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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빛진사람
  • 뉴스관리자
  • 등록 2008-05-27 20:0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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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이었던 25일, 경기 남양주시의 모란공원에서 수필가이자 시인 영문학자였던 금아(琴兒) 피천득(皮千得) 선생을 기리는 추모식과 시비 제막식이 열렸습니다. 나이가 100세에 가까웠는데도 늘 5월의 청년같았던 금아는 1910년 5월 29일에 태어나 2007년 5월 29일에 타계했습니다. 생일과 사망일이 한 날입니다. 그의 1주기를 맞아 세워진 시비에는 생전에 가장 아꼈다는 <너>라는 시가 새겨졌습니다.

눈보라 헤치며/날아와//눈 쌓이는 가지에/나래를 털고//그저 얼마동안/앉아 있다가//깃털 하나/아니 떨구고//아득한 눈 속으로/사라져가는//너

참 아름다운 시입니다. 읽을수록 새로운 맛이 납니다. 무슨 새인지 몰라도 적막하고 하얀 눈세상 속의 작은 새가 선명하게 보입니다. 계절은 약간 다르지만, 앉았다 떠난다는 점에서 청마 유치환의 <춘신(春信)>이라는 시도 연상됩니다.

꽃등인 양 창 앞에 한 그루 피어오른/살구꽃 연분홍 그늘 가지 새로/작은 멧새 하나 찾아와 무심히 놀다 가나니//적막한 겨우내 들녘 끝 어디메서/작은 깃 얽고 다리 오그리고 지내다가/이 보오얀 봄길을 찾아 문안하러 나왔느뇨//앉았다 떠난 아름다운 그 자리 가지에 여운 남아/뉘도 모를 한 때를 아쉽게도 한들거리나니/꽃가지 그늘에서 그늘로 이어진 끝없이 작은 길이여

금아의 새는 깃털 하나 떨구지 않고 아득한 눈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는 수많은 제자와 감동적인 작품을 남겼습니다. 아름답고 예쁜 것, 작은 것, 그리고 특히 삶을 사랑하는 맑은 인격이 그의 작품을 보석처럼 빛나게 합니다. 이해인 시인이 작년에 추모사에서 말했듯 금아 자신이 곧 산호이며 진주입니다. 나는 작년 5월 금아의 빈소에 찾아가 조의를 표한 일이 있습니다. 한 번도 뵌 적은 없지만, 건강검진을 받기 위해 병원에 갔던 길에 나도 모르게 빈소로 올라갔습니다.

그의 제자와 후학들은 23일 네 권으로 된 금아전집을 출판했습니다. 6월 5일에는 잠실 롯데월드에 금아 피천득 기념관이 문을 엽니다. 그런 수많은 제자들 중 한 분은 우리 고대사를 소재로 대하 역사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서울대 제자였고 금아의 주선으로 휘문고 교사로 일했던 (주)프리씨이오 명예회장 김영태씨가 <환단의 후예>라는 소설을 쓰게 된 것은 순전히 금아 덕분입니다.

제자가 대학에 남기를 바랐던 금아는 김씨가 아예 교단을 떠나 실업계로 뛰어든 뒤에도 만날 때마다 소설 쓰기를 권했다고 합니다. 김씨는 스승에게 빚을 갚는 심정으로 2005년 초 집필을 시작했습니다. 천지인(天地人) 3부작 총 6권으로 예정하고 인터넷(www.younwooforum.com)에 연재 중인 이 소설은 현재 지(地) 2, 그러니까 4권까지 출판됐습니다. 앞으로 두 권 남았습니다.

금아는 "내가 죽기 전에 자네 소설을 꼭 읽어야 하겠네"라고 채근했고, 작품을 가져올 때마다 역작이라고 칭찬하고 격려하며 꼭 영역도 하라고 권했다고 합니다. 눈이 어두워진 금아는 낭독할 사람을 돈 주고 사서 읽게 할 만큼 제자와 그 작품에 대해 애정이 깊었습니다. 반세기가 넘는 사제간의 인연, 끊임없는 스승의 격려가 어려운 작업을 하게 만든 원동력입니다. 1주기 추모식에는 ‘사랑하다 떠난 이’라는 제목이 붙여졌는데, 금아는 소설의 탈고는 보지 못했지만 그렇게 사랑을 남기고 갔습니다.

그가 가장 좋아했던 5월, 금아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 한 살 청신한 얼굴’ 5월이 끝나가고 있습니다. 이 5월에 박경리씨도 떠나갔습니다. 자연과 생명에 대한 그의 존중과 사랑을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며 추모하고 있습니다. 그가 살았던 원주의 토지문화관은 문인들의 안식처이며 정신적 고향이었습니다.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이 그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 문화예술인만이 아니라 한국인이라면 모두 그에게 빚이 있습니다. 작년 5월의 '조부상'에 이어 누군가의 말 그대로 우리는 이 5월에 '한국문학의 모친상'을 당했습니다.

박경리의 제자들이나 김영태씨의 아름다운 빚 갚기를 지켜보며 나는 누구에게 가장 큰 빚을 지고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불행하게도 그와 같이 좋은 인연은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요즘 사람이 아니라면 베토벤 로망롤랑의 이름을 댈 수는 있습니다. 나는 베토벤과 로망 롤랑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20대에 처음 읽은 로망 롤랑의 <베토벤의 생애>는 평생 반려나 다름없는 책입니다.

로망 롤랑이 이 책을 쓴 것은 20세기 초 늙은 유럽의 탁하고 썩은 분위기, 숭고하지 못한 물질주의에 정신의 힘으로 맞서기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사상이나 힘으로 승리한 사람을 영웅이라 부르지 않는다. 내가 영웅이라고 부르는 것은 오직 마음으로써 위대했던 사람들뿐이다”라고 했던 로망 롤랑은 그런 영웅으로 베토벤 미켈란젤로 톨스토이를 꼽고, 그들에 관한 책을 차례로 썼습니다.

<베토벤의 생애> 서문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이 영웅적 대열의 선두에 맨 먼저 장하고 깨끗한 베토벤을 세우자. 그 자신 고난 속에 있으면서 베토벤은 ‘모든 불행한 사람들은 한낱 나와 같은 불행한 사람이 갖은 장애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란 이름에 값하는 사람이 되고자 전력을 다했다는 것을 알고 위로를 얻으라’고 했다. 오랜 세월의 초인적 분투와 노력으로 마침내 고난을 극복하고 천직을-그 천직이란 그 자신의 말에 의하면 가련한 인류에게 조금이라도 용기를 불어 넣는 것이었다-완수할 수 있게 됐을 때, 이 승리자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이여, 그대 자신을 도우라!’고 말했다. 그의 이 자랑스러운 말에서 가르침을 받자. 그를 본받아 인생과 인간에 대한 인간적 신앙을 다시 일으키자.”

베토벤에게서 배운 것은 고난에 대한 투쟁과 극복 외에도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자유에 대한 인식, 비루함과 굴욕으로부터 궐기할 수 있는 용기 그런 것들입니다. 200쪽도 안 되는 <베토벤의 생애>를 여러 번 읽다 보니 몇몇 문장은 저절로 외우게 됐습니다.

그러나 내가 빚진 사람은 베토벤과 로망 롤랑만이 아닙니다. 우리 말로 옮겨 준 이휘영(李彙榮ㆍ1919~1986) 전 서울대 불문과 교수에게도 빚이 있습니다. 그는 한국 최초로 불한사전을 편찬한 불문학자입니다. 그리고 이 책을 낸 문예출판사. 1966년 창립 이래 어려운 여건에서도 꿋꿋하게 수많은 양서를 낸 그 출판사와 전병석 사장에게도 빚을 지고 있습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베토벤의 생애>를 번역하면서 이 교수 역시 정신의 빚을 말하고 있는 점입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알게 모르게 크고 작은 빚을 지고 있습니다. 이 빚의 고리는 길고 멀고 깊을수록 좋을 것입니다. 마음과 정신의 빚은 클수록 좋고, 갚아야 할 사람이 많을수록 행복합니다. 5월을 보내면서, 되돌려 받지 않아도 좋으니 나도 여러 사람에게 빚을 많이 놓고, 빚을 널리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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