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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의 겨울밤은 길고도 추웠다.[3]
  • 뉴스관리자
  • 등록 2012-12-12 11:3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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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9년 12월 7일 밤 자정이 가까운 시간 영등포 구치소를 나왔다.. 추웠다. 간간 흩날리는 눈발 사이로 저만치 아버님의 얼굴이 보였다. 많이도 아껴주시는 유 바오로 [작고] 선생과 함께였다.

누군가 두부 한모와 막걸리 한 사발을 건넸다. 다시는 교도소와 인연을 맺지 말라는 액땜으로 먹을 것을 권유했다.

오랜만에 단숨에 들이 킨 막걸. 왜 그리도 맛이 있게 느껴졌는지.. 두부 맛도 좋게 만 느껴졌다.유 바오로 선생이 밤이 늦었으니 인근 여관에라도 가서 쉴 것을 권유했다. 마중 나온 서넛과 함께 영등포 역전 앞 모텔에 여장을 풀었다,

모처럼 푹신한 침대에 몸을 뉘이니 깊은 수렁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잠에 취했다.
이른 아침 유 바오로 선생이 길을 안내 해 운보선 전 대통령 댁으로 향했다. 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내내 차입금을 넣어주고 책들을 넣어주신 공덕귀 여사에게 큰 절이라도 올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공덕동 윤보선 전 대통령의 한옥은 말 그대로 아흔 아홉 칸 대 저택이었다. 윤 전 대통령 내외분은 따뜻이 맞아주셨다. 노대통령은 큰절을 올린 필자에게 "고생했구먼 . 지금부터가 시작이야!" 라며 어깨를 두들겨주셨다.

다시 동교동 김대중 선생 댁으로 행했다. 자주 드나든 길목이 어서 눈에 익은 동교동 이다.
김대중 선생의 동교동 사저로 들어서는 골목길이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김옥을 나온 이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이들 때문이다,

사람들로 가득한 응접실에 김대중 선생이 부인 이희호 여사와 함께 들어서자 사람들은 환호하며 만세를 불렀다. 선생님은 두 손을 들어 답례하며 좌중을 돌아보시다 필자의 얼굴에 시선을 멈추었다.

선생님 내외분께 큰절을 올렸다. 괜시리 눈물이 핑 돌았다 . 선생님은 "고생했네 고생했어" 라며 필자의 손을 어루만져주셨다.

하직 인사를 드리고 막 돌아서는 필자의 귓전에 선생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 용훈군 ! 일주일만 쉬고 올라오소!" 흠칫 돌아선 필자에게 다시 말씀하셨다."일주일만 쉬면 되지?"

일주일만 쉬고 올라오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가 어리둥절하고 있는 터에 동교동 비서실의 맡형 격인 권노갑 선배가 말했다.집에 가서 일주일만 쉬고 동교동 비서실에 합류하라는것.. 말하자만 그날로 김대중 선생의 수행비서로 발탁된 것이다.

꿈인지 생시인지.. 어안이 벙벙한 터에도 가슴이 쿵쾅거렸다, 존경하는 스승처럼 어버이처럼 생각하는 김대중 선생을 직접 모시게 된다는 것이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었다.

동교동을 나서 택시에 몸을 싣고 고속터미널에 도착해 당시 논산을 다니던 유일한 고속버스 였던 삼진고속버스 논산행 버스를 행해 걷는 중. 사람들의 시선이 온통 내게로 쏠리는 것을 느꼈다.

덥수룩한 수염에 어머니가 지어주신 한복차람 거기다 징역보따리 둘러멘 필자의 모습이 무척 신기했던 모양이다,

 
더욱 그날 아침 조선일보 조간신문은 성유보 송좌빈 선생 등과 함께 영등포 구치소에서 석방되는 장면이 담긴 사진을 1면 톱으로 싫었으니 세인의 관심을 끌만도 했다.

고속버스에 몸을 싫고 달리던 중 휴게소에 정차 했을 때 용변을 보기위해 잠시 차에서 내리자 여러 사람들이 다가왔다.

가판대에서 조선일보를 사 손에 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빵이며 음료수며 어떤 이는 고생 하셨수! 라며 얼마간의 돈을 건네주기도 했다. 신문의 위력이 새삼 대단하다는 것을 느꼈다.

논산 집에 돌아왔다. 어머님은 불편한신 몸을 이끌고 고속버스 정류장 까지 마중을 나오셨다, 못난 아들을 감싸 안은 어머니는 아픈데는 없느냐? 며 울음을 감추지 못하셨다.

새삼 감옥에 끌려가기 전의 못된 몆 몆 정치 경찰에 대한 분노가 솟구쳤다.

지금은 모두 나이들어 퇴임하고 한 동네에서 섞여사는 이웃이 됐지만 그들은 어머니가 병들어 누워계신 집 안방까지 두를 신은채로 들어와 불법 유인물을 찾는다며 농속을 뒤지고 천장을 막대로 찢어 들쑤시는 등 패악을 저질렀다.

그때 이미 몸이 상당히 불편하시던 어머니는 그 일로 큰 충격을 받으신 듯 심장병이 더욱 심해진 것으로 필자가 석방된 2년 만에 세상을 뜨셨으니.. 직무상 행한 일 모두 이해한다는 입장을 밝히기는 했지만 지금껏 그들의 얼굴을 보기가 편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일주일은 금방 지나갔다. 일주일을 논산에서 보내고 동교동 비서실의 일원이 됐다. 필자가 하는 일은 김대중 선생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일로 말하자면 선생님의 그림자였다.

당시 동교동 비서실은 권노갑 선배가 큰형 그다음에 논산출신 김수진 특보 한화갑 김옥두 김형국 함윤식 등 선배들이 역할을 분담해 선생님을 보좌했고 내가 맡은 수행비서역은 김옥두 선배가 하던 일이었다..

동교동의 안방이나 서재에서 선생님이 붓글씨를 쓰실때나 외국 대사나 주요 인사를 면담하실 때면 의례히 배석자는 필자 한사람일 때가 많았다.

자연히 동교동 선배들의 질시와 시기어린 시선이 뒤따랐고 김옥두 선배가 제일 많은 충고와 조언을 보내오기도 했다.
 
선생님께서 전국을 순회 하시던 중 정읍에서 거행된 동학제에 모시고 간 일이 있다.
온통 거리가 사람들로 가득했다.

거리거리마다 선생님의 얼굴이라도 한번 직접 보려는 사람의 물결,, 아마 한 도시 전체가 그렇게 많은 인파로 뒤덮였던 일은 전무 후무한 일 일 것이다.

당시 필자에게는 감옥에 있을 때도 변함없는 사랑과 애정으로 보살펴주던 아내와는 아직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동교동으로 출근하기 좋은 인근의 성수동에 방한 칸을 얻어 함께 지내고 있었다.

논산의 부모님과 처가에서는 새봄이 가기전에 결혼식을 올리자는 상의가 거듭됐으나 필자는 결혼식 올린다는 말을 선생님께는 털어놓기가 쉽지 않았다.

당시 서울의 봄이라 불리 우던 한국정치의 격변기였던 때 단 며칠이라도 선생님 곁을 떠나 있기란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하루는 저녁을 먹고 난 뒤 서재에 계시던 서재에서 호출 벨이 울렸다. 선생님께서 필자를 찾는다는 전갈이었다.

서재에서 독서에 열중하고 계시던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용훈군 ! 결혼식을 올려야 한다며? " " 그리하소! 내가 주례를 서주고 싶었는데 .. 대신 김상현 의원이 논산까지 가서 내 대신 주례를 서준다 했으니까.. 그리 아소! " 하시면서 당시로선 큰 액수의 축의금을 건네 주셨다.

비서실의 선배들이 말 못하는 필자의 고충을 선생님께 보고 드렸고 선생님께서 응락 하신 것이다.

1980년 4월 6일 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로선 논산에서 가장 큰 규모의 삼보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김상현 의원이 주례를 섰고 동교동 비서실을 대표해 권노갑 한화갑 함윤식 선배들이 자리를 함께 해주셨다.

윤보선 전 대통령 께서는 비서관을 보내 축의금과 함께 무량경복 [無量慶福] 이라는 축하 휘호를 보내주셨고 김대중 선생은 사인여천[事人如天] 경천애인 [敬天愛人] 두점의 축하 휘호를 보내주시기도 했다.

그러나 좀처럼 붓글씨를 쓰지 않으시는 윤보선 전 대통령께서 보내주신 휘호는 훗날 생활고에 못이겨 모 인사에게 헐값에 넘겼으니 두고두고 아쉬운 맘이다.

바쁜 나날이 계속됐다.
박정희 대통령의 피살 뒤 최규하 총리가 대통령이 됐고 김종필 씨가 박정희의 후계를 노렸고 민주진영에선 김대중 선생과 김영삼 선생이 민주진영의 후보 단일화를 놓고 줄다리기를 하고 있던 서울의 봄은 그렇게 무르익고 있을 무렵 .

1980년 늦은 봄 어느날 .. 그날은 선생님께서 외부일정을 마치고 돌아와 서재에서 쉬고 계신 저녁 8시경.. 갑자기 문밖이 소란스러워졌고..

육군대위 복장을 한 장교의 인솔아래 수경사 헌병들 이십여명이 들이 닥쳤다.

삽시간에 동교동 선생님의 자택은 아수라장이 됐다. 마침 비서실 직원들 일곱여덟명이 군인들을 막아보려 애썼지만 총부리를 들이대고 개머리판으로 사정없이 후려치는 바람에 모두 픽픽 쓰러졌고.. 한 비서는 군인이 들이댄 총구에 눈이 찔려 크게 다치는 사고가 있기도 했다.

필자는 응접실에 있었는데 인솔자인 대위는 안방에서 응접실로 나온 선생님 가슴에 총구를 들이대며 " 저희와 함께 가셔야 겠습니다" 했다.

선생님은 손으로 총구를 저으며 " 이거 왜들 이러나? " 한마디 하시곤 그대로 어디로인가 모르는 채로 끌려 가셨다.

필자도 한 군인이 내지른 개머리 판에 맞아 나뒹굴어야 했다.

그것이 신군부가 일으킨 5.18사태 전에 동교동에서 벌어진 일이다.

망연자실한 채로 한달여의 시간이 흐르면서 비서실 직원들이 동교동을 지켜야 할 필요가 없었다.

이희호 여사는 어느날 비서실 직원들을 불러 모았다. 시국이 불투명하고 선생님의 생사조차 알 길이 없으니 당분간 모두 들 헤어져 있어야 할 것 같다며.. 그 달치 월급들을 지급 해 주셨다.

딩시 스물여덟살을 맞은 필자는 선생님이 어디로 끌려 가셨는지 ..생사만이라도 알고 싶어 몸부림 쳤으나 허사였다.

망연 자실했고 이대로 이나라 민주주의가 말살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치를 떨었다.

그렇게 두 달여를 서울 거리를 헤매던 필자는 아내와 상의 한 끝에 고향으로 일단 내려갈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그해 여름 논산시 양촌면 내가 태어난 고향집으로 내려왔다.

어린 시절 정미소를 운영하던 할아버지는 천석꾼 부자소리를 들었다. 시골집은 400여평에 달하는 정원에 숲이 우거져 문을 닫아걸면 절간 같은 고요한 분위기를 풍겼다.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당시 정치 상황은 수천명의 민주인사들을 소위 정치 활동규제자로 묵어 일체의 활동을 일거수 일투족 감시했고 필자도 그에 포함됐다.

다행히 선대 어르신들이 지역에서 인심을 잃지 않아 고향집 생활은 이웃들과도 원만 했으나 그때 면직원은 하루에 한번 면장은 일주일에 두번. 마을담당 순경은 하루에 한번 지서장은 이틀 꼴로 들렸다.

거기에 강경경찰서 정보과 직원 국가정보원 담당 등 필자를 감사하던 이들 때문에 아내는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들은 매우 공손했고 왜 왔느냐고 물으면 "뭐 불편한 일이라도 있으신가 해서 ..라고 말했다.

그들을 미워 할 필요가 없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이니 어쩔 수 없었을 게다.

답답하기는 논산에 계시던 아버님도 마찬가지였다.
.하루는 아버님이 그물망 두개를 사가지고 오셨다.
동네 바로 옆에 있는 냇가에 가서 투망질이라도 하면서 시름을 달래라는 말씀이었다.

집 마당에서 열심히 투망질 연습을 했다. 그리곤 냇가에 나가 하루면 서너 동이 고기를 낚아 이웃들에게 나눠주기도 하고 먹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갈수록 불필요한 살생을 하고 있다는 자책감이 들었고 끝내 그물질을 그만 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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