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시,「2029계룡세계군문화엑스포」 주제어 SNS 공모 이벤트 개최 - 시민과 함께 만드는 엑스포... 8월 10일부터 20일까지 주제어 공모 -
계룡시,「2029계룡세계군문화엑스포」 주제어 SNS 공모 이벤트 개최- 시민과 함께 만드는 엑스포... 8월 10일부터 20일까지 주제어 공모 - 충남 계룡시는 오는 10일부터 20일까지 10일간 「2029계룡세계군문화엑스포」의 비전과 가치를 담은 주제어를 발굴하기 위한 SNS 공모 이벤트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2029계룡세계군문화엑스포는 2029년 10월 5일...
낭인[浪人]의 자회상 [6] 대전교도소에서 영등포 구치소로 이감되다,,, 운명의 시간들이 다가서고...
낭인[浪人]의 자화상 [6] 대전교도소에서 영등포 구치소로 .... 대전지방법원에서 대통령긴급조치 9호 위반죄로 징역 2년4개월 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고 서울고등밥원에 항소했다. 민주헌정동지회 측에서 이택돈 의원 등 두명의 변호사를 변호인으로 선임 해 주었다. 생각 이상의 중형이 선고됐지만 심정은 담담했고 나...

박정희 정권은 1972년 10월 17일 초헌법적인 국가긴급권을 발동하여 8대 국회를 해산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소위 유신헌법을 개정을 통해 장기집권의 토대를 마련하고 그해 12월 소위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선출하는 대통령선거를 통해 8대 대통령으로 취임 강권 통치를 자행했다.
유신정권은 민주화운동의 정신적 지주였던 감대중 선생 김영삼 총재 등 유신정권에 적극저항 한 소위 민주화 세력을 정치규제자로 묶어 가탹에 연금하거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 하는 등 일체의 정치활동을 규제헸다.
나는 이미 71년도 김대증 대통령 선거운동원으로 투옥경력을 가졌던 탓으로 논산지역에서는 최고의 요시찰 대상자로 정보경찰들로부터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당했다.
평범한 일상은 무너졌고 마땅히 해야할 일도 마땅한 일거리도 찾을 길은 없었고 말 그대로 정치적 낭인[浪人]의 삶을 영위했으나 그 당시만 해도 논산지역에는 생각 이상으로 옜 민주당계의 맥을 잇는 인사들이 적지 않았고 당시 스물 일곱 나이의 나는 소위 민주당 계의 막내 였다.
부적면의 서주원 ,가야곡면의 서래선 노성면의 문기범 벌곡면의 이기일 김유제 양촌면의 명건호 선생[모두 작고 ] 들로 대표하는 지역의 민주인사들은 시시 때때로 서너곳 다방이나 목노주점 등에서 만나 민주화 운동방향을 논의 했고 때때로 김대중 선생의 말씀이 담긴 서한 등을 공유하며 지역의 민주화 운동 영역을 넓혀 나갔다.
모두의 경제형편 들은 궁핖 했고 재대로 된 밥 한끼 나눠 먹을 형편도 안됐지만 서로를 위했고 때로는 익명의 독지가들이 보태주는 금일봉으로 민주화 투쟁을 위한 자금으로 쓰기도 했다.
그당시에 논산 시내 에는 대표적인 다방이 서너곳 있었는데 대흥다방 천호다방 미림다방 대림다방 등에서 일하던 내노라하는 소위 마담들이 우리들의 민주화운동 방향을 적극 성원하고 지친 심신을 달래주는 좋은 "곁"이 돼 주기도 했다.
또 이미 작고한 전창우 선배 등 소위 의리파 건달 선배들도 궁핍한 호주머니를 털어 우리를 격려 하기도 했다.
한번은 김대중 선생을 정점으로 하는 소위 전국적 민주운동조직체인 민주헌정동지회 중앙회에서 논산지부 결성을 준비해달라는 주문이 들어왔고 우리네 선후배 등지들은 논산군 민주헌정동지회 결성을 준비하는 과정애서 누가 회장을 맡는가 를 놓고 갑론 을박한 끝에 제일 막내 격인 나를 보고 회장직을 맡아 달라고 입을 모았다.
말하자면 조직결성을 하다보면 정보경찰들의 제일표적이 되라는 이야기였지만 나는 서슴없이 선배동지들의 중의를 받아들여 민주헌정동지회 논산군지부장 직을 수락 했다.
이미 71년 대통령선거와 8대 김한수 의원의 선거운동과정을 통해 논산군 전역에 대한 지리적 이해도를 키웠고 민주화운동에 관심을 갖는 뜻있는 동지들의 면면을 뀌고 있던 나는 논산군 16개 읍면[당시는 16개 읍면이었음 ] 조직 결성을 위해 밤낮을 가리지않고 뜻을 함께할 민주세력 집합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니 자연히 말은 나게 돼있었고 사정경찰들은 나의 일거수 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러던 중 나이 스물 일곱 되던해 어머님이 주선한 혼담이 오갔다. 백면서생에 일정한 직업도 없고 말하자면 정치건달로 불리울 뿐인 내게 혼담이라는것은 사치일 뿐이라며 손사래를 쳤지만 어머님의 의중은 간곡하셨다.
그저 맞선이라도 한번 보라는 어머님의 간곡한 권유에 마지못한 나는 지금의 아내와 생전 처음으로 맞선을 봤다. 성동면 처갓집에서다.
궁핍한 가세 일정한 직업도 없는 거기다 정치건달에 여성편력또한 만만치 않다는 평판이 아내의 귀애 안들어갔을리가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온전히 어머님의 간곡한 청을 뿌리칠 수 없어 가족간 상견례를 가졌지만 나는 아무런 기대도 하지않았다. 더욱 논산여고를 졸업한 아내의 친구들 여럿이 아무것도 볼것없는 건달에다 바람둥이라는 말까지 아내에게 했다는 말을 듣고는 더 그랬다.
그후 보름인가 뒤에 장인어른으로부터 승락이 떨어졌다는 말을 들었다.
어리둥절 했지만 운명이다 라고 생각 했고 처갓집에서 약혼식을 가졌다.
그런데 약혼식을 끝낸 한달 후엔가 사단이 났다. 퇴교한 부평경찰학교에서 교육을 받던중 사귀던 여성이 경찰학교 퇴교 이후 연락이 끊긴 나의 행방을 수소문한 끝에 어느날 그 여동생과 함께 처갓집을 찾았고 논산읍내에 있던 나의 어머님을 찾아 미래를 약속했던 사이라며 울고불고 하소연 했다니 나는 그소리를 듣곤 망연 자실했다.
이제는 모든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아내가 그 처지를 만나 사정은 이해하지만 약혼까지 한 현재 상황을 물릴 수는 없다며 간곡히 설득 하는 바람에 그 여인은 눈믈을 흘리며 돌아갔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만감이 교차 했고 새삼 큰 죄를 지었구나 생각 했다.
그런 우여 곡절 끝에 양가에서는 좋은 날을 잡아 결혼식을 올리자는 입장을 확인 했던 즈음 1979년 여름 더위가 극성을 떨던 7월 어느날 나는 시내 대흥다방에서 민주헌정동지회 논산군 지회 결성을 위한 마지막 회합을 주도 하고 있던 중 갑자기 들어닥친 십여명의 경찰관들에게 이끌려 강경 경찰서 정보과로 끌려갔다.
예의 대통령긴급조치 9호 위반죄로 연행한다고 했다. 강찰서 정보과에서 나를 에워싼 경찰관들은 모두가 안면이 있는 얼굴들이었고 무슨죄로 나를 연행했는가 라는 나의 질문에 그들은 계면쩍은 얼굴로 상부의 지시라고만 했다.
그들의 심문에 대해 일체의 대꾸를 하지않은 나는 그날 하룻밤을 경찰서 정보과에서 밤을 지샌 뒤 다음날 대전 중부경찰서 보호실에 넘겨졌다.
거기에는 충남 민주회운동의 대부로 불리우던 송좌빈 [작고] 선생과 유바오로 [작고] 선생을 비롯한 대전 쪽 민주 투사들이 먼저 붙잡혀 와 있었다.
아마도 충남 전 지역에서 활동하는 민주화 운동 투쟁가들을 일제 검거한 듯 싶었다.
이틀동안 우리를 심문한 경찰관들은 우리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고 나름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4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용훈 굿모닝논산 대표
김대중 전 대통령 잠저시 수행비서 / 2대 논산시의원 / 민주화운동 옥고 [ 대통령긴급조치9호]
민한당 충남도지부 부지부장 / 전두환정권에 의한 정치활동규제[2차해금]/ 민주헌정동지회 논산군지부장 / 전농출범전 논산군농민회 창립 초대회장 / 수세폐지운동 주도 / 새정치국민회의 충남도지부 사무처장 /새천년민주당 충남도지부 사무처장 / 논산시기자협회장 / 충남인터넷신문협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