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시,「2029계룡세계군문화엑스포」 주제어 SNS 공모 이벤트 개최 - 시민과 함께 만드는 엑스포... 8월 10일부터 20일까지 주제어 공모 -
계룡시,「2029계룡세계군문화엑스포」 주제어 SNS 공모 이벤트 개최- 시민과 함께 만드는 엑스포... 8월 10일부터 20일까지 주제어 공모 - 충남 계룡시는 오는 10일부터 20일까지 10일간 「2029계룡세계군문화엑스포」의 비전과 가치를 담은 주제어를 발굴하기 위한 SNS 공모 이벤트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2029계룡세계군문화엑스포는 2029년 10월 5일...
낭인[浪人]의 자회상 [6] 대전교도소에서 영등포 구치소로 이감되다,,, 운명의 시간들이 다가서고...
낭인[浪人]의 자화상 [6] 대전교도소에서 영등포 구치소로 .... 대전지방법원에서 대통령긴급조치 9호 위반죄로 징역 2년4개월 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고 서울고등밥원에 항소했다. 민주헌정동지회 측에서 이택돈 의원 등 두명의 변호사를 변호인으로 선임 해 주었다. 생각 이상의 중형이 선고됐지만 심정은 담담했고 나...

대전중부경찰서에서 사흘간의 조사를 받았다, 대통령긴급조치 9호 위반 죄로 재판에 넘겨지면서 나는 중촌동에 있었던 대전교도소에 수감됐다, 1979년 지독한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7월 무렵이었다.
대전 민주화운동의 대부라 불리우던 송좌빈 선생과 함께다.
일본놈들 치하에 지어졌다는 대전교도소의 내부는 음울 했다, 내가 수감된 교도소의 독방은 두 평남짓 했고 죄수들이 덮고 자던 이불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독방의 맨 끝 변기통애서는 5센터는 됨직한 벌래들이 온통 방안을 휘젓고 다녔다.
절망감에 휩싸였다. 나라의 만주화를 위해서는 어떤 형극의 길도 마다하지않겠다던 내 평소의 의기조차 한껏 움추려들었다, 더욱 이웃방에서는 일곱 여덟의 미결수들이 서로 잡담을 주고받으며 들려오는 간간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들이 더 나를 고립감으로 몰아 넣었다.
그렇게 사흘을 지나면서 일순 머리끝이 쭈뼜해지기 시작했다, 어떤 고난이 와도 설사 죽는다해도 내 민주화운동의 산념을 지키겠다던 평소의 그의기는 다 어디로 사라졌는가 ? 자괴감에 휩싸였다.
마음을 다잡았다. 나로하여 상심하실 부모님과 나를 지켜볼 전국의 민주화운동 동지들에게 그리고 약혼한 몆달만에 헤어져야 했던 약혼녀에게 부끄러운 사람이 돼서는 안된다는 의기가 고개를 들었다.
이 시간을 사랑하자,, 견디어 내자 , 내가 여기서 죽지않고 살아서 나간다면 무언가 보탬이 될수 있는 생각을 가다듬고 내 의기를 지켜내야 한다고 스스로 세뇌하기 시작했다.
감방안에 있던 찬송가 중 햇살이 내리쬐는 숲에서 사슴들이 물을 마시는 사진을 떼어내 감방의 벽면에 붙였다, 치약을 덕지덕지 감방의 한 벽면에 석고판처럼 바르고 십자가 고상을 새겨 놓고는 두손을 모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무신론자의 기도 격식이 있을리 없었다, 예수님 ! 당신이 있다면 내가 갖는 나라의 민주화를 위한 내신념의 의로움을 스스로 확신케 하시고 나로하여금 밖에 있는 기족들이나 민주화운동 동지들이 위축받지 않도록 당당한 모습을 잃지 않게 해주십시요 ..
그런 기도가 계속된지 닷새째 되는 아침 , 놀라운 변화가 생겼다,
마음이 평화로웠다, 가끔 면회를 와주시는 어머님 그리고 약혼녀 앞에서 빙긋 웃는 여유까지 갖게 될만큼 마음의 평정을 찾은 것이다.
어느날 감방을 지키는 간수가 나를 보고 말했다. 1심선고 일이 결정됐다고 했다. 1심선고 후에는 최후진술이 있으니 만큼 그날 하실 말씀이 잇으시면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도 귀띰 했다.
당혹스러웠다, 전국 각 지역의 민주화운동 단체 대표들이 운집할것이 분명했고 고향 논산의 동지들 ,그리고 부모님과 약혼자 도 분명히 참석할 것이어서 나는 바짝 긴장했다. 최후진술을 위한 연습 따위는 생각할 수 도없었다,
1심재판이 있기 사흘 전부터 다시 예수님을 떠올리며 기도를 바쳤다, 예수님 ,당신이 계시다면 1심재판에 나서는 제가 최후진술에서 당당하게 말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고 용기를 주소서 라고....
마침내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8월 어느날 나는 호송차에 실려 대전지방법원 대판정으로 끌려갔다. 송좌빈 선생과 함께 였다.
1층 법정안에 들어서니 에상했던대로 전국각지에서 민주화운동을 함께 하던 동지들이 법정을 기 가득메웠다, 김대중 선생의 장남 김홍일 형의 모습이 보였다, 당시 민주헌정동지회를 이끌던 양순직 회장의 모습도 이댁돈 변호사의 모습도 보였다 부모님과 약혼자 였던 아내도 함께 였다.
나는 일순 긴장했으나 잠깐동인 눈을 감고 다시 예수님께 매달렸다, 예수님 제가 당당하게 말하도록 하소서,
이윽고 재판이 시작됐다, 먼저 송좌빈 선생에게 징역 1년 6월 자격정지 2년이 선고 됐고 최훈진술 기회가 주어 졌으나 송좌빈 선생은 빙그레 웃어 동지들을 행해 손을 흔드는 것으로 최후진술을 대신 했다.
내차례가 됐다. 판사는 내얼굴을 말없이 내려다 본뒤 징역 2년6개월 자격정지 5년을 선고한다고 했다, 재판장은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할말이 있으면 하라고 했다.
어머님이 손수 지으신 한복 바지저고리에 수염이 덥수룩한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최후진술에 임했다.
고대 희랍의 철인 소크라테스는 " 악법도 법이다 " 라는 명언을 남기고 독배를 마시고 죽어갔지만 본피고는 악법은 반드시 고쳐져야 하며 악법에 대한 항거는 죄가 아니다"는 말로 유신정권의 민주화 세력에 대한 탄압을 중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울분에 찬 연설을 시작 했다.
무려 40분이 남는 긴 시간 최후진술을 끝낸 나는 가슴이 후련했다, 마음속으로 " 예수님 당신이 도와주셔셔서 제가 하고싶은 말을 다했습나다" 라고 돌아서는 나를 행해 법정을 가득메운 동지들이 우뢰와 같은 박수로 나를 격려 했다,
감옥에 돌아오니 어느새 소식을 전해들은 재소자들이 모두 환호를 지르며 박수로 환영해 주었다.
나이 스물일곱이었지만 수염이 덥수룩한 나를 보고 교도소의 그 누구도 나를 업수이 여기지 않았다. 서울의 만주헌정동지회 본부 측에서는 나를 대신해 항소를 했다고 했다.
서울고법에서 행해지는 항소심을 위해서는 다시 또 서울 영등포 구치소로 이감을 가야하는 터여서 나는 조용히 이감을 준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운동시간에 마주한 긴급조치 9호 위반죄로 함께 수감된 김용택 씨라는 분과 한담을 나누었다,
그는 내게 말했다.
김선생 ,, 아마 박정권은 아마 오래 못갑니다, 올해를 넘기지 못할 수도 있어요 라고 말했다. 그는 그러면서 박정희 대통령의 이름 풀이를 한다며 내게 말했다.
그의 말인 즉 박정희[朴正熙 ]의 이름을 파자하면 집권 18년[朴]에 점을 치니 반드시 [정[正]
부하들의 총탄에 죽는다 [熙] 라고 했다, 당시에는 너무도 겁나는 이야기였고 나는 그말을 듣고 일순 긴장하면서 "김선생 함부로 말하지말아요 쾐히 큰일납니다 " 라고 말했으나 가슴은 쿵쾅거렸다,
듣고보니 일리가 있는 풀이였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 얼마 후 나는 서울고법에서 진행될 항소심을 받기 위해 서울 영등포 구치소로 가는 호송차에 몸을 싫었다,[ 5편애서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