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에게 일기란 무엇이었는가? 왜 철저히 감정을 배제하고 사실만 나열했는가? 이 일기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33세 다산이 사학삼흉(邪學三凶)으로 몰려 지방으로 좌천된 후 겨우 상경했다가 다시 외직으로 밀려나기까지. 2년간의 일기 〈금정일록〉, 〈죽란일기〉, 〈규영일기〉, 〈함주일록〉을 다각적으로 분석해 다산이 언표하지 못했던 속마음을 면밀하게 추적한다.
천주교를 둘러싼 시대적 맥락과 치밀하고 세심한 독법을 통해야만 일기에 숨겨진 다산의 진실을 읽을 수 있다. 학자이자 정치가, 신자이자 배교자였던 ‘인간 다산’의 복잡한 내면을 생생하고도 정교하게 복원한 역작. 마침내 다산 자신의 목소리로 그의 시대를 더 깊이, 더 정직하게 만난다.
목차
서문
백문백답을 열며
001 다산의 4종 일기, 어떤 글인가?
002 4종 일기의 작성 시기와 정리 시점은 언제였나?
003 다산의 일기를 어떻게 읽을까?
004 젊은 날의 다산은 어땠나?
금정일록
005 <금정일록>의 기사와 동선은 어떻게 짜였나?
006 주문모 신부 실포 사건과 <금정일록>은 어떤 관계가 있나?
007 다산과 한영익은 어떤 관계였을까?
008 박장설의 상소는 왜 문제가 되었나?
009 다산은 왜 하필 금정으로 좌천되었을까?
010 정조가 제시한 다산 좌천의 이유는?
011 수원유수 조심태가 다산에게 한 이야기의 의미는?
012 다산은 왜 이승훈을 ‘이형’이라고 불렀을까?
013 당시 금정역의 건물 구성과 환경은 어땠나?
014 당시 다산에게 주어진 금정찰방의 역할은?
015 관찰사 유강에게 보낸 편지 속 ‘즙민지방’은 무슨 뜻인가?더보기
책속에서
P. 23~24
다산은 왜 이 기록들을 남겼을까? 이 일기는 무슨 이유로 문집에서 전부 빠졌나? 일기에 어떤 구체적인 의도를 담았던가? 그의 의도는 어떻게 읽을 수 있나? 다산의 4종 일기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글쓴이의 내밀한 독백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다산은 일기에서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팩트만 제시한다. 다산의 의도는 팩트를 선... 더보기
P. 149
젊은 날의 다산은 이런 일에 결코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다산은 <방산 이도명에게 답함>을 보내 자신의 입장을 한 번 더 밝혔다. 세상에서 자신을 두고 비방이 난무하나, 사실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님을 서두에서 말했다. 그러면서 (…) 이도명이 도문학 공부를 소홀히 하면서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답답함을 안타까워했다. 이렇... 더보기
P. 189~190
다산은 9월 19일에 ‘성주산의 일’로 순영에 보고서를 올렸다. 여기서 ‘성주산의 일’이란 이 지역 천주교 지도자인 이존창의 검거와 관련된 일을 가리킨다. 그간의 탐문으로 이존창의 위치를 알아냈다는 보고와 일의 진행 경과 및 체포 계획을 설명한 내용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1795년 9월, 1791년 이후 4년째 잠적 중이던 이존창... 더보기
P. 212
말이 간청이지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대놓고 말은 안 했지만, ‘네 목숨이 내 손에 달렸으니 네가 살려면 나의 이 정도 부탁쯤은 들어줘야 한다’는 뉘앙스였다. 반대급부는 무엇이었을까? 다산에 대한 더 이상의 공격을 멈추고, 그의 좌천을 끝내며, 나아가 이 돈으로 해묵은 원한을 빚갈음하겠다는 뜻이었다. 준비하는 데 시간이 걸릴 테니,... 더보기
P. 281~283
<도산사숙록> 정리는 천주교도 검거와 봉곡사 강학회에 이어 금정에서 다산이 수행해야 할 세 번째 숙제였다. 앞서 금정 도착 직후인 8월 7일에 이인섭에게 받은 편지에서, 정주의 글을 부지런히 읽고 깊이 믿어 그 가르침에 합치되기를 구하되, 그 모범을 퇴계에게서 찾으라는 주문을 실행에 옮긴 것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