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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으로의 긴 여로
  • 뉴스관리자
  • 등록 2008-05-16 13:5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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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으로의 긴 여로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러 가는 날, 방향 없이 부는 바람에 걸음이 더 더뎌집니다. 흘러넘치는 느낌표의 시대, 새 이름을 외우느니 사람도 없고 문도 없는 곳으로 숨어버리고 싶은데, 왜 가는 것일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물음표가 쌓입니다. 목적지가 보일 때쯤에야 확신 없는 답이 나옵니다. 여행이 하고 싶었던 거라고, 사람은 풍경이고 나라이니, 지친 마음이 익숙한 것들을 떠나고 싶어 하는 거라고. 게다가 이번 만남은 숲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언제나 그리운 나무들의 영토에서!

처음 보는 얼굴들을 만날 땐 비가 내리거나 조금 어두워야 편한데 오월 저녁나절 해는 무대 위 조명 같습니다. 속으론 어서 어두워지길 바라면서도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를 띠고 악수를 하거나 고개를 숙입니다. 한때는 이런 자리에서 서먹해하는 게 저뿐인가 했지만 이젠 대개들 저만큼 쑥스러워한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예전엔 말 많은 사람을 싫어했지만, 낯선 자리에서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친절하다는 걸 이젠 압니다.

잠시 서성이다 보니 어느새 세상이 그늘 속에 있습니다. 지는 해는 툭, 순간에 떨어지는 꽃을 닮았으니까요. 미처 나누지 못한 인사와 덕담을 첫 술잔을 들고 주고 받습니다. 예의를 차리는 한두 문장 뒤에 문장 길이만한 침묵이 이어져 띄엄띄엄 타원을 이루고 선 사람들 사이를 어둠과 함께 채워줍니다. 배경이 어두워질수록 나무들의 키가 자라는 것 같습니다. 떨어져 선 나무들이 가지와 잎을 뻗어 어둔 하늘에서 서로를 만납니다. 땅 밑 보이지 않는 곳에 얽혀 있을 그들의 뿌리를 생각합니다. 지금, 여기 어색하게 모여 선 우리들도 저 뿌리 같은 인연 위에 서 있는지 모릅니다.

남의 잔을 채우는 건 내 부끄러움을 덜어내는 일. 술 안개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경계를 지워, 잔이 거듭될수록 서먹함이 줄어들면서 모두가 나눠가진 오래된 슬픔이 일렁입니다. 미국의 극작가 유진 오닐이 “눈물과 피로 쓴, 오래된 슬픔”의 기록이라 했던 자전적 작품 ‘밤으로의 긴 여로 (Long Day's Journey into Night)’가 생각납니다. 분노, 비난, 기만과 알코올 중독으로 와해 직전에 놓인 가족을 지탱하는 건 언뜻 보아선 보이지 않는, 깊은 강으로 흐르는 사랑입니다.

현 진건이 1921년에 발표한 ‘술 권하는 사회’도 떠오릅니다. “...내게 술을 권하는 것은 홧증도 아니고 하이칼라도 아니요, 이 사회란 것이 내게 술을 권한다오. 이 조선 사회란 것이 내게 술을 권한다오. 알았소?... 내가 옳으니 네가 그르니, 내 권리가 많으니 네 권리 적으니……밤낮으로 서로 찢고 뜯고 하지, 그러니 무슨 일이 되겠소... 이런 사회에서 무슨 일을 한단 말이요. 하려는 놈이 어리석은 놈이야. 적이 정신이 바루 박힌 놈은 피를 토하고 죽을 수밖에 없지. 그렇지 않으면 술 밖에 먹을 게 도무지 없지...”

대낮부터 노을 진 얼굴로 현 진건을 들먹이는 사람들이 있지만 지금은 식민지 시대도 아니고 1980년대도 아니니 사회가 술을 권한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가 권하지 않아도 술을 마실 이유는 많습니다. 외로움, 슬픔, 두려움, 부끄러움, 그리움, 공분(公憤)... 지난 해 우리나라 사람들이 마신 술은 329만 킬로리터. 2006년보다 3.8퍼센트나 증가했으며, 매일 술을 마시는 사람이 남자의 72 퍼센트, 여자의 32퍼센트나 된다고 합니다.

빈 병이 아기 무덤만큼 쌓였을 때 누군가가 언덕 위로 오르자고 제안합니다. 평지에서 보는 밤하늘과 언덕 꼭대기에서 보는 하늘은 다르다고, 얼굴에 단청을 그린 사람 몇이 덜컹덜컹 산길을 오릅니다. 높지 않은 언덕 위 꽤 나이든 무덤 하나가 취객들을 맞습니다. 반쯤 찬 술병 같은 몸을 무덤 앞에 내려놓고 말없이 인사합니다. “안에 누워 계신 이, 편안하신지?” 별들이 깜박깜박 기억의 문을 열어 다른 세상으로 떠나간 동무들을 불러 모아 줍니다. 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했던 고백과 포옹, 술 안개로라도 지웠으면 좋았을 무수한 경계들...

오늘이 어제가 되는 시각, 무덤도 숲도 앉았던 자리도 다 달빛 아래 두고 일어나야 합니다. 등 뒤에서, 밟혔던 풀들이 일어섭니다. 몇 시간 후면 숲도 우리도 지금을 잊고, 술 안개가 애써 지운 경계도 살아나겠지요. 밤으로의 긴 여로는 끝이 나고 그 끝엔 또 새로운 밤을 잉태할 아침이 기다리고 있겠지요. 나무들의 영토가 벌써 그립습니다.







필자소개



김흥숙


코리아타임스와 연합통신 기자, 주한 미국대사관 문화과 전문위원을 역임했으며,
코리아타임스에 "Random Walk"라는 제목의 칼럼을 연재중이다.
저서로 "그대를 부르고 나면 언제나 목이 마르고"와 "시선"이 있고,
김 태길의 "소설에 나타난 한국인의 가치관" 을 영역한 것을 비롯, 10여 권의 번역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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