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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서 지킨 수염 , 일단사 잃표음 [一簞食,一瓢飮]을 귓가에 걸다
  • 뉴스관리자
  • 등록 2017-01-29 15:00:33
  • 수정 2017-01-29 15: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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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결국 밥 한주먹 ,물한바가지면 족한게 사람의 한 삶...

 내 나이  스물 일 곱살   시절의  일이다, 


 1979년대   박정희 정권의  독재를   종식시키기  위한  반독재 투쟁의  불길이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졌다. 

 나라의  민주주의  회복을  열망하는 민주세력은 김대중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민주헌정동지회를  결성하고 전국 조직화에  박차를  가했다,

  박 정권은  대통령 긴급조치를  발동 , 소위 유신체제에 대한   반대움직임에 쐐기를 박았다.

그 누구도  박정희 정권에 대한   비판을  하면 어김없이  단죄의 대상이  됐다.


심지어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조차  유신 독재 정권에 대한 그 어떤  비난도 할 수 없었고    “ 박정희가  정치를  잘 못한다 ”는  말 한 마디  만으로도   감옥으로  끌려가는  빌미가 됐다.


 그해 여름 어느 날  민주헌정동지회[회장 양순직 전 국회의원 ] 논산군 지부장을 맡아   지역의  반체제 인사  조직화 운동으로 주도하던  필자는  지금은 없어진  반월동의  대흥다방에서  지인과  담소하던 중   경찰들에  의해  체포됐고   소위  “ 대통령 긴급조치 9호 위반죄 ”로  감옥에  던져졌다.

나와   함께 조직화를  논의 했던  노성의 문기범[작고] 부적의 서주원[작고] 가야곡의  서래선 [작고]  동지들은  강경경찰서에  끌려가  고초를   겪기도 했다.

감옥도 감옥 나름 . 대전  중촌동에 있었던   지금은 없어진  구 대전교도소  독방의  외로움은   절실했고  엄습해 오는  극도의  좌절감에 어쩔 줄 몰라 했다.

   감옥에서  머무는  이시간이  싫다 해서  내 삶에서  떼어낼 수  없다면  사랑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니    마음이  다소  차분해  졌다,

  죄수들이  덮고 자던  퀴퀴한  냄새의 이불에  코를 묻고   아주 깊게   들이마시기도 했고 , 우거진 숲속에  햇살이   내리쬐는   찬송가 속의  그림들을 벽에  붙이거나    감옥의 벽면에  치약을 뭉쳐  만든   십자기 상을  부착하고  격식 없는  기도에 매달리기도   했다.

     당시   약혼자였던 아내가  넣어준   책들은   아주 좋은  벗이 됐다.  아침에  눈을  뜨면  담요를  개어 놓은 위에   책을 펼치고   밥 먹는 시간을  빼면   온종일   독서에  몰두하던   날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렇게   서너 달이  지나면서   수염은 덥수룩하게   자랐고   별달리   수염을  깍 을 기회가  없던 터여서  그냥  두어둘 수밖에  없었지만  스스로   보기에   싫지 않았다.

  그러던   중   대전지방법원에서  1심 선고를  앞둔  어느 날   점심 무렵 ,  교도관  한사람이   내게로 다가와  “ 김선생님 ,  면도 좀 하시지요!” 라며  수염을 깍 을 것을  권했다,

법정에 나가면   전국 각지에서  민주화운동을 함께 하던  동지들을 만날 테고    혹여  아버지 어머니  라도 오신다면  ,또  그리운   아내라도  만나게 된다면 ,,

텁수룩한  수염이   뒤 덮인 얼굴 보다는   말끔히  면도한    모습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마고  승낙하자   얼마 뒤  교도관은   소지로  일하는   이발사 한사람을 데려 왔다.

 나는 당연히   면도칼을  사용해  수염을  깍 을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  소지 이발사의  손에 들린 것은  수염을 깍 는   면도칼이 아니라   머리를 깍 는  “ 바리깡” 이었다.  이발 기계였다.

 화가  벌컥 났다.

 냅다   소리를 질렀다.  “  어이   교도관  !  당신 눈에는   내 수염이   돼지털 정도로  밖에  인보이나 ?  버럭 소리를 지르며     ”소장 놈 오라고 그래 !“  일갈 했다.

 마흔은  넘어 보이는  교도관은  일순  당황해 하면서도   비교적  공손했다. 


 나이는 새파란  죄수지만    명색이  “ 요주의  정치범 ”  잘못 건드려서  좋을 것  없다는  판단을 한 듯  “ 왜 그러시느냐 ?” 고  물었다.

내가  말했다 

 “당신 하고  말 섞고  싶지 않으니  소장  좀 보자ㅣ그래요 ” 


  교도관이  발길을 돌 린지  한나절  뜸 뒤    과장이  얼굴을  디밀었다,


   “ 뭐  불편 하신 게  있습니까?

 

 내가  말했다  “ 여보 , 당신 눈에는   내 수염이  어찌 보이누?  ”   미염공 소리 듣던  관운장의  수염 정도는  아니지만   꽤   보기 좋은 데요 “  젊은  과장은   능수능란하게  대응했다. 밉지  않은 소리다.

   내가  다시 말했다

 

 


 “ 군말 않고   내가  현재  신분이   형이 확정된  기결수가  아닌 만큼    지금 수염을 깍고 싶은 생각은 없소 ”

 

 

 

 그러자    그날 저녁 무렵   나의  수염  깍 는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자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래서였을까 ?  그해   가을  10,26 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의  총탄에  목숨을  앗기고   긴급조치   9호  해제와  함께    12월  7일   밤  영등포 구치소  감옥 문을   나서면서는   공중파 방송을  비롯한  중앙 언론 카메라의  집중 조명을  받기도 했다.

 

 

 

 

 어머니가  지어주신   한복을 입고    징역 보따리를 둘러메고  감옥을 나서던  그  장면은   1979년   12월 6일자  조선일보   경향신문  중앙일보의 1면 톱기사로  장식되기도 했다.

 

 

 

 

 흐르는 세월  덧없다더니  서로 독방에  나뉘어  있다가  석방되기  일주일  전 쯤   좁디좁은   방에서   함께  기거하던    성유보   한겨레신문    초대   편집위원장도  몆 년전  세상을  뜨시더니  얼마 전    충남 대전지역의  민주화운동의  대부로  불리우던  송좌빈 선생도   타계 하셨다는  소식을 접했다.

 

 

 

 

 문득  부질없는  인생사  한 개의  주먹밥  한바가지  물이면  족하도다  라는 뜻의   일단사  일표음 [一 簞食,一瓢飮] 한마디를  평생 귀에 걸고  살았다는  성유보  선생이 전한  가르침 한 구절을    내 귓가에도   걸고 싶어진다,

 

 

 

 

 새해  새봄엔   일찍 핀  꽃 한 송이  들고   두 분의   유택을    꼭   찾아뵙고  큰 절한 번  올려야겠다.

 

 

 

  2014년  성유보 선생이  생전에   한겨레신문에   올린   기사내용

한겨레 /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72)

  • 기사등록 2014-07-17 11:19:59

 

1979년 ‘10·26’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된 뒤 이른바 시국사범들은 차례로 석방되었고, 12월8일 0시를 기해 ‘긴급조치 9호’도 해제했다. 사진은 필자(성유보·왼쪽)가 12월7일 저녁 함께 풀려난 김용훈(가운데)·송좌빈(오른쪽)씨와 함께 서울 영등포구치소를 나서는 모습으로, 12월8일치 <한국일보> 사회면과 <경향신문> 1면에 실렸다.



1979년 10월26일 ‘독재자’ 박정희 대통령이 갑자기 사라지자, 정치범 처리 문제가 초미의 쟁점이 되었다. 그러나 사법부는 구속자 석방을 두고 갈팡질팡했다.



동아투위 위원 구속자 10명은 그해 말께 모두 석방되었지만, 출소 시기는 뒤죽박죽이었다. 가장 늦게 구속되어 ‘10·26’ 당시 2심 재판이 진행중이던 윤활식 위원장 대리와 이기중 총무가 뜻밖에도 11월8일 먼저 풀려났다. 구속 만기가 된 고 홍종민 위원과 장윤환 위원장 대리는 각각 11월4일과 11월19일 출소했지만, 구속집행 정지로 풀려난 나머지 6명을 보면, 박종만 위원 11월21일, 정연주 위원 12월2일, 고 안종필 위원장 12월4일, 고 안성열 위원 12월10일, 김종철 위원이 가장 마지막으로 12월24일 나왔다.



나는 12월7일 저녁 갑작스레 풀려났다. 송좌빈·김용훈·김상복과 함께 영등포구치소 문밖을 나서니 아는 얼굴이 전혀 없었다. 가족들에게도 미처 석방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던 것이다. 나온 뒤에야 최규하 대통령이 당선 뒤 첫 국무회의에서 국회 건의안을 받아들여 ‘긴급조치 9호’를 8일 0시를 기해 해제한 사실을 알게 됐다.



가족들 대신 우리를 멈춰 세운 남자가 있었다. <한국일보> 기자라고 소개한 그는 4명을 함께 불러 모아 일단 출소 장면부터 찍었다. 그는 바로 박래부(전 한국언론진흥재단 이사장·새언론포럼 회장) 기자였다. 박 기자는 그길로 우리집까지 동행해 가족과 재회하는 사진까지 곁들여 이튿날 사회면 머리기사로 소개했다. ‘닫힌 문 열리며 자유의 포옹-긴급조치 관련 구속자 석방되던 날’이란 제목이었다.



“시간으로는 7일 하오 7시45분. 서울 영등포구치소 앞은 분명히 한밤중이었으나, 수감자들이 하나씩 둘씩 풀려나오면서부터는 이미 새벽이었다. 맨 먼저 회색 바지와 흰 저고리의 김상복(25·중앙신학대 3년)군이 지팡이를 짚고 걸어 나왔다

.

소아마비로 약간 불편한 모습인 김군을 멀리서 가장 먼저 발견한 김군의 누이동생이 ‘오빠야’ 하고 큰 소리를 냈다. 다음 순서는 흰 저고리·검은 바지 차림의 성유보(37·전 동아일보 기자)씨. 그 다음 순서는 송좌빈(56·충남 대덕군 동면)씨 그리고 그 다음은 김용훈(30·충남 논산시 논산읍)씨. 세 사람은 모두 갑작스런 석방 소식이 가족에게 전해지지 않아 마중 나온 가족이 없었다.



삼인은 잠시 허탈한 듯 하다가 근처 대폿집으로 가서 막걸리 2되를 게눈 감추듯이 들이켰다. 안주는 돼지볶음.” “성씨는 서울 강남구 도곡동 10평 아파트 집에 밤 9시55분쯤 도착했다. 그 시간 부인은 남편이 다음날 새벽에나 나올 줄 알고 머리를 감고 있었다. 두 아들 덕무(7살)와 영무(3살)군과 극적인 만남은 그렇게 감격스럽게 이뤄졌다.



” “한밤중 갑자기 안겨든 자유. 한밤중 갑자기 겪는 만남. 전국 곳곳의 교도소와 구치소 문 앞은 다시 결합하는 혈육들의 기쁨으로 밤새 출렁댔다. 속옷 입은 아들을 부둥켜안은 어버이는 수염이 따가운 아들의 볼을 쓰다듬으며 눈물을 쏟았고, ‘외국에 출장 가셨다’던 아빠를 마중한 일곱 살 아들은 ‘아빠, 선물은 어딨어?’ 소리쳐 어른들을 울렸다. 긴급조치 9회가 해제되던 한밤중은 겨울밤답지 않게 짧고 또 짧았다.”

 



그는 <1975-유신독재에 도전한 언론인들 이야기>(인카운터, 2013)에 당시의 취재기를 회상하는 글까지 기고해 주었다. ‘민권일지 사건’으로 갇혔던 동아투위 10명 가운데 하필 나만 ‘긴조 9호’가 해제되던 날 풀려나 유별난 취재 대상이 된 것도 참으로 공교롭다. 어쨌든 아직까지 박 기자에게 술 한잔 산 적이 없으니 나라는 사람은 참으로 무심하다 하겠다.



나는 석방되자마자 경산으로 내려가 부모님을 뵈었다. 그런데 아버님이 야윌 대로 야위어 계셨다. 게다가 알코올중독이었다. 어머님 말씀으로는 1년 전부터 하루 종일 식사 대신 막걸리만 드신다고 하셨다. 나 때문이라는 자책이 들었다.



술은 기쁠 때, 즐거울 때 마셔야 제맛이다. 그런데 아버님께서 “판검사쯤 되어 집안을 일으켜 세울 녀석”이라고 잔뜩 기대를 걸었던 둘째 아들이 두차례나 감옥에 갔으니 억장이 무너지지 않았겠는가? 물론 두 번의 옥살이는 전혀 창피하지 않았지만, 아버님을 뵈었을 때만은 송구스러워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해가 바뀌어 80년 설 때 뵈니 아버님은 더욱 야위어 계셨다. 우리 형제들은 의논 끝에 당시 대구에서 군무원 생활을 하던 막내 동생이 직장을 접고 아버님을 모시면서 정미소를 맡도록 결정했다. 동생에게 아버님 건강진단도 받게 하도록 했다. 아니나 다를까, 위암이었다. 우리는 감히 아버님에게 암을 알리지 못했다. 하지만 아버님 자신도 짐작하셨으리라. 결국 80년 4월말 나는 아버님을 서울로 모시고 와 경북고 동기 도종웅(정형외과 과장)이 있는 국립의료원에 입원시켰다. 5월12일 아버님은 수술을 받았다.

 


나는 아버님 간병을 하느라 석방 이후 6개월간 시국 상황과 단절 상태에 있었다. 그런데도 전두환 정권은 ‘5·17 쿠데타’ 직후 나를 지명수배자 명단에 올려놓았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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