때가 많습니다. 등단 수필가 한 분이 육십 평생을 아무런 고생없이 살아서 도무지 글로 쓸 것이 없다고 진지하게 고백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의 겸손은 차치하고라도 많은 부분 수긍이 가는 말입니다.
앞으로도 혹 글을 쓰고 싶다며 누군가가 제게 물어온다면 이렇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 글은 아무나 쓰는 줄 아세요? 행복한 사람은 글을 쓰지 않는답니다.”
필자소개
신아연
ayounshin@hotmail.com
신 아연은 1963년 대구에서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를 나왔다.
16년째 호주에 살면서 <호주 동아일보> 기자를 거쳐 지금은 한국의 신문, 잡지, 인터넷 사이트, 방송 등에 호주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민 생활 칼럼집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 과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공저 <자식으로 산다는 것>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