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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과 귀 사이의 거리
  • 뉴스관리자
  • 등록 2008-08-06 16:5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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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과 귀 사이의 거리



“강제된 반성문은 양심의 자유에 어긋난다.”
지난 주 법원의 한 판결문을 TV 자막으로 언뜻 보고 한동안 어리둥절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람 노릇 하기도 힘든 세상에 반성 없이 양심을 되찾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앞서서였습니다.

며칠 뒤 신부님의 강론 내용을 되새기면서 냉정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교화하는 방법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첫째는 부모가 자식을 가르치듯 권고 권유하는 것. 둘째는 힘과 권위로 응징하는 것. 셋째는 예수님처럼 사랑으로 감싸주어 회개하게 하는 것입니다. 최선의 방법은 물어볼 것도 없이 세 번째 방법이라는 결론입니다.

반성문은 전후세대인 우리 연배에게는 그리 낯선 일이 아닙니다. 학생 시절 꼭히 내 잘못 만도 아니고, 굳이 법을 들먹일 사안도 아니었지만 집단의 질서 유지를 위한 차원에서 반성문을 쓴 일도 있었습니다. 군에서 한꺼번에 70대의 ‘빳다’를 맞아 보기도 했고, 회사 시절 경위서를 써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양심의 자유’와 연계할 상상조차 못한 것은 어리거나 강제의 정도가 견딜 만하거나 아둔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소위 임관 직후 외박 나갔다 귀대시간에 1분 10초가 늦어 1초당 한 대 꼴로 매를 맞았습니다. 이튿날 아침 엉덩이와 허벅지는 피멍이 들어 새까맣게 됐고 굴신을 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매를 든 선배 장교와 부대장의 사과도 있었지만 다음 주말 서울 청진동에서 빈대떡과 막걸리 몇 잔으로 ‘없었던 일’로 하기로 했습니다. 웃으며 비는 낯에 침을 뱉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얼마 전 필자의 칼럼을 읽은 한 독자의 댓글이 올랐습니다. “36년 전 논산훈련소 탄약고에서 전역한 우리 소대장님 맞으시지요. 전역하시면서 부대원에게 강아지 한 마리도 사주셨지요?” 일제의 지배 기간과 같은 36년만의 인간적 교유가 감개무량했습니다. 70대의 응징을 받은 후 내가 부대장이 되면 절대 욕을 하지 않고 빳다도 치지 않겠다고 한 다짐의 결실이 아닌가 합니다.

채근담(菜根譚)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스스로를 반성하는 이는 닥치는 일마다 이로운 약석(藥石)을 이루고, 남을 허물하는 이는 생각이 움직일 때마다 스스로를 해하는 창과 칼이 된다.” 근대 사상가 루소도 “과실을 부끄러워하라. 그러나 과실을 회개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양심이란 어떤 것일까요? 사전에는 ‘사물의 선악(善惡), 정사(正邪)를 판단하고 명령하는 의식 능력’ 또는 ‘자기 언행에 대하여 선악, 정사를 판단할 수 있는 자각 능력’이라고 합니다. 단순한 정의 같지만 여간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선각자들이 일컫는 양심의 정체를 들어 보면 조금은 감이 잡힐 것 같기도 합니다. “행동하는 자는 항상 양심이 없다. 관찰하는 자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양심이 없다.” (괴테). “선(善)의 영광은 그들의 양심에 있지, 사람들의 말에는 없다.” (톨스토이). “사람은 나이를 많이 먹으면 그만큼 경험이 많아지지만, 경험과 양심은 별개의 것이다. 경험이 사는 길은 양심을 키우는 거름이 되는 것이다.” (로렌스)

영국의 속담은 양심을 더욱 두려운 존재로 올려놓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들의 일거일동을 아는 자가 둘이나 있다. 하나는 신이요, 하나는 양심이다.’ ‘양심은 최고의 고발자이다’라고. 양심은 항상 우리들의 영혼을 가책하고, 보이지 않는 채찍으로 매질하는 형리(刑吏)로서 인간을 감시한다는 것입니다.

‘강제적’이란 단서가 붙은 반성문 관련 판결에 토를 달자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반성과 양심은 한 연결고리로 상호작용하는 지각, 자각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른 생각과 말과 행위로 양심을 지키려면 끊임없는 반성 없이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흔히 ‘하늘을 우러러 보아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고 장담하는 정치인, ‘양심선언’이라며 몸담고 있던 조직을 고발하는 공무원, 군인, 교육자들을 우리는 숱하게 보아 왔습니다. ‘뼈를 깎는 아픔으로 스스로를 반성하겠다’는 지도층 인사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말 뒤에는 진정한 반성과 양심의 실체를 보기 힘든 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 합니다.

순자(荀子)는 권학편(勸學篇)에서 “소인배들의 학문은 귀에서 들어와 바로 입으로 빠지며 조금도 마음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입과 귀 사이는 약 4치, 이 정도의 거리를 지나게 될 뿐으로 어찌 7척의 몸을 훌륭하게 만들 수가 있겠는가”라고 했습니다. 말을 앞세우기보다 양심의 거울에 비추어 반성하고 바르게 행동하는 것이 우선해야 한다는 교훈이 아닌가 합니다.







필자소개



김홍묵


동아일보 기자, 대구방송 이사로 24년간 언론계에 몸담았다. 이후 (주)청구 상무이사, 서울시 사회복지협의회 사무총장, (주)화진 전무이사 등을 역임했다. 언론사 정부기관 기업체 등을 거치는 동안 사회병리 현상과 복지분야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기사와 기고문을 써왔으며 저서로는 한국인의 악습과 사회구조적 문제를 다룬 '한국인 진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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