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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3월에 양촌 고향를 방문하고 동산초등학교에서....
멀리 스리랑카에 살다보니 고향에 온다는게 그리 쉽지가 않다. 만 12년만에 양촌에 와보니 넘 많이 변했다. 당골 모퉁이 가기전 에 양촌 중고가 세워지고 물 너 양촌 초등학교가 새로 지어지고 면사무소도 깨긋하게 단장된 모습도 보았다.이 건너 장터에 큰 슈퍼도 생겼고 교회도 있고 넘 많이 변했다.
오늘은 여기 동산 초등학교 시절이 떠 오른다.
그래 생각나는대로 펜가는대로 몇자 적어 볼까 한다.
나는 2학년때 교실이 부족하여 구건물 뒷쪽에 멍석깔고 공부하다 교실 반을 막은 곳으로 옮겼다가 그곳도 자리가 비좁아 채광리 1/2구 (남녀 약 30명/채동 여학생이 많음)은 양촌 학교로 다녀야 하는 일이 있었다. 그래 나는 양촌 44회와 동산 4회가 동기 동창이 되었다.(양촌 학교 정문앞에 있던 옛날 지서자리에서 공부할때가 새삼기억난다.그때 담임 서영신 선생님였다.)그리고 다시 새건물을 짖고 동산 학교로 오게 됐는데 그때 인내물 이건너는 동산학구 저건너는 양촌학구 그래 당시 여러 1회 선배님들과 같이 동산으로 왔던 기억이 있다.
그래 그때 양촌 41회와 동산 1회가 섞여지고 ...1회 졸업식은 정말 가관이였다.기계체조에 대단하던 이 연구 선생님 (지금도 1회 선배님들은 계속 만나고 있음)였다. 최 용배 선배님의 송사는 나를 아니 참석한 학부모와 학생들을 전체를 울려 버렸고 답사 역시 울음바다로 만들어 버린것을 기억한다.근데 왜 교문 나갈때까지 졸업생이나 재학생 모두가 그리 슬프게 울었는지 모르겠다.(매일 흙나르고 운동장 자갈 줍고 화단 만들고 나무심던 그런 힘든 일들 때문 였을까??....그때 인수중학교에서 푸라다나스나무 옆가지 잘라다 심은게 정문 양쪽 두나무인데 매일 물주고 하던게 기억난다. 엄청 큰 아람들이 나무로 큰줄 안다. )
그리고 또 1년 않되어 반쪽 막은 교실서 생활하던 기억이 난다(담임 이규채 선생님)
입학생은 많고 교실은 부족하고....지금 생각하니 우리 부모님들 아들딸 구별않고 생산한는데는 대단 했던걸로 생각된다. 보통 다섯명은 기본이고 많게는 열둘까지 낳았으니....참으로 정력 좋으시고 부부금실이 매우 좋은 양촌 어른들였던것 같다. 지금은 2명 이상낳으면 여러 혜택과 돈도 준다는데...????
내가 양촌 고향에가 자녀생산능력을 발휘해 볼까 생각해 보는데.....잘못하다간 손녀둔 할아버지가 힘도 좋구 정력도 좋다며....웃음거리가 될까 봐 주춤거려진다.만약 그렇게 된다면 동산학교 학생에 절반은 나씨 성를 가진 훼밀리 스쿨이 되않겠나. 그럼 내가 교장도 하면 어떨까???(분명 난 능력이 있음)...
6학년때는 여학생과 남학생반이 갈리는 운명 남자 6/1은 주장환 선생님/여자6/2는 이현구 선생님이 기억된다. 그 두 분은 지금 어데 계신지..?그리고 그때 우리 동기 동창들 ..대전에서 서울에서..그중 벌써 여러친구가 하늘나라로 먼저 갔으니 우리 나이도 나인가 보다.몇몇 동창은 환갑이라는데 ...나도 이제 곧 그날이 가까이 온것같다. 그래도 가난하고 살기가 힘든그때 우리 부모님들은 상급학교에 많이 보낸것 같고...여러 동창들이 훌륭하게 사회가운데서 중추 역활을 하는것을 보며 자랑스럽다.
어하튼 우리 동기동창 그리고 동산 선후배동문님들 항상 건강 하시고 보람되고 좋은 시간들 되시길 소원 하며 ........두서 없는 글 끝까지 읽어 주신데 감사 드림니다.
2007년 8월 10일
나 종 래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