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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면자건[唾面自乾]
  • 뉴스관리자
  • 등록 2009-07-12 16:2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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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이 내 얼굴에 침을 뱉으면 그것이 저절로 마를 때까지 기다린다는 뜻
당(唐)나라의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중국사상 유일한 여제(女帝)로서 약 15년간 전국을 지배하였다.

측천무후는 고종이 죽자, 자신의 아들 중종(中宗)과 예종(睿宗)을 차례로 즉위시키고 정권을 독차지하여 독재 권력을 휘둘렀다.

자신의 권세를 유지하기 위하여 탄압책을 쓰는 한편, 유능한 신흥 관리를 많이 등용하고 명신을 적절히 등용하여 정치를 담당시켰기 때문에 천하는 그런 대로 태평했다.

그 무렵, 측천무후의 유능한 신하 중에 누사덕(婁師德)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성품이 온후하고 관인(寬仁)하여, 아무리 무례한 일을 당해도 그 자세에 흔들림이 없이 항상 똑같았다. 하루는 그의 아우가 대주자사(代州刺史)로 임명되어 부임하려고 할 때였다.

그는 동생을 불러 "우리 형제가 다같이 출세하고, 황제의 총애를 받는 것은 좋은 일이나, 그만큼 남의 시샘도 크다고 보면 틀림이 없을 거다. 그렇다면 그러한 시샘을 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처신하면 된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었다.

그러자 동생이 "비록 남이 내 얼굴에 침을 뱉더라도 결코 상관하거나 화내지 않고 잠자코 닦겠습니다. 만사를 이런 식으로 사람을 응대하여 결코 형님에게 걱정이나 누를 끼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동생의 대답을 듣고 누사덕은 다음과 같이 훈계했다.

"내가 염려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네게 침을 뱉는다면 그것은 네게 뭔가 크게 화가 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네가 바로 그 자리에서 침을 닦아버린다면 상대의 기분을 거스르게 되어 그는 틀림없이 더 크게 화를 내게 될 것이다. 침 같은 것은 닦지 않아도 그냥 두면 자연히 마르게 되니, 그런 때는 웃으며 그냥 침을 받아 두는 게 제일이다."

네가 아무쪼록 참을 인[忍]자를 가슴에 품고 매사에 임한다면 별탈이 없을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십팔사략(十八史略)》에 나오는 것으로, 남이 나의 낯에다 침을 뱉을 때 이를 바로 닦으면 그 사람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 되므로 저절로 마를 때까지 기다린다는 뜻으로 오늘날의 세상사를 살아가는 처세훈[訓]으로서도 단연 으뜸이지 싶다.
 
궁녀에서 황제까지 차지한 여걸, 측천무

권력의 각축은 남자만의 전유물이라고 할 수 없다.
전제군주의 통치 아래에서는 여자도 참여할 수 있는 비밀스런 통로가 있다.

하지만 봉건왕조 시기에 여성은 쉽게 권력게임의 중심부에 접근하는 일은 매우 어려웠다.
거의 유일한 방법은 그들의 남편인 황제를 움직이거나, 어린 아들이 황제가 되었을때 뒤에서 조종하는 수단이 있다.
이른바 수렴청정(垂簾聽政)이다. 하지만 이것도 쉽게 얻어지는 방법이 아니었다.
많은 조정 대신들의 견제와 황족(皇族)들의 도전을 이겨내야 한다.

그리고 봉건왕조의 전제정치 아래에서는 오로지 궁중이라는 조건에서만 여자가 권력게임에 참여할 수 있는 특수성이 있다.
그 이유는 국가라는 조직이 엄밀히 따져서 본다면 황제 가족의 사유물이기 때문이었다.
황태후나 황후는 황실가족의 주요 구성원이므로
그녀들은 이런 특수한 상황에서 사유재산을 처리하는 권리를 가질 수가 있는 것이다.
현재에도 최고통치자의 부인을 국모(國母)라고 호칭하는 예를 통해서, 나라(國)를 집(家)으로 동일시하는 관념을 읽을 수가 있다.

더욱이 황제가 후계자를 정하지 않고 갑자기 죽으면 후계자의 지명권한은 황후가 가지게 된다.
황후는 이제 황태후의 자리에 올라 자신의 아들이나 황족(皇族) 가운데 한 명을 선택하여 황제에 앉힐 수가 있는 것이다.
또한 죽은 황제에게 18세 이상의 장성한 아들이 없다면 황제가 된 그의 아들이나, 혹은 다른 황족이 황제가 되어도 법통상으로
아들을 삼은 황태후는 어린 황제가 장성하여 스스로 국가의 정사를 처리할 때 까지 뒤에서 정치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
이른바 후계자의 지명과 수렴청정의 권한은 황태후가 지니는 가장 막강한 힘의 구사이며 이것은 어머니의 고유한 권력이었다.

그렇다고 모든 여인들이 황제를 대신하여 권력을 얻는다고 보장할 수 없다.
잔혹하게 사람을 죽여 그녀의 손에는 한 가닥의 정(情)조차 없다는 뜻의 철수무정(鐵手無情)이라고 불렸던
진(晉)나라의 가남풍은 황제가 백치라는 특수한 사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그녀는 군권(軍權)을 가지지 못한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에는
진(晉)나라를 멸망시킨 악녀(惡女), 음녀(淫女)로 청사에 기록되는 불명예를 되집어 썼다.

여성이 권력을 차지하고 끝내는 그 정점인 황제까지 차지할 수 있는 일은 모래사장에서 구슬을 찾는 일보다 더욱 어려운 일이다.
과거 봉건전제 정치의 속박 아래에 있었던 여성은 철저하게 남자의 권력에 종속되어 있었다.
유교적 도덕이 강하게 지배하였던 사회에서 더욱 심하였다. 남자는 과거라는 통로와 음서제라는 가문의 후광을 업거나
추천이라는 과정을 통해 권력의 중심부에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이 항상 있었지만 여성에게는 이 모든 것이 장벽이었다.
단 하나 궁중에 들어가 황제를 만나야만 가능하였다.
궁중에 들어가 황제의 총애를 받고 아들을 낳았다고 모든게 쉽게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여러 대신들의 세력판도와 황제의 죽음과 후계자의 불명확 등이 어우러져야 가능한 일이었다.
권력의 음모가 횡행하는 황궁이라는 특수한 사회에서 다만 한 여자,
그녀만이 중국의 역사를 통털어 처음으로 바닥에서 시작하여 황후, 태후를 거쳐 측천무후(則天武后)라고 불리우는 여황제가 되었다.

측천(則天)은 그녀의 이름이 아니었다.
그녀가 죽은 후 후인들이 추존하여 붙혀준 호칭이었다. 정식 호칭은 측천순성황후(則天順聖皇后)였다.

봉건시대의 대부분 여성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이름이 없었다.
처음 황궁에 들어 왔을 때, 당태종은 그녀에게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의미의 이름으로 미(媚)를 내렸다.

후에 그녀는 황제가 되기 직전에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조(曌)라 지었다.
해(日)와 달(月)이 하늘(空)에 떠있는 형상의 이 글자는 백성이 사는 대지를 밝게 비춘다는 의미가 담겼다.
바로 이 미(媚)에서 시작하여 조(曌)로 끝난 인생 역정이 측천무후의 길이었다.

측천의 부친 무사심(武士심)은 태원(太原)의 부상(富商)으로,
당고조 이연이 기병을 하였을때 적지않은 공을 세워 당나라 조정과 인연을 맺었다.

당태종 이세민은 황제가 되고나서 대단히 색(色)을 밝혔다.
그는 어느 가문에 아름다운 여인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궁으로 불러와 비(妃)로 삼았다.
측천이 궁에 들어온 해는 정관 11년(637년),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하여 안시성에서 참혹하게 패배하여
줄행랑을 치던 해로부터 아직은 8년 전의 일이었고, 그때 그녀의 나이 열 넷이었을 때였다.

일반적으로 여자가 황궁에 들어가면 대단히 호강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일생을 놓고 본다면 행복이라는 의미를 상실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재난의 시작이라고도 볼 수 있다.

황궁에는 수 천명의 여자가 있지만, 진실로 남자 구실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황제, 그 하나 뿐이었다.
따라서 황제의 은총을 받지 못한다면 쓸쓸히 늙어 갈 수 밖에 없었다.
어떤 여자는 일평생 궁에 살았어도 황제의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생을 마칠 때도 있다.
보아주는 사람 없이 아름다운 꽃이 홀로 피었다가 가을이 되자 안타깝게 지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측천이 궁에 들어갈때, 그녀의 어머니는 통곡을 하면서 말렸다.
그러나 열네 살에 불과한 측천은 당차게 어머니를 달래며 태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황제를 만나고 안 만나고는 제 복이고, 행복하고 안하고는 제 뜻이 아닌가요?”

측천은 궁에 들어가자, 아름다운 용모와 집안의 지위에 걸맞게 재인(才人)이 되었다.

당시 당나라의 궁궐에는 내명부(內命婦)라는 품계가 있는데 재인은 무척 낮은 품계였다.
최고의 위치는 황제의 부인인 황후(皇后)이고,
그 아래로 부인(夫人)에 해당하는 귀비(貴妃), 숙비(淑妃), 덕비(德妃), 현비(賢妃)가 포진하며,
다시 아래로 내려가면 9빈(九嬪)으로 소의(昭儀), 소용(昭容), 소원(昭媛), 수의(修儀), 수용, 수원, 충의(充儀), 충용, 충원이 있으며,
다시 그 밑으로 27세부(世婦)가 있는데 첩여(婕妤)가 9인, 미인(美人)이 9인, 그리고 재인(才人)이 9인 등 모두 27명이었다.
그 아래로 81인의 어처(御妻)가 있는데 보림(寶林) 27명, 어녀(御女) 27명, 채녀(采女) 27명이었다.
숫자를 모두 합하면 총 122명, 이것이 법률로 정해진 당나라 시기의 황제 부인과 후궁의 정원이었다.

여기에서 재인은 33위에 해당된다. 그것도 재인 9명 가운데 제일 첫 번째 순서를 차지하면 그렇다는 것이고 뒷자리를 차지하면
서열은 42위가 된다. 그래도 재인은 내명부의 품계상 서열이 비록 낮았지만, 정식적인 위치를 차지한 후궁의 서열이었다.
문제는 황제를 과연 만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아니면 그녀의 행운이었는지는 모르지만 황제 이세민은 그녀를 보고 한 눈에 반하여, 미(媚)라는 이름을 내렸다.
한편 그녀의 성씨인 무(武)는 용맹하고 씩씩한 남자의 의미가 있어, 아담하고 귀여운 뜻의 무(嫵)로 바꾸어 무미(嫵媚)라고도 불렀다.

또한 당대에 유명한 노래가 한 곡 있었는데, 곡명이 ‘춤추는 아리따운 여자’라는 의미의 ‘무미낭(舞媚娘)’이었다.
여색을 극히 밝힌 당태종이 이런 노래까지 염두에 두고 그녀의 이름을 미(媚)라고 지어 주었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그녀는 얼굴에 걸맞는 아름다운 이름을 얻었다.

궁중의 많은 비빈(妃嬪)들은 측천을 ‘아리따운 꼬마아가씨’라는 뜻의 ‘아미(阿媚)’라고 불렀으며,
화가 나거나 시기를 할 때는 ‘여우같은 계집얘’라는 의미로 ‘호미(狐媚)’라고도 불렀다.

락빈왕(駱賓王)이 측천무후를 비판하며 지은 [위서경업전격천하문(爲徐敬業傳檄天下文;서경업이 전하는 천하에 호소하는 글)]
에서도 그녀를 ‘여우와 같은 아리따운 계집이 주군을 속이고 미혹시킨다(弧媚偏能惑主)’라고 욕하면서 ‘호미(弧媚)’라는
이름을 거론하였다.

어쨋든 무미(武媚)는 아름다운 여자였다.
현재 그녀의 얼굴을 그린 그림이 전해지지 않는 상황에서 정확하게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는 모르겠으나,
용문석굴(龍門石窟)에 있는 석조로사나불(石造雕盧舍那佛)이 측천무후의 얼굴을 본떠서 만든 불상이라고 전해지는걸
바탕으로 유추한다면, 그녀는 통통하고 풍만한 여자였다. 얼굴이 넓고, 눈썹이 길며 눈이 컸다.
눈꺼풀의 선이 부드럽고 코가 높았으며, 입이 크고 입술의 곡선이 아름다웠다.

현대 여성의 기준에서 본다면 농염(濃艶)한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당(唐)대의 미인기준은 건강과 풍만함이었으므로 그녀는 매우 자극적인 유혹미를 가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무미의 궁중운(宮中運)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일찌기 중국을 통일하고 주변의 나라에까지 이름을 날리던 당태종 이세민은 이미 나이가 들어서인지,
변덕이 심하고 자주 병으로 누웠다. 더욱이 말년에는 도가장생(道家長生)의 비법(秘法)에 빠져 많은
양의 단약(丹藥)을 복용하여 오랜 기간을 침상에 누워 지냈다. 이른바 살아있는 시체와 같았다.

정관 23년(649년)에 그는 5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빛나는 공훈과 위대한 업적을 남긴 당태종도 세월의 도전은 이기지 못했던 것이다.
이때 무미(武媚)의 나이는 의욕이 왕성한 스물 여섯에 불과했다.

그녀에게 운명은 때때로 가혹하였다. 젊고 아름다우며 사람을 끌어당기는 미모에다 총명하고 똑똑하며 생기발랄하고,
의욕과 정욕이 폭발적이었던 그녀는 엄격한 황법(皇法)에 따라 비구니(比丘尼)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에 황제가 죽으면 황자(皇子)를 낳지못한 궁녀들은 모두 감업사(感業寺) 니고암(尼姑庵)에 호송되어 머리를 깎아야 했다.
그것이 국법이었다.
황제의 성은을 입은 여자는 그 주인인 황제가 죽는 것과 동시에 살아 있으되 죽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사원에 갇혀사는 운명이었다.

니고암은 오로지 푸른 등(燈)과 누런 불경(佛經)이 전부였다.
꽃처럼 아름답고 암표범처럼 발랄한 궁녀들은 참혹한 세월을 인고와 슬픔 속에서 살지 않을 수 없었다.

무미는 가혹한 운명을 따르지 않았다. 그녀는 천명(天命)이라는 이유로 여자를 속박하는 현실의 제약을 단호히 거부하였다.
열 넷에 궁중에 들어온 그녀는 자신의 미모와 재능을 걸고 일생일대의 도박을 결심하였다.
당태종이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들던 시기에 그녀은 자신의 운명을 선택하였다.
주사위를 던졌을 때 나올 수 있는 확률로 본다면 6개의 면 가운데 하나이므로 어차피 선택의 확률은 3할이 넘는 것이다.
하물며 다음에 황제가 될 사람을 선택하는 것은 주사위를 던지는 일보다 쉽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는 나이가 들어 이미 삶의 끈이 오락가락한 당태종에게서 일찌감치 눈을 떼고, 다른 사람에게 도박의 대상을 옮겼다.
그 사람은 바로 태자 이치(李治)로서, 후에 당나라의 3번째 황제가 되는 당고종(唐高宗)이라는 인물이었다.

당태종은 처음에 큰 아들인 이승건(李承乾)을 태자로 삼았다. 이승건은 태종이 스물 네살이었을때 세상에 태어났다.
그는 호방하고 담대하며 용맹한 성격은 부친을 그대로 빼닮았다.
하지만 행동이 지나치게 방종하고 무례하였다. 이 점은 당태종과 판이하게 달랐다.

일반적으로 황태자가 성인이 되었는데, 즉위를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면, 부황(父皇)과 간간히 불화가 발생한다.
더욱이 황제와 태자의 성격이 모두 불같으면, 일반 백성의 경우처럼 부자(父子)사이에서 말다툼이 일어나고 그 끝에 가서는
충돌이 벌어진다. 만일 황제가 화를 참지 못하면 곧바로 태자를 바꾸려 의도하고, 태자가 이를 받아 들이지 않는다면 반란이 일어난다.

이승건은 불같은 성격의 당태종과 번번히 충돌하였고, 당태종은 태자를 바꾸려고 계획하였다.
그러나 이승건은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고, 검주(黔州)로 유배를 당하였고, 그곳에서 삶을 마감하였다.

당태종은 후환(後患)을 막기 위하여 모종의 수단을 강구하였다.
그는 성격이 유약하고, 결단력이 부족하며, 부친에게 효성이 지극한 아홉째 아들인 이치(李治)를 태자로 삼았다.

태자 이치는 당태종의 예상대로 매우 공손하고 효성스러웠다.
하지만 영웅적인 아버지와 유약한 아들 사이에도 알 수 없는 반발심리가 있게 마련이다.

649년 그 해 봄, 당태종이 병을 얻어 눕자 이치는 그의 곁에서 며칠을 간병(看病)했다. 무미는 이때를 기회로 삼았다.
그녀는 황제의 침소에서 정성껏 간병을 하면서 이치를 유혹하였다. 무미는 이치보다 네살이 많았다.
그녀는 남녀의 방사(房事)에도 경험이 풍부하고 이치(理致)에도 밝았으며, 심지(心智) 방면에서도 태자보다 성숙하였다.

우선 그녀는 황제를 극진히 보살피면서, 틈이 나면 태자에게 깊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때로는 어머니처럼 자상하고 따스하게 태자를 감쌌으며, 어떤때는 누나처럼 다정하고 친근하게 태자를 대하였다.

이치는 감정을 다스리고 표현하는데 미숙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보살핌이나 가족들의 눈길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성장한 그는 무미의 행동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어느덧 이치는 무미를 보게되면 마음이 평안하고 따스해졌다.

변화는 알 수 없는 시간의 흐름속에서 싹이 트고 꽃이 폈다.
어느 날, 무미는 차와 과자를 이치에게 건네면서, 슬쩍 부드러운 자신의 손으로 태자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이치는 숨이 막힐듯한 감정 상태로 무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마치 무엇을 갈망하는듯한 그윽한 눈빛으로 이치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얼른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이후로 이치는 무미를 만나면 부끄러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하루는 태종이 깊은 잠에 들자 태자 이치는 그의 머리 맡에 앉아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때 이치는 불현듯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언제 들어 왔는지 무미가 가슴을 앞으로 내밀고 그의 등 뒤에 서 있었다.
얇은 옷을 걸친 그녀의 모습에 이치는 눈을 감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봉긋한 가슴과 백설같은 피부가 눈에 아른거렸다. 이치는 당장에 일어나 그녀를 안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렸다.
무미는 태자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그를 바라보다가 슬며시 밖으로 나갔다.

어느덧 태자의 마음 속에는 그녀를 탐하는 욕망이 자리잡았다. 이제 남성으로서 아버지 이세민의 연적(戀敵)으로 발전하였다.
아울러 부친의 존재(存在)와 지위(地位)와 소유(所有)에 반발하고 보복하려는 생각이 서서히 꿈틀거렸다.

여름이 되었는데도 당태종의 병은 낫지 않았다. 이 날도 태자 이치는 밤새워 당태종을 간병하였다. 새벽녘이 되었을때,
그는 측간(厠間)에 가고 싶어 부친의 침소를 빠져 나왔다. 많은 궁녀들이 기둥에 기대어 잠이 든 모습이 간간이 눈에 띄었다.
그는 궁녀를 깨우고 싶지 않아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측간에 다다랐을때 그는 등 뒤에서 가벼운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바로 무미였다. 이치는 반갑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여 공손하게 물었다.

“무 재인은 어떻게 이곳에 왔습니까?”
무미는 가볍게 무릎을 접으며 예를 올리고 대답했다.
“소첩(小妾;궁중에서 궁녀가 자신을 낮추어 하는 말)이 태자를 위하여 갱의(更衣)를 하겠습니다.”

고대의 황제나 귀족들은 측간에서 모두 갱의(更衣)를 하였다.
이는 상전이 볼 일을 보고나면,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시비(侍婢)가 옷을 바꾸어 입혀주는 천한 일이었다.

이치는 얼른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무 재인은 부황(父皇)께서 아끼시는 분인데, 어찌 태자인 내가 갱의를 받을 수 있습니까?”

이치의 말이 끝나자 무미는 태자에게 다가오면서 말했다.
“앞으로는 태자를 모시고 싶어도 그럴 기회가 없을 것입니다.”
그녀는 태자의 웃 옷을 벗기고서 그의 품안에 얼굴을 묻었다.
이치는 그녀의 뜨거운 숨을 느끼며 쿵쿵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입술을 깨물었다.
무미는 더욱 태자의 품을 파고 들으며 고개를 들어 태자의 입술에 예쁜 자신의 입술을 덮었다.

둑이 무너지면 쏟아지는 물이 걷잡을 수 없듯이, 태자의 감정도 일시에 폭발하여 전신에 퍼져나갔다.
두 사람은 열열하게 몸을 더듬으며 입술을 맞추었다.

폭풍우가 지나자 무미가 굵은 눈물을 흘리며 울먹였다.
“소첩은 이미 태자 마마의 소유입니다. 오로지 태자에게 의탁하고저 하오니 제발 헌 옷처럼 버리지나 말아주세요.
깊은 밤을 고독으로 지새우지 않게만 해주세요.”

이치는 그녀의 손을 꼬옥 감싸며 말했다.
“내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그날까지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재인을 반드시 불러 주겠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태종의 침소로 돌아왔다.

얼마 후, 그들의 바램대로 태종 이세민이 세상을 떠나고, 효성스런 태자 이치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당태종의 어행(御幸;임금과 관계를 맺는 것)을 받고도 자녀를 낳지 못한 궁녀들은 법에 따라
장안성 밖에 있는 감업사(感業寺) 니고암(尼姑庵)에 압송되었다.
무미는 똑같은 처지의 궁녀와 함께 니고암에서 새 해를 맞이하였다.

당고종(唐高宗;649-683) 이치는 650년 새해 첫 날에 년호를 영위(永徽)로 바꾸었다.
영휘 원년(650년) 봄은 이곳 니고암에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무미는 하루하루 고통스러운 수절 생활을 하면서 이치를 기다렸지만 황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는 이치를 원망하며 부득부득 이를 갈았다. 그렇지만 그녀는 한가닥의 희망을 버리지는 않았다.

어느덧 일 년의 세월이 지나갔다. 당태종의 기일이 훨씬 지난 어느 날, 이치는 감업사 니고암에 나타났다.
사원의 비구니들은 모두 옛날에 당태종을 모시던 궁녀들이다. 그녀들은 황제가 사원에 나타나자 모두들 놀라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지만,
오로지 한 여자만이 미소를 지었다. 무미는 깨끗하게 단장하고 조용히 방에 앉아 뛰는 가슴을 가라 앉혔다.

그녀의 예상대로, 당고종은 향을 사르고 난 뒤에, 은밀하게 무미를 찾았다. 그녀는 당고종의 무릎에 머리를 파묻고 울먹였다.
“폐하께서는 소첩을 잊지 않았군요?”

당고종은 그녀의 얼굴을 들어 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무미는 치렁치렁한 머리를 깎아 대머리였지만 그윽한 눈빛은 변함이 없었다.
당고종은 그녀에게 반드시 궁으로 데려가겠다고 약속을 하였다.

당고종이 궁에 돌아오자, 왕황후(王皇后)는 그에게 조용히 물었다.
“폐하께서 감업사에 가셨다고 하시던데, 어느 보살을 얻으려 가셨나요?”

이치는 숨길 수 없다고 여기고, 무 재인(才人)의 일을 황후에게 말했다. 황후는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폐하는 천하를 다스리는 군주이신데, 마음에 두고 있는 여인을 어찌 니고암의 비구니로 만들었나요?”

이치는 설명하기 곤란하여 입을 다물었다.
당시에 북방에 사는 호인(胡人)들은 아들이 아버지의 가업을 계승하면, 친어머니를 제외한 모든 여인을 첩으로 삼을 수 있었다.
이치의 선조들은 대대로 북방의 선비족과 함께 생활을 하였고, 일부는 그들의 피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이 방면에는 그다지 제약이 없었다.
하지만 천하를 얻고난 뒤에는, 유교적 도덕률로 인하여, 아들이 부친의 첩을 취하면 패륜아(悖倫兒)로 낙인 찍혔다.

왕황후가 아무렇지도 않은듯이 말했다.
“이 일이 무어 그리 어렵다고 고민을 하십니까? 선황제께서 이전에 물려주었다고 공표하면 그만이지 않습니까?
누가 감히 반대를 하겠습니까?”

이치는 왕황후에게 극구 고마움을 표시하고 무미에게 머리를 기르도록 하였다.

왕황후가 황제에게 무미를 궁중으로 불러들이게 권한 진정한 이유는,
결코 질투를 해서는 안된다는 봉건적인 도덕률 때문이 아니었지만,
사실 이도 따져보면 결국은 질투, 바로 투기(妬忌)라고 하는 여자의 질투 때문이었다.

황후인 그녀는 아들을 낳지 못했기 때문에 늘 불안하였고,
그녀의 경쟁 상대인 소(蕭) 숙비(叔妃)가 이치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어, 심각한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왕황후는 이치의 사랑을 받고있는 무미를 궁중으로 끌어들여, 황제의 총애를 분산시키고 결국에는 소숙비의
세력을 약화시키는게 주요한 목적이었다. 그것은 마치 늑대를 끌어들여 여우를 내쫒는 미련한 짓이었으나,
왕 황후 그녀에게는 그런 권력의 이치를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무미는 영위 5년(654)에 감업사에서 나와 궁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궁에 들어오자 많은 사람들에게 공손하고 예의바르게 행동하였다.
특히 왕황후는 극진히 모셨다. 무미는 왕황후의 시녀를 통해 황후가 좋아하는 일이나 음식을 미리 알아냈고,
좋아하는 패물도 미리 준비하고 있다가 때때로 바쳐 환심을 이끌어냈다.

무미가 가장 신경을 써서 준비한 일은 소숙비에 관한 정보였다.
그녀는 왕황후 앞에서 소숙비의 못된 성격이나 행동을 들먹이며 황후의 답답한 심사를 즐겁게 해주었다.

왕황후는 매우 흡족하여 무미야말로 자신의 가장 충실한 오른팔이라고 생각했다.
왕황후는 이후 황제의 앞에 가면 무미가 건네준 정보를 이용하여 소숙비를 힐난하였다.
동시에 무미의 아름다움과 공손한 태도, 순결한 마음씨를 극구 칭찬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황제는 소숙비를 멀리하고 오히려 무미를 더욱 총애하기 시작했다.
입궁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무미는 소의(昭儀)에 올랐다. 내명부의 서열상 33위에서 6위로 뛰어 올랐다.
명분상으로 본다면 소의라는 직위는 후(后)와 비(妃)보다 아래였지만, 총애를 가지고 생각한다면 황후나 숙비보다 훨씬
높다고 볼 수 있었다. 더욱이 무소의(武昭儀)는 황제에게 2명의 아들을 선사하였으니 그녀의 지위는 날이 갈수록 튼튼해져 갔다.

당고종 이치가 무미를 총애하는 이유는 단지 왕황후의 적극적인 칭찬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거기에는 이치의 성장과정에서 형성된 복잡한 감정이 얽혀져 있었다.

이치는 당태종 이세민의 정부인(正夫人)인 장손황후(長孫皇后)가 낳은 세 아들 중에서 막내였고, 당태종에게는 9째 아들이었다..
그의 동모(同母) 두 형인 태자 이승건과 위왕(魏王) 이태(李泰)는 어려서부터 총명해서 태종 이세민과 장손황후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이치는 선천적으로 몸이 허약하고, 말도 어눌하며, 행동도 기민하지 못해서 부모의 주시와 애정을 받지 못하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심리적인 중압감과 불안감을 지닌채 성년을 맞이하였다.

태자 이승건이 당태종과 마찰을 일으켜 자리에서 쫒겨 났을때, 그들의 외삼촌인 장손무기는 비교적 이치가 유약하고
결단력이 부족하여, 당태종 사후에 쉽게 황제를 통제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이치를 적극적으로 태자에 추천하였다.

황제가 되고나서도 이치는 어렸을때의 유약하고 겁많은 성격을 전혀 고치지 못하였다.
그는 자신감의 결핍과 무미건조한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만사를 귀찮게 여겼다.

무미는 이치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빨리 파악했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이치의 행동과 기분에 적즉적으로 맞추어 나갔다.

무미는 따스하고 부드러우며, 누나같고 엄마같은 행동으로 이치를 감싸안았다.
일반적으로 목표가 뚜렷하지 못하고 의욕이 없는 황제는 복잡다잡한 조정의 업무에 쉽게 싫증을 느끼게 마련이다.
엄청난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는 황제들은 보통 나약하고 부드러운 여자를 학대하여
거기에서 불안하고 억눌린 감정을 보상받는 변태적인 심리와 행동을 가지게 마련이다.

이치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일상적인 감정상태에서 벗어나 중압감이 밀려오면 변태적인 행동을 취하여 쾌감을 얻었다.
무미는 일찍 그걸 발견하고, 이치와 함께 잠자리에 들면 갖가지 이상스런 행동과 기술로 황제를 품안으로 끌어들였다.
이치는 다른 여자에게서 전혀 느끼지 못하는 쾌락과 만족을 얻으면 얻을수록 무미에게 빠져들었다.

적당한 시기가 되자, 이치의 유약한 마음에는 무미의 강렬한 인상이 뿌리박히기 시작하였다.
무미가 슬퍼하면 함께 슬퍼하고, 기뻐하면 함께 기뻐했다.

무소의는 빠른 시간 안에 소숙비를 제압하고, 계속해서 왕황후의 자리를 넘보기 시작하였다.
이치를 꼬득인게 그녀의 첫 번째 선택의 결과였다면 이제 궁안의 궁녀와 대신들을 자신의 측근으로 끌어 들이는 2번째 도박을 단행하였다.

당고종의 부인인 왕황후는 권문세족의 출신으로, 신분에 걸맞는 행동과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봉건적 도덕윤리에 따라 남편이 무엇을 하든 받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여자였다.
황제의 주변에 있는 비빈(妃嬪)들을 제대로 거느려야 하고, 그녀들에게 인심을 베풀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인 유씨(柳氏)는 거만하고 고약한 성격을 가졌다.
유씨는 때때로 왕황후를 만나러 궁에 들어오면 다른 사람을 눈 안에 두지 않았다.

무소의는 황후궁에 자주 드나 들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궁인(宮人)들과 안면이 있었다. 궁
인들이 황후와 유씨로부터 목욕을 받거나 수모를 당하면, 무소의는 부드러운 말투로 위로하거나 선물을 보내 환심을 샀다.

궁인들은 그런 무소의를 존경하고 따랐다.
무소의는 황후궁의 주변에 정보망을 구축하고 황후의 행동을 손바닥 보듯 훤히 꿰뚫었다.

무소의는 황제와 잠자리에 들면 우선 황후의 근황을 물어보고 조금씩 황후를 헐뜯기 시작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치는 소숙비에 이어 왕황후도 점차 싫어하는 눈치를 보였다.

몇 달이 지나서 무소의는 임신을 하고 공주를 낳았다.
보름달이 빛나던 어느날 왕황후는 무소의가 낳은 딸을 보기 위하여 소의궁에 찾아왔다.
황후가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이번에는 황제가 찾아왔다.

무소의는 매우 기쁜 표정으로 황제의 허리에 매달리며 교태를 부렸다.
한차례 장난이 끝나자 무소의가 소궁주가 잠자고 있는 내실로 황제를 이끌고 들어갔다.

궁녀가 조용히 이불을 걷어올리자 뜻밖에도 소공주는 조금도 울지않고 움직이지 않았다.
무소의가 급히 안아 올리며 살펴보았다. 아이는 이미 숨이 끊어진 뒤였다.

무소의는 두 눈을 부릅뜨고 비통한 눈물을 떨구며 울먹였다.
“방금 누가 다녀갔느냐?”

궁녀는 안색이 시퍼렇게 변하면서 모기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황후 마마께서 다녀 갔습니다.”

당고종 이치는 무소의보다 더욱 화를 내며 소리쳤다.
“황후가 나의 공주를 죽였구나!
소숙비를 그렇게도 미워하더니, 이제는 무소의마저 시기하여 이런 엄청난 일을 꾸미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구나.”

무소의는 힐끗 황제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폐하, 황후 마마께서는 잠시 눈이 어두워 이런 일을 저질렀는가 봅니다. 용서 하십시오.
제가 다시 폐하께 공주를 낳아 드리겠습니다.”

무소의는 목적을 위해서는 혈육도 독살한다는 잔인한 모정(母情)을 그대로 실행하였다.
그녀는 황후를 모함하고 자신의 지위를 다지기 위하여 눈하나 깜빡하지 않고 자식을 죽였다.
그리고 이것은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의 알림이었다.

공주의 죽음이 있고나서 며칠 후, 황후궁의 어느 궁녀가 무소의를 통해 황후의 비리를 황제에게 밀고했다.

“황후 마마와 모친 유씨가 궁중에서 사사로이 무당을 들여와 황제 폐하와 무소의 마마를 저주하는 축주(祝呪)를 하였습니다.”

이치는 더이상의 자세한 내용을 알아보지 않고 유씨의 입궁을 금지하고, 황후에게 근신(謹身)을 명령하였다.
황제의 마음 속에는 황후를 폐출시킬 의도가 점점 깊어갔다.

그러나 황후를 폐출시키는 일은 그리 쉽게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당고종이 즉위한 초년에는 대부분의 권력이
장손무기와 저수량(저遂良)과 같은 고명대신(顧命大臣;선황제가 특별히 후임황제의 보필을 위임한 신하)의 손안에 있었다.
그들은 당태종의 부탁을 받고 황제를 보필하는 신하들로, 예의 바르고 품행과 덕망이 높은 왕황후가 그런 축주를 했다고 믿지 않았다.

더욱이 장손무기는 무소의가 황제의 침상에서 갖은 교태로 홀려서, 그녀의 아들을 태자로 옹립하고 자신이 황후가 되려는
야욕을 눈치채고 강력하게 반대를 표명하였다. 만일 무소의가 황후가 된다면, 곧바로 천하의 웃음거리가 된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하지만 장손무기와 저수량의 권력을 시기하는 많은 대신들은 당고종의 의도를 적극적으로 찬성하면서, 암암리에
장손무기 일당의 권력을 약화시키려고 하였다. 예를 들어서 개국공신인 이적(李勣)은 당고종의 물음에 대하여 아주 쉽게 대답하였다.

“폐하, 그것은 황실의 문제에 속하므로 남에게 굳이 의견을 들으 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애써 대답을 피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장손무기가 고명대신이라는 이름을 빌어 황후나 태자의 문제에 사사건건 간여하는 문제를 꼬집은 것이다.

예부상서(禮部尙書) 허경종(許敬宗)은 더 나아가 노골적으로 조회와 같은 공개적인 자리에서 자신의 의견을 내보였다.

“시골의 농부는 몇 되의 양식을 거둘 수 있느냐에 따라서 마누라도 몇이 될 수 있느냐가 결정됩니다.
하물며 천하의 주인이신 폐하께서 황후를 어느 분으로 세우는가 하는 문제는 어느 누구도 간여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누가 감히 폐하의 결정에 망령되이 반대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치는 많은 대신들의 찬성에 고무되어 끝내는 영휘(永徽) 6년(655년)에 무소의를 황후로 내세웠다.
이듬해 황제는 다시 정비(鄭妃)의 소생인 태자 이충(李忠)을 폐위시키고, 무황후의 소생인 이홍(李弘)을 새로이 태자로 삼았다.

무소의가 황후로 책봉을 받았을때, 그녀는 나이 설흔 두살이었다.
하지만 끊임없이 몸을 가꾸어서 그런지 대략 예닐곱은 젊어 보였다.
그녀는 항상 신선하고 아름답고 교태스러운 스무살의 처녀와 같았다.
왕황후와 소숙비는 무소의가 황후로 책봉되는 순간에 서인(庶人)으로 폐출하고 냉궁(冷宮)에 유폐시되었다.

이치는 매우 우유부단하고 감정에 약한 황제였다. 일개월도 지나지 않은 어느날, 황제는 왕황후와 소숙비가 보고 싶어졌다.
이치는 태감의 뒤를 따라 궁에서 가장 한적한 구석에 위치한 냉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들이 머물고 있는 냉궁은 조그마한 집 한채가 전부였다. 대문과 창문은 굵은 통나무로 가로질러 굳게 잠갔고,
대문 옆에 식사를 들일 수 있는 조그마한 구멍이 외부와 통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이치는 매우 비통한 심정으로 구멍에다 소리쳤다.

“왕 황후, 소 숙비, 그대들은 어디에 있소?”
왕황후와 소숙비는 황제의 목소리를 듣고 너무나 비통한 나머지 통곡했다. 왕황후가 구멍에 손을 내밀고 한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소첩은 이미 죄를 지어 노비가 되었는데, 어찌 그렇게 황송한 칭호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이치는 더욱 가슴이 찢어질듯 아팠다. 소숙비가 울먹이며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지난날의 정을 잊지 않으셨다면, 우리 두사람에게 햇빛을 다시 볼 수 있도록 하여 주시고, 이 집을 ‘회심원(回心院)’이라 불러 주십시오.”

이치는 주먹을 불끈쥐고 왕황후와 소숙비에게 맹세를 하였다.
“과인이 곧바로 조치를 내리겠으니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왕씨와 소씨는 처음에 원수처럼 미워했으나 처지가 같아지자 마치 친자매처럼 가까워졌다. 두 사람은 황제가 혼쾌히 허락을 하고 맹세까지 하자, 어둠 속에서 광명을 찾을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이튿날 아침, 그녀들은 대문이 부서지는 소리를 들었다. 둘은 서로를 껴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태감이 그녀들에게 황제의 성지를 읽어 내려갔다. 왕씨와 소씨는 그만 놀라 혼절하고 말았다. 두 사람에게 내려진 명령은 곤장 백대였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소숙비가 이를 갈며 소리쳤다.

“이 여우같은 계집애, 너무나도 악랄하구나. 네가 죽어 쥐가 되면 나는 반드시 고양이로 태어나 찢어 죽이고 말겠다.”

무황후는 후에 태감으로부터 그 소리를 전해듣고 궁중에서 고양이를 키우지 못하게 명령을 내렸다.

가녀린 왕씨와 소씨는 일백대의 곤장을 맞자 온 몸의 뼈마디가 부서지고,
피와 살이 한데엉켜 몰골이 흉하게 변하였다. 하지만 벌은 이것으로 끝난게 아니었다.

무황후는 다음날 다시 명령을 내려, 왕씨와 소씨의 팔과 다리를 자르고 몸만 커다란 항아리에 담고,
머리만 밖에 내놓고 숨을 쉬게 하는 가혹한 조치를 내렸다. 체형(彘刑)이라고 부르는 가혹한 형벌이었다.
무황후는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는지 직접 냉궁으로 찾아가 독하게 소리쳤다.

“네년들의 몸뚱아리를 장에 담가 죽이고 말겠다.”
왕씨와 소씨는 열흘도 지나지 않아 처참하게 생을 마쳤다.
무황후는 더나아가 죽은 그녀들의 목을 잘라 소금에 절여 보관하게 하였다.

아름답고 부드러운 무황후는 상대를 학대하면서 느끼는 쾌락을 이미 알고 있었으며,
더욱 잔인한 수법을 가하여 극치의 자극을 만들어 낼 줄도 알았다.

무황후가 왕씨와 소씨를 잔혹하게 죽인 소식은 곧바로 황제의 귀에도 전해졌다.
이치는 매우 불쾌한 심정으로 황후궁에도 들르지 않고 침전에 혼자 머물려 울분을 달랬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지 않아 그는 무황후의 교태가 그리워져 결국은 황후궁으로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황제가 처음 왕황후와 소숙비가 머물고 있는 냉궁에 갔을때, 무황후가 심어놓은 그녀의 정보원은 이를 재빨리 황후에게 통보하였다.
그녀는 황제가 침전으로 들어오자 온순한 표정과 애교를 거두어 들이고 냉랭한 어투로, 왕황후와 조숙비를
사면한다는 조서(詔書)를 철회하라고 윽박질렀다. 자심만만하게 맹세까지 하였던 황제는 무황후에게 굴복하고 말았다.

두 사람의 상대를 제거한 무황후는 이후 더욱 교태스러운 몸짓으로 황제를 보살폈다.
우울해던 황제도 만사를 잊고 그녀의 교태를 탐닉하는데 정신이 팔렸다.

봉건시대에 여자가 황후가 되면 가장 높은 지위에까지 오른 셈이다. 그렇지만 무황후는 거기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과거, 당태종은 자주 깊은 밤에 대신들이 올린 건의서나 정책서를 읽고 국정을 처리했으며, 어린 무미(武媚)는 황제의 곁에서 시중을 들었다.

그녀는 당태종이 피곤하면 어깨를 주므르면서 가끔씩 조정의 대사(大事)를 처리하는 절차나, 상벌은 어떻게 내려야 하며,
관직의 제수는 어떤 근거로 해야 하는지등, 갖가지 정사(政事)를 묻곤 하였다.

당태종은 총명한 그녀가 귀여워 꺼리낌없이 얘기를 하였다.
물론 여기에는 여자들 앞에서 남자의 권위를 자랑하고 싶은 무의식적인 감정이 발동한 탓도 있었다.
궁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않아 무미는 당나라의 법령이나 정치관습에 대하여 하나씩 지식을 습득해 나갔다.

당고종의 소의(昭儀)가 되고난 후에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황제를 모시면서 갖가지 정사(政事)를 대신 처리했다.

당고종은 당태종과 달리 정치에는 그다지 관심도 없었고, 능력마저도 현저하게 떨어졌다.
무소의도 예전의 어린 무미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정사를 처리하는데 있어, 무소의는 황제보다 민첩하였고 고명하였다.
하지만 대신들 앞에서 그녀는 자신의 견해를 결코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모두 당고종의 의사와 행동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무소의가 황후가 되고 나서는, 이미 두사람 사이에는 조정의 업무를 처리하는데, 상당한 정치적 묵계가 이루어졌다.
업무는 대부분 무황후가 처리하고, 발표는 당고종이 하는 그런 관계였다.
이렇게 해서 당나라의 권력은 점차 무황후에게 기울기 시작하였다.

당금 조정에서 무황후를 세우는데 가장 공로가 컸던 사람은 이의부(李義府)와 허경종(許敬宗)이었다.

초기에 그들은 황실 내부의 분위기나 황제의 마음을 읽고, 무소의를 적극적으로 천거하였다.
무소의도 그들과 연락하여, 황제를 통해 그들에게 상을 내리고, 높은 관직을 제수하도록 종용하였다.

얼마 후, 가슴속에 여우를 키우고 있다는 간신 이의부는 관직이 계속 상승하여 중서시랑(中書侍郞)에 올라
조정의 중신(重臣)이 되었고, 허경종은 위위경(衛尉卿)에서 예부상서에까지 올랐다.
조정의 대사를 논의하고 결정하는 여러 회의를 주관하게 된 두 사람은 무소의를 황후로 내세우는데 반대하는 의견을 점차 잠재우고,
결국은 무소의를 황후로 만드는데 커다란 공로를 세웠다.

무황후는 황후가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에게 재상의 직위를 내렸다. 그들은 모두 이것이 황후의 역량과 세력이라고 굳게 믿었다.

처음부터 무황후를 황후로 내세우는데 반대한 사람은 고명대신인 장손무기와 저수량이었다.
이중에서 조정의 세력이 미미했던 저수량은 무황후가 들어서고 얼마 후, 중앙의 관직에서 쫒겨나
지방으로 좌천이 되었고, 후에는 이의부와 허경종의 모함을 받아 외지(外地)에서 죽고 말았다.

장손무기의 말로(末路)도 이와 비슷했다.
혈연적으로 본다면 장손무기는 당태종의 정부인인 장손황후의 오라버니이고, 당고종의 외삼촌이었다.
공로면에서 본다면, 그는 당태종이 일으킨 태자인 형과 아우를 죽이고 아버지를 황제의 자리에서 내쫒은 현무문
사건의 주요 계획자였다. 더욱이 당고종을 황제로 만드는데 가장 공로가 큰 원훈대신이라고 볼 수 있었다.

더욱이 그는 당태종이 늙어 정사를 제대로 볼 수 없었을때에 대부분의 권력을 잡고 있어서, 조정내에 많은 측근세력이 있었다.

무황후는 장손무기가 건재하고 있는한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따라서 무황후는 허경종을 통해 언제든지 장손무기의 죄를 만들어 모함할 준비를 마쳤다.

허경종은 본래 당태종 이세민이 천하를 도모하고자
진왕부(秦王府)로 불러들인 ‘18학사’의 일원으로 재주가 뛰어나고 정치적인 감각을 미리부터 확득한 사람이었다.

현경(顯慶) 4년(659년), 허경종은 장손무기에게 모반죄를 되집어 씌우는 대담한 계획을 꾸며 무황후에게 보고하였다.

무황후는 이번 기회에 장손무기를 제거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얼마후 장손무기는 영문도 모른채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고는 끝내 모반을 꾸몄다고 거짓을 진술하였다.

장손무기는 원훈대신임을 감안하여 처형은 면하고 모든 관직을 박탈당한채 저택에 감금되었다가,
얼마 후 핍박을 받아 자살하였다. 무황후는 드디어 저수량과 장손무기를 제거하여,
당고종의 주위에 포진되어 있는 주요한 상대를 제거하는 원대한 계획을 성공시켰다.

당고종은 현경 5년(660년) 이후에 척추신경의 마비와 두통으로 거의 자리에 누워 조정의 사무를 처리하지 못하고,
무황후가 대신 관장하였다.

무황후는 이미 풍부한 정치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심복대신의 도움을 받아 조정의 사무를 원할하게 처리하였고,
일부는 그들에게 분담시켰다. 설사 당고종의 병이 쾌차하여 정사를 본다해도, 업무를 분산시켜 황제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또한 대부분의 업무는 황후의 도움을 받아야 처리하게끔 만들었다.

당고종은 여러차례 병이 들었다 나았다를 반복하였다.
당연히 업무의 연속성이 끊겨져 황제는 원할하게 처리할 수도 없었고 정사(政事)를 장악할 수도 없었다.

이제 대부분의 사무는 당고종의 명의를 빌어 무황후가 결정하고 처리했다.
당고종은 가끔씩 의견을 내었지만 번번히 무황후에게 거절을 당하고도 어쩌지를 못하였다.

이때 비로소 당고종은 마누라가 매우 강인하고 결단력 있는 여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렇게 몇 년이 흘러가자 당고종은 허수아비가 되어갔다.
그는 점차 무력한 자신을 발견하고, 마누라의 손에서 권력을 찾아오는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비록 유약한 황제였지만, 황제의 권리중에서 황후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당고종은 왕년에 무소의가 왕황후를 모함시킨 사례를 그대로 본받아, 무황후를 내쫒을 준비를 하였다.

인덕(麟德) 원년(664년) 말, 당고종은 서대시랑(西臺侍郞) 상관의(上官儀)를 불러들여 그에게 대책을 구하였다.

“황후가 조정의 정사에 간여하여, 조상의 유훈(遺訓)을 거역한지 이미 오래 되었소.
근자에 환관 왕복승(王伏勝)이 고발하기를, 왕황후가 사사로이 도사(道士) 곽행진(郭行眞)을 궁으로 끌어들여
굿을 벌이고 축주(祝呪)를 하였다고 하는데, 어떻제 조치하면 좋겠소?”

당시의 당율(唐律)에 따르면 도사는 궁에 들어올 수가 없으며, 만일 황후가 굿을 벌이거나 축주(祝呪)를 하다 발각되면
폐출의 죄에 해당되었다. 궁중의 법률에 정통한 상관의는 황제의 심사를 헤아리고, 죽음을 각오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황후께서 만일 축주를 행하였고, 조정의 정사에 간여했다면 당연히 조서를 내려 황후를 폐출을 할 수가 있습니다.”

당고종은 그자리에 상관의에게 황후의 폐출을 명한 조서를 기초하게 지시했다.

무황후는 매우 빠른 정보망을 갖고 있었다.
조서의 기초가 끝나고 아직 먹물이 마르기도 전에 무황후는 궁으로 달려가 탁자에 놓여있는 조서를 읽으면서 소리쳤다.

“폐하께서 저를 죽이시려면 지금이 가장 좋은 기회입니다.
이 자리에서 죽는다고 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무엇때문에 이처럼 비겁하게 저를 모함하여 죽이려고 하십니까?”

무황후는 아직 옥새(玉璽)가 찍히지 않은 조서를 갈기갈기 찢어 바닥에 버리면서 통곡했다.

“폐하의 보살핌을 받아 십여년 동안 한마음으로 모셨건만,
폐하께서는 그 뜻을 저버리시니, 이곳에서 저를 죽일때까지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겠습니다.”

무황후는 이치의 다리를 부여잡으며 더욱 세차게 울부짖었다.
당고종은 허약한 성격을 고치지 못하고 무황후가 궁으로 뛰어 들어오자 시위들에게 막으라고 소리도 못치고 제자리에
멍하니 서있고 말았다. 더욱이 그녀가 울고불며 다리에 매달리자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판단을 세우지 못했다.

이때 무황후는 나이가 마흔이었지만 갓 설흔을 넘긴 여자처럼 몸매가 수려하고 피부가 고왔다.
백설처럼 고운 그녀의 피부가 눈에 들어오자 당고종은 춘심(春心)이 발동하여 그녀를 가슴에 안았다.

당고종의 머리속에는 선황제 당태종이 병으로 누웠을때, 측간에서 처음으로 그녀와 포옹하던 그때의 광경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는 마음이 약해져 황후에게 잘못했다고 사과를 하고 없었던 일로 생각하라고 타일렀다.
하지만 무황후는 여전히 울먹이며 당고종을 원망하였다. 당장에 곤란을 피하고 싶었던 당고종의 눈에 상관의가 보였다.

“황후, 사실 나는 그런 생각이 없었는데, 상관의가 나에게 그렇게 하라고 알려 주어서......”

당고종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무황후가 그의 품에서 벗어나 상관의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이런 못된 간적(奸賊), 폐하가 불명(不明)하면 흐트러짐이 없도록 보필해야 하는 몸으로서,
오히려 거짓을 꾸미고 황후를 모함하다니......그 죄가 죽어 마땅하도다.”

무황후는 상관의를 심하게 질책하고, 곧이어 황제에게도 입을 열었다.

“폐하, 소첩이 이를 알고도 묵인한다면, 위로는 조종(祖宗)의 혼령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고, 아래로는 백성의 질책이
황제의 체통을 손상시킬까 두렵습니다. 소첩은 이한 몸, 폐하를 위해 죽는 그날까지 황실을 지키는데 다하겠습니다.”

그녀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당고종의 두 손을 자신의 가슴에 모았다.
당고종은 갑자기 이렇게 충성스러운 황후를 폐출하려고 했던 자신의 행동이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고개를 떨구었다.

무황후는 당고종이 완전히 자신의 술수에 말려 들었다고 판단하자, 침전으로 황제를 끌고 갔다.
두사람의 사랑이 끝나고, 극도의 쾌락에 젖은 당고종은 천하를 그녀에게 넘겨 주어도 하나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다.

무황후는 사태를 수습하자 곧바로 보복에 들어갔다. 무고를 올린 왕복생은 사형을 받아 처형되었고,
무고한 상관의는 조서를 기초하였다는 죄명으로 온 가족이 몰살을 당하였다. 일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왕복생은 본래 태자였던 이충(李忠)의 동궁(東宮)에 속한 환관이었다. 또한 공교롭게도 상관의마저 동궁에 속하였다.
지난날의 태자였던 이충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죽음이 내려졌다. 상관의나 왕복생의 측근, 또는
가깝게 지낸 조정의 대신들은 대부분이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무왕후는 이때부터 더욱 확고하게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고종도 무황후를 제거할 생각을 감히 꾸미지 못하고 그녀에게 수렴청정(垂簾聽政)을 지시하였다.
그녀는 역사상 처음으로 황후의 신분으로 황제가 살아 있는데 수렴청정을 하게 되는 최초의 여자가 되는 기록을 남겼다.

당고종은 마누라를 무서워 했고, 정사를 처리하는 능력에서도 뒤졌으며, 판단과 감각에서도 미치지 못하여,
조회에 나가면 항상 용상에 앉아 입도 벌리지 않았다. 결정과 지시는 뒤에 앉아있는 무황후가 처리했다.

어느덧 관원의 승진과 좌천은 물론이고 생사여탈권까지 그녀가 장악하였다.
조회에 나서는 대신들은 황후의 위엄에 눌려, 그녀를 황제와 더불어 ‘이성(二聖)’이라고 호칭했다.

당고종은 아주 바보황제가 아니었다.
철수무정이라는 이름의 가남풍을 부인으로 두었던 진혜제(晉惠帝)처럼 백치는 결코 아니었다.
그는 무황후의 위세에 눌려 점차 꼭두각시가 되어가자, 그녀에게 반발심이 다시 생겨났다.

당고종은 지난번에 실패하였던 폐출을 다시 생각하였다. 하지만 섣불리 폐출을 실행하지 않고 기회를 노리기 시작하였다.

당고종의 걱정은 자신의 사후에 벌어질 권력다툼이었다.
무황후의 성격과 욕심에 비춘다면 틀림없이 당나라는 무씨(武氏)의 강산으로 변할게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당고종은 명부(冥府)에 나아가 무슨 명목으로 조상과 선황제 당태종의 얼굴을 볼 수가 있단 말인가?

그는 허수아비 황제의 국면을 뒤집을 기회를 기다렸다. 그는 권력의 일부를 태자 이홍에게 이양하는 문제를 떠올렸다.
무황후도 자신의 친아들인 이홍에게 권력이 넘겨진다면 반대는 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된다면 무황후가 권력을 장악해도 이씨의 당나라는 유지될 것이라는 소박한 그의 판단이었다.

건봉(乾封) 2년(667년) 가을, 당고종은 질병을 핑계로 삼아 태자를 감국(監國)으로 임명했다.
나라의 정사를 감시하는 감국(監國)의 지위는 사실 이름 뿐이었고, 진실한 의도는 태자의 지위를 강화하려는 조치였다.

당고종 이치와 무황후의 치열한 권력투쟁의 서막이 올랐다.
이때 무황후의 선택은 과감하고 무서운 결단이었다. 혈육을 희생시켜 권력을 유지하는 방법이었다.

함형(咸亨) 4년(673년), 당고종은 학질(虐疾)에 걸리자 이를 핑계삼아, 곧바로 대신들에게 조서를 내려,
주청이 있으면 모두 태자에게 올리도록 하였다. 태자는 이때부터 연복전(延福殿)에 나아가 조정의 사무를
상당부분 감당하기 시작하였다. 무황후는 태자가 아직 조정의 정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주요한 권력을 장악하고 중신(重臣)들을 자신의 수중에 포섭시켰다.

하지만 당고종은 점차로 무황후의 세력과 권력을 봉쇄하였다.
또한 총명한 태자 이홍도 날이갈수록 업무를 장악하고 사람들의 복종을 이끌어냈다.
어느덧 권력게임의 무대에서 무황후는 유약한 당고종에게 패할 기세였다.

상원(上元) 2년(675년), 총명한 부인의 압박과 모멸감 속에서 점차 명석하고 판단력이 예리하게 변해간 당고종 이치는,
권력각축의 승리를 결정짓는 중대한 승부수를 던졌다.

이 해 봄, 그는 문무백관을 소집하고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였다.
“과인은 몸이 불편하고 판단이 흐려서 황후에게 섭정을 하도록 하려는데, 경들의 의견은 어떻소?”

이치의 의도는 조정의 대신들과 수많은 재야(在野) 문사(文士)들의 공개적인 토론을 이끌어 내려는데 있었다.
황제가 멀쩡하게 살아있는데 황후의 섭정이라는 문제가 돌출되자, 유교적 명분과 전통적인 관념을 충실히
따르는 수많은 대신들이 들고 일어나 격렬하게 반대했다.

당고종 이치의 의도는 맞아 떨어졌다. 그는 많은 대신들의 공개적인 반대를 이끌어어 낸 다음에,
틈이 나면 자신은 태상황으로 물러나고 황제의 자리를 태자에게 물려주려는 계획을 수립했다.

당고종의 승부수는 시기가 정확했다. 예상대로 신하들이 황후의 섭정을 반대했다.
당고종은 연복전에서 조정의 업무경험을 쌓았고, 나이도 이미 성인이 넘은 태자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면
누구도 반대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이 해 4월,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사태가 발생했다. 건강하고 활달했던 태자가 갑자기 궁중에서 쓰러져 원인도 모른채 생을 마감했다.

무황후는 당고종의 복안을 미리 판단하고, 자신의 친아들인 태자 이홍을 살해한 것이다.
무황후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받은 당고종은, 태자가 죽은 다음날 그에게 ‘효경황제(孝敬皇帝)’라는 시호를 내렸다.

태자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도 못하고 죽은 다음에, 살아있는 황제에게 존호(尊號)를 받은 예는 이제껏 한번도 없었다.
이는 당고종의 비통한 심정을 어느정도 헤아려 볼 수 있는 참고자료이다.

당고종 이치는 곧바로 이현(李賢)을 태자로 삼았다.
이현도 형인 이홍과 마찬가지로 무황후의 소생으로 학문에 밝고 재주가 뛰어나면 널리 품덕이 알려져 있었다.
그는 동궁에 머물면서 당고종의 보살핌 속에서 충실하게 황제의 수업을 받았다.

무황후는 자신의 야망에 방해가 되는 이현도 처치할 기회를 노렸다.
이현이 태자가 된지 다섯해가 지난 어느날 무황후는 그를 모반죄로 몰아 체포하였다.
당고종은 끝까지 태자의 모반죄를 부정하였지만 무황후의 핍박에 못이겨 태자를 폐위시킨다는 조서를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태자 이현은 폐출이 되고 얼마후 어머니 무황후의 강압에 의해 자살하고 말았다.

당고종 이치는 두 아들이 죽자 드디어 패배를 시인하였다. 그는 울화병으로 쓰러지자 더이상 살고 싶은 욕심이 없었다.
이듬해 홍도(弘道) 원년(683년)에 당고종이 생을 마감하였다.

이 해부터 무황후는 태후(太后)의 신분으로 각기 1년밖에 황제노릇을 하지 못한 당중종(唐中宗;683-684, 705-710) 이현(李顯)과
당예종(唐睿宗;684-690, 710-712) 이단(李旦)을 대신하여 섭정을 시작하였고, 684년에는 년호를 광택(光宅)으로 바꾸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바야흐로 중국의 역사상 처음으로 여황제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이어서 690년에는 국호를 당(唐)에서 주(周)로 바꾸고 년호는 천수(天授)라 하였다.
그녀는 무려 여든 두살이 되는 705년 그날까지 20년간 천하를 통치하였다.

황제가 되고 국호까지 바꾼 그녀의 결단력 있는 승부는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여자가 황제가 되는 기록을 남겼다.
숱한 황태후들이 수렴청정을 하거나 권력을 휘둘렀어도 측천무후처럼 황제가 되려는 꿈을 갖지 못했으며
설사 꿈을 지녔다해도 끝내 황제가 된 여자는 이전에도 없었고 그후에도 없었다.

705년에 병이 들자 대신 장간지(張柬之;625-706)가 정변을 일으켜 예종을 복위시키자 황위에서 물러난 그녀는
임종을 맞았을때 주(周)나라를 개창한 여황제의 신분보다는 이씨(李氏)의 황후라는 신분으로 매장을 해달라고 유언을 내렸는데,
반대파가 거의 없는 조정에서는 그녀의 뜻에 따라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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