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선생님! 늘 그리운 님 ! 이제 편히 쉬시옵소서
  • 뉴스관리자
  • 등록 2009-09-01 19:03:01

기사수정
 
내나이 스무살 시절.. 아마도 1971년일게다

7대 대통령 선거전이 펼쳐지던 어느 날인가. 쌘뽈여고 교정에서 김대중 대통령후보의 선거유세가 있었다.

해가 뉘였 서산을 넘은 어둑한 시간. 운동장을 가득 메운 청중들 사이를 비집고 가까이서 바라본 김대중 후보.

카랑한 목소리로 토해내는 " 이번에 정권을 바꾸지 못하면 반드시 1인 총통시대가 오고야 맙니다," 카랑 카랑한 사자후에 시민들은 열광하며 "김대중 대통령 !을 연호하고 있었다

정치가 뭔지 알바도 없고 관심조차 없었지만 그날 처음 뵈온 김대중 선생님 . 그이가 그렇게도 좋았다,

그게 내가 정치적 낭인[?]으로 들어서는 운명적인 대통령과의 만남이었다.

그 뒤로 수년 동안 소위 민주화 반독재 운동의 중심에선 김대중 선생의 민주화운동대열에 합류해 민주헌정동지회 논산군 지부 결성에 주력하던 79년 봄날 반월동에 있었던 대흥다방에서 서너 명의 경찰에 의해 연행된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강경경찰서로 끌려갔고 충남도경에 넘겨진 끝에 대전교도소에 수감됐다.

소위 긴급조치 9호 위반이라는 죄명의 표찰이 가슴에 붙여졌다.
대전 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 을 구형받은 나는 징역 2년6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항소와 동시에 서울 영등포 구치소로 이감됐다.

당시 정권에 대한 비판은 물론" 대통령이 정치를 잘 못한다 " 는 말 한마디 내뱉어도 감옥으로 끌려가던 서슬퍼런 독재 정권의 최후발악이었을까..

감옥마다 정치범들로 가득했고 서너평 감방마다 7-8명씩 북적이는 중에도 나는 곱징역이라는 독방신세가 됐다.

햇빛이라고는 아예 들어올 틈도 없는 영등포 구치소의 한평 남짓한 독방. 팔 벌리면 양손이 벽에 닿았고 일어서면 머리가 천정에 닿았으며 누으면 다리가 방 끝에 닿았으니 서도 한방 누워도 한방 이었다.


외롭고 고독했고 불안했지만 고 윤보선 전 대통령 영부인 공덕귀 여사와 이희호 여사가 보내준 몆 권의 성경책과 아직은 결혼 전의 아내가 차입해준 몆 권의 서책들이 유일한 친구였고 책들을 벗해 지낸 그 시간들은 내 생래에 가장 유익한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가을로 접어든 어느 날 감옥 속에서 친구가 된 청주출신으로 긴급초치 11호로 수감된 한 선배가 쪽지하나를 건네줬다.

쪽지에는 朴 正 熙에 대한 이름풀이가 적혀 있었다

朴자를 풀이한 것을보니 十 [십]+ 八[팔]년에 + 卜[점]을 치니 正[정.틀림없이] 熙[己[자기]+ 臣[신하]+ 火 [자기의 신하에게 불로써 해를 당하리라]라는 내용이다

풀이하면 박정희 대통령 집권 18년에 점을 치니 틀림없이 자기의 신하에게 불로 화를 당하리라. 이런 내용이었다.

웃었다.. 황당한 이야기로만 들렸다.

그런데 10월 27일 아침 ,,갑자기 감옥 안이 술렁거렸다. 감방 앞에 한명의 간수가 보초를 서던 것이 두명씩 배치가 됐고 일체의 운동시간이 허용되지 않았다.

외부와 단절된 공간이기는 했으나 삽시간에 박정희 대통령의 피살 소식이 재소자들에게 알려졌다.

엊그제 청주출신 선배로부터 박정희 대통령의 이름풀이를 전해들은 바로 이틀 뒤 박정희 대통령은 그렇게 역사의 한 페이지로 사라져갔다.

그렇게 하루 이틀..지나고 11월 말 쯤 긴급조치가 해제되고 긴급조치 위반으로 투옥된 이들이 곧바로 석방 될 거라는 말들이 나돌았고 12월 7일 드디어 정부의 긴급조치 해제 발표 와 동시에 감옥문이 활짝 열렸다.

어미니가 지어주신 하얀 한복 차림의 나는 책만 가득 든 징역보따리를 걸머지고 감옥을 나서 덮수룩한 수염을 깍을 겨를도 없이 민주화 동지들과 함께 고 윤보선 전 대통령의 저택으로 노대통령을 찾아뵙고 수감 중 보살펴 주신데 대해 감사의 큰절을 올렸다.

동교동으로 향했다.

동교동 선생님의 저택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전국의 교도소에서 풀려난 민주동지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
활짝 웃어 반겨주시는 선생님께 큰절을 올렸다,

"수고했네.. 자네 집에 가서 일주일만 쉬고 올라 오소 "
내 귀가 의심스러웠다.

예? 하고 대구하자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일주일만 쉬면되지?" 말씀인즉 일주일만 고향에서 쉬고 서울로 올라오라는 말씀이셨다.
촌무지렁이 백수 주제에 동교동 근무를 명받은 셈이었다.

서울의 봄이라고 불리우던 그 시절 나는 선생님의 최측근 수행비서 였다.

나라 안 곳곳을 다니시는 선생님의 그림자 되어 지낸 시간들 .. 지금도 머릿속 에는 아주 특별한 기억들이 남아 있다.

정읍에서 행해진 동학제에 참석하시는 선생님을 모시고 들린 정읍 거리는 선생님의 얼굴이라도 보려고 몰려든 인파가 온통 거리에 넘쳐흘렀고,, 한신대학교에서 시국강연을 하시던 어느 땐가는 사람들이 학교 교정을 가득 메워 두 시간 가까이 운신하기조차 어려웠던 일들이 떠오른다.

대전역에 내리셔서 그 많은 지역의 민주인사들에게 일일이 악수를 건네시던 선생님의 빙그레한 미소는 매우 매력적이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79년 12월 어느 날 밤 하루는 야간 당직근무를 하는데 "김군 서재로 좀 오소" 라는 말씀이 있으셨다.

만권서적이 가득한 서재에 들어서니 선생님은 독서에 몰두하고 계셨다.

누군가 서재가 추우실거라며 선물한 영국제 스토브가 방 한켠에서 방의 한기를 녹이고 있었지만 낡은 구옥의 한켠에 자리한 서재는 좀 추운 편이었다.

"다리좀 주물러 주소" 라고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조심스럽게 다리를 주물러 드렸다.
조용한 선생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었이 되느냐가 아니라 올바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맔씀이었다

내생애에 그때 그 시절 선생님의 다리를 주물러 드리던 그 시간들이 아마도 가장 행복했던 시간 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독재정권의 교통사고를 위장한 살해 기도에서 목숨을 건졌으나 그때 다친 다리가 불편하신 선생님은 한때 지팡이를 짚고 다니셨지만 불굴의 의지로 견디어 내셨고 약긴 불편한 모습이었지만 끝내 지팡이를 멀리하셨다.

선생님께서는 이런 말씀도 하셨다
"김군 , 동학의 가르침 속에 사인여천[事人如天]이라는 말이 있네.. 사람이 바로 하늘이라는 뜻이지.. 자네도 훗날 정치를 하려거든 국민을 하늘처럼 이웃들을 하늘처럼 섬긴다는 자세로 임해야 할 것이야...

하루는 또 이런 말씀도 하셨다.

"사람이 세상에 나왔다가 섭리의 이름으로 흙에 돌아가기까지의 시간은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은것 이라네 그 인생을 지혜롭게 사는 길은 "무리도 하지 말고 쉬지도 않는 것이지.......

"무리도 하지말고 쉬지도 말라?" 참으로 난해하기만한 말씀이셨으나 선생님은 그 뜻을 이렇게 풀이해 주셨다.

멀리서 벗이 왔다 해서 술을 마시거나 이야기를 하며 밤을 새는 것도 무리하는 것이고 맛있는 음식이 있다 해서 과식하는 것도 무리일 것이고 분에 넘치는 욕심을 내는 것도 무리일 것이며 모든 것이 적당해야 하며 넘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네.

그리고 맡은 일에 전력투구함은 물론이고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게 . 공부라는 것이 꼭 학교 과정을 통해서만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분야에 관련된 학문이거나 새로운 지식의 습득을 위해 쉬지 말고 꾸준히 노력하고 독서에 열중하라는 말씀을 곁들여 주셨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선생님께서는 사실상 정규대학을 다닌 일이 없는 [목포상고 출신] 분이셨으나 동교동 서재에는 선생님의 손때가 묻은 만권서가 가지런히 책장에 꽃혀 있고 선생님은 그 당시에도 국내외 에서 발행되는 각종 서적을 구해 탐독하시는 외에 홀로 영어 공부에 몰두 하시곤 했다.

한번은 주한 미국대사가 동교동으로 선생님을 방문해 통역 없이 두분이 대좌한 자리가 있었다
두분이 영어로 하시는 말뜻을 잘 헤아릴 수는 없었으나 두분의 말씀을 주고받는 표정들은 너무나 자연스러웠으며 대화의 단절이 없었음에 비추어 선생님의 학구열은 그야말로 경탄을 금치 못할 정도의 초인적인 것이었음을 느끼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운명의 1980년 5월 16일
이미 군부의 동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있던 터여서 모든 비서들이 자리를 뜨지않고 있던 저녁 무렵. 수경사 헌병복장의 군인들 수십 명이 우루루 동교동에 몰려들었다.

대위계급장을 단 지휘자 한사람이 총을 든 병사 대여섯 명을 데리고 비서실을 밀치고 들어왔다.
이를 제지하려는 비서진들과 실랑이가 있었으나 맨손으로 저항하는 비서들을 향해 총 개머리판을 휘두르는 건장한 군인들 앞에선 속수무책일수 밖에 없었다.

이윽고 거실에 모습을 들어낸 선생님에게 지휘자인 대위가 거수경례를 올린뒤 "선생님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같이 가주셔야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헌병 두사람이 선생님의 양옆에서 양팔을 껴않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이거 왜들이러나.."
대위가 말했다

"상부의 지시입니다 저희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것으로 소위 1980년 서울의 봄은 종언을 고하게 된것이다,

그리고는 선생님은 다시 영어의 몸이되고 사형선고를 받게 되고 김대중 선생을 살려라 라는 세계지도자들의 압력에 의해 선생님은 다시 또 고국을 등지고 망명길에 오르게 된것이다.
그 뒤로 서울에서 할일이 없어진 나는 만삭의 아내를 데리고 고향 양촌면 신흥리 생가로 내려왔다.

전두환 정권은 다시 또 나에게 정치규제자라는 족쇄를 채웠다.
고향 양촌에서의 생활은 흡사 유배생활에 다름 아녔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군부독재정권이 내란의 수괴라는 엄청난 멍에를 씌워 사형선고를 내린 김대중 선생의 몸종 노릇 한 터이니 말 그대로 새끼뺄갱이 대접이었다.

면직원은 하루에 한번씩 다녀갔고 경찰서 정보과 형사는 이틀에 한번 꼴. 면장은 사흘에 한번 들린다 . 왜그러냐고 물으면 그들은 한결같이 "별일 없으신가 해서요"라고 공손했으나 내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던 게다.

양촌면 신흥리. 문닫아 걸면 절간같이 고요한 내집은 그렇게 요시찰 대상이었다.
어디에도 갈수 없었다
어쩌다 길을 나설라치면 한두명도 아닌 서너명의 경찰관이 따라붙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한때 뜻을 같이했던 김한수 전 의원과 함께 정치규제에서 2차 해금됐다,

정치활동규제에서 풀려난 것이다.

김한수 전 의원은 당시 아무런 정치적인 활동을 할 뜻이 없던 내게 함께 민한당에 입당하지고 말했다.

당시 유치송 씨가 총재를 맡아보던 민한당은 어용야당이라는 국민의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김대중 선생 과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정치 활동금지의 족쇄를 채운 상태에서는 어쨋거나 제일야당을 표방했다.

나는 망서렸으나 민한당에 들어가 야당성 회복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김한수 전의원의 설득을 수긍하고 그와 함께 민한당에 입당했고 시민들에게 김한수 전 의원을 국회로 보내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고 박찬 전 의원이 3차 해금되자 김한수 전 의원의 민한당 공천이 어렵게 됐고 미국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귀국해 신한당을 창당한다는 소식이 전해져왔다,

그러던 차에 민한당 공천은 박찬 전의원에게 돌아갔고 공천을 받지 못한 김한수 전 의원은 민한당을 탈당한 뒤 김대중 선생과 김영삼 총재가 합작한 신한당 공천을 받게 됐다.

국회의원선거를 불과 며칠 앞둔 어느날 김대중 선생이 귀국하니 옛 동교동 비서진들은 서울로 집결하라는 연락이 왔다.

그러나 몸을 움직일 도리가 없었다, 열차를 탈수도 없었고 한번은 대전으로 향하는 직행버스를 타고 가려했으나 연산사거리에서 나 한사람을 저지하기위해 열명 가까운 경찰관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나를 강제로 하차시키기도 했다.

도저히 서울로 갈수 있는 길이 없던 나는 어느날 저녁 나를 뒤쫓던 경찰관 서너명에게 서울 갈것을 포기했으니 술이나 먹자고 말했다.

지금은 없어진 충청은행사거리 "황제"라는 룸싸롱에 들어간 나와 경찰관 일행. .한 경찰관이 맥주를 시켰다.

나는 양주를 먹고 싶다고 말했고 그날 서울로 향하는 길이 봉쇄돼 울화가 치민 나는 양주를 거의 세병 쯤을 혼자 먹고 대취해 버렸다.

우유한컵 양주한컵 번갈아 들이키니 왜 그리 술이 취하지 않는지.. 그날 아마도 나를 감시하던 경찰관들은 적지않은 술값 때문에 혼쭐났다는 후문이다,

나는 김한수 전 의원의 권유로 민한당에 입당하기는 했으나 정당을 쉽게 바꾸는것은 옳지않다 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결국 김한수 전 의원 대신 민한당 공천을 받은 박찬 전 의원의 선거참모로 맹활약을 벌였으나 신당 돌풍에 박찬의원은 낙선의 고배를 마셨고 김한수 전 의원은 다시 금뱃지를 거머쥐었다.

그후 김대중 선생을 다시 만난 것은 선생께서 평민당을 창당. 대통령 선거에 나섰을 때이다,
이미 김형중 위원장을 중심으로 지방조직을 추스리고 있던 나는 다시는 서울행을 엄두도 내지 못한채 논산의 한 야당인으로 울울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스승이자 어버이처럼 생각하던 김대중 노선을 따라 걷던 끝에 나는 제2대 논산시의회 의원의 신분으로 새정치국민회의 충남도 사무처장으로 발탁됐고 제15대 대통령 선거에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나선 김대중 후보 진영의 충남도 선거대책본부를 진두지휘 한끝에 김대중 정권을 탄생시킨 집권 새천년 민주당의 충남도 사무처장으로 3년간 재직한바 있다.

이제 선생님께서 사인여천 [事人如天/국민이 바로 하늘이다 라는 뜻]의 정신으로 나라의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남북교류의 문을 활짝열고 경제대국의 초석을 다진 위대한 선구자의 사명을 다하고 돌아가신 지금.

내 삼십년 세월 스승에 대한 사부곡이 회한이 눈물되어 가슴을 적신다.
가까이 뫼시지 못해도 늘 정신적인 지주로 내 신념하는 바를 확신케 해주신 그분이다,

어쩌다 설날 아침 세배라도 드릴 겸 찾아 뵈오면 빙그레한 미소로" 어서오소..별일없나?' 물어주시던 다정한 그분이다.

독재가 핍박하던 그 엄혹한 시절 현역병으로 군복을 입고 동교동을 찾아 문안을 드릴라치면 "군복입고 여길 오다니 관찮겠나?" 라고 물어주시던 아버지같은 사랑을 주시던 그분이다.

누가 지금 내게 일생중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 언제였는가를 묻는다면 나는 다시 대답할것이다,,,

깊어가는 겨울밤 선생님과 단둘만이 있던 서재에서 그분의 다리를 주물러드리던 그 시간였다고..

아.. 선생님 .그리운 내님이시여 .. 부디 영면하소서

굿모닝논산 발행인 김 용 훈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최신뉴스더보기
많이 본 뉴스더보기
  1. 와우 ! 대박예감... 신개념 에이스롤러장, .카페 '오슈 신장 개업 논산에  최신 시설을  구비한  대형 실내  롤러스케이트장이  문을 열었다.  롤러 스케이트  방방  키즈까페 등을    주유한 뒤  잠시 몸을  내려 쉬며 커피를  비롯한  다양한 취향의  차향 [茶香]을  함께  탐닉할  " 까페 오슈"도  함께다.  논산시 내동 아주아파...
  2. "이변은 없었다"논산농협 조합장 선거 기호 4번 윤판수 후보 당선 5월 3일  치러진 논산농협 조합장 보궐선거에서  기호 4번 윤판수 후보가  총 투표수  2.775 표중  1338표를 얻어  압승의  영광을 안았다.  조합장으로서의 경영 능력을  인정받아  이번선거에서  이변을 노렸던 기호 3번  신석순 후보는  681표를  얻어  차점 낙선의  불운을  ...
  3. 2024 화지전통시장 옛살비 야시장 개막 , , 공직사회 총출동 ,,,, 논산시가  전통시장  활성화를  위한  방편의 하나로  화지시장  상인회에  예산을 지원해  시행하는  2024년  엣살비  야시장  개막식이  5월  3일  오후 5시  화지시장  제2주차장    광장에서  열렸다. 백성현  논산시장 서원 논산  시의회  의장  최진...
  4. 창경궁 춘당지에 나타난 청룡 창경궁 춘당지에 나타난 청룡 (서울=연합뉴스) 김인철 기자 = 3일 서울 종로구 창경궁 대춘당지에서 시민들이 궁중문화축전 미디어아트 체험형 야간 관람 프로그램인 '창경궁 물빛연화'를 관람하고 있다. 2024.5.3 yatoya@yna.co.kr(끝)
  5. 제주 하늘에 뜬 햇무리 제주 하늘에 뜬 햇무리 (제주=연합뉴스) 박지호 기자 = 4일 제주시 하늘에 햇무리가 관측돼 길을 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햇무리는 햇빛이 대기 중 수증기에 굴절돼 태양 주변으로 둥근 원 모양 무지개처럼 나타나는 현상이다. 2024.5.4 jihopark@yna.co.kr(끝)
  6. 동해해경, 어린이날 기념 함정공개 행사 동해해경, 어린이날 기념 함정공개 행사 (동해=연합뉴스) 4일 동해해양경찰서가 제102회 어린이날을 기념해 동해해경 전용부두에서 실시한 대형 함정 공개 행사에 참여한 어린이들이 각종 체험을 하며 즐거운 추억을 만들고 있다. 2024.5.4 [동해해경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yoo21@yna.co.kr(끝)
  7. 초여름 기온 보인 주말, 시원한 분수에서 삼매경 초여름 기온 보인 주말, 시원한 분수에서 삼매경 (서울=연합뉴스) 황광모 기자 = 어린이날을 하루 앞둔 4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장에서 설치된 분수대에서 어린이들이 초여름 더위를 잊기 위해 물놀이를 하고 있다. 이날 서울은 29도 가까이 기온이 올라 초여름 날씨를 보였다. 2024.5.4 hkmpooh@yna.co.kr(끝)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