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류제협위원이 말하는"논산"의 지명 유래
  • 뉴스관리자
  • 등록 2009-07-07 06:42:06

기사수정
 
전국의 모든 땅이름들이 그 이름을 갖게 된 유래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대부분의 땅이름들이 많은 변화를 겪으며 오늘날까지 전해져 왔다.

특히 우리나라는 오랜 동안 거의 모든 기록을 한글이 아닌 한문으로 하다 보니 순수 우리말 땅이름들이 뜻을 따라 발음이 전혀 다른 한자로 기록되기도 하고, 또는 비슷한 음을 가진 한자로 표기 되면서 본래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엉뚱한 뜻을 가진 이름으로 왜곡되기도 했다.

현재 “논산시” 라는 기초자치단체의 명칭인 ‘논산’은 어디서 어떻게 유래된 것 인가? 1914년 연산, 노성, 은진군을 통합하여 논산군으로 다시 태어난지도 거의 100년이 되어간다. 이에 논산의 지명 유래, 그 뿌리를 찾아본다.

1. 논산(論山)의 지명유래에 대한 여러 주장들

노산(魯山)과 논산(論山)
지난2005년 11월 TV에서 고전(古典) 강의로 유명한 도올 김용옥씨가 논산시의 건양대학교에 와서 “우리 민족의 미래와 청년의 꿈” 이라는 주제로 대중 강의를 한 적이 있다.

강의에 앞서 우리 “논산(論山)”의 지명 유래에 대하여 언급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김용옥씨는 논산이라는 지명이 노성(魯城)의 옛 이름인 노산(魯山)에서 유래 한 것 같다는 의견을 제시 하였다. 즉 노산에 “ㄴ” 받침이 더해져 논산으로 변한 것 같다는 것이다.

황산(黃山)이 논산(論山)으로
20 여 년 전인 1989년 논산의 문인 단체인 놀뫼문학회에서 『지심 매고 남을 이랑 없으련마는』이라는 동인지를 발간하면서 당시 충남대학교 도수희(都守熙) 교수에게 논산의 지명 유래에 대한 글을 부탁 했고, 도 교수는 “놀뫼(論山)의 유래와 그 어원” 이라는 글을 기고하여 연산지역의 옛 이름은 황등야산군(黃等也山郡)이었는데 이것이 황산(黃山)이 되고 연산(連山)이 되었으며

‘황등야산(黃等也山)’의 어형분석(語形分析), 형태소(形態素)의 분석(分析)을 통하여 결론 적으로 “...(전략) 연산면(連山面)의 진산(鎭山)이며 높이는 352m이고 산형(山形)이 가옥의 용마루처럼 생긴 36여 개의 작은 산봉우리들이 6km가량이나 길게 남쪽에서 북쪽으로 뻗어났으므로 ‘느러리재(누르기재, 느르뫼)’라 고유명으로 속칭(俗稱)되었고, 한자어(漢字語)로는 황산(黃山), 연산(連山)으로 호칭되었다. 여기서 12km밖에까지 고유지명(固有地名)이 이전하여 ‘놀뫼’로 발달(發達)하였고 이 ‘놀뫼’를 한자(漢字)로 기록화(記錄化)한 것이 논산(論山)이라 믿어진다.” 고 했다

놀메가 논산
그리고 40 여 년 전인 1967년에 창간된 논산중학교의 교지는 제호를 “놀메”라 하고 전병호 교장선생이 창간사에서 논산의 지명유래에 대하여 언급했는데 “...(전략) 「놀메」는 우리고장 논산의 옛 말이다. 「놀」은 「노랗다」의 뜻에서 온 듯하며 신라 경덕왕 16년에 황산(黃山)이란 이름을 붙이게 되었고 고려 때 연산으로 고쳐 불렀으며, 1914년 다시 논산이라는 이름이 생기게 된 것이다. 따라서 논산군은 애당초 황산군(縣)이 연산군(縣)으로 연산군(縣)이 논산군으로 개칭 되었던 것이며 이로써 「놀메」는 순수한 우리말의 옛 이름 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후략)...” 라고 하였다.

말(論)이 많아서 논산(論山)이라고...
이런 저런 설(設)들이 하도 많다 보니 심지어는 말(論)이, 즉 논쟁(論爭)이 산(山)처럼 많아서 論山(논산)이라고 했다고 농담 식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을 지경이다.

왜식 명칭 론
한편 1996년 논산군(郡)이 논산시(市)로 승격 할 때 논산(論山)이라는 명칭은 일제 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을 하면서 일본사람들이 왜식 명칭으로 붙인 것이니 차제에 황산(黃山)시 등 다른 이름으로 변경하자는 의견이 일부에서 제기 되기도 했었다.

이상이 그동안 거론돼온 ‘논산’이란 지명 유래에 대한 주장들이다.


2. 논산의 옛 이름 논뫼(畓山)의 어원

1960년대 까지도 논산의 농촌지역 노인 분들은 논산을 “논미” 라고 하는 분들이 많이 있었다. 논산장(論山場)에 가는 것을 “논미장 간다” 라고 했으며, 논산과 강경을 한꺼번에 일러 “논미 갱갱이” 라는 표현을 일상생활에서 자연스럽게 사용했었다.

여기서 논미 라는 말은 원래 “논뫼”였는데 발음이 까다로우니 말하기 쉽게 논미 라고 발음 한 것이다. 그렇다면 논뫼는 어디서 온 것 일까? 조선시대 편찬된 지리지를 조사 해 보니 논뫼가 처음 기록에 나오는 것은 지금부터 350여 년 전인 조선 효종 7년(1656)에 유형원(柳馨遠)이 편찬한 지리지인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로 파악 된다.

이 지리지의 관량(關梁) 항목에 “시진교 재 시진포 만력중 교비 이치 상류 7리 칭 답산교 장 40보(市津橋: 在 市津浦 萬曆中 橋圮 移置 上流 七里 称 畓山橋 長 四十步)” 라고 시진교(市津橋)를 설명하는 대목이 있다. 이는 요즘 말로 ‘시진교: 시진포에 있었는데 만력 연간에 다리가 무너져 상류 7리 지점으로 옮겼고 사람들이 논뫼다리 라 부른다. 길이는 40걸음 정도 된다.’ 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시진교 라는 다리는 지금부터 400 여 년 전인 서기1600년 전후에 현 논산읍 등화동 근처에 있었는데 홍수에 다리가 무너졌다. 이 때 여기서부터 상류 쪽으로 7리(약 3Km) 올라간 현재 논산 시내 화지동과 대교동의 경계인 구강으로 옮겨 다시 다리를 놓았다.

그 곳이 바로 옛 삼보예식장 앞의 구강다리 자리(현재는 다리 양편의 구강(舊江)이 복개되어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봄이면 묘목 시장이 서는 곳)로 이전하여 다리를 새로 놓고 이때부터 논뫼다리(畓山橋)로 불려지기 시작 하였다. 여기서 답산(畓山) 이라는 표현은 순수 우리말인 농사 짖는 논(畓)으로 둘러싸인 뫼(山)를 말하는 “논뫼”이다. 그런데 한글 기록이 보편화 되지 못하고 거의 모든 문서를 한문(漢文)으로 작성하던 당시에 한자(漢字)로 기록 하기위하여 그 뜻을 따라 논 답(畓)자와 뫼 산(山)자를 써서 “답산(畓山)”으로 표기 한 것이다. 오늘날에도 논산 시내는 동서남북이 논(畓)으로 둘러싸여 있다.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지명은 대개 부르는 말이 먼저 생기고 후에 문자로 기록 하므로 “논뫼”라는 지명은 적어도 400 여 년 전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위의 답산이 나왔던 동국여지지보다 더 이른 시기인 1454년에 발간된 세종실록지리지와 1530년에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논산(論山)에 관한 언급이 없다.

즉 이 때 까지는 구 논산읍 지역에는 사람도 많이 살지 않았고 지리지에 기록할 만 한 유명 지형지물이나 특이한 사항이 없었던 것이다. 이때 까지는 위의 동국여지지에서 언급한 시진교(市津橋)도 시진포에 건재했기 때문에 “시진교: 시진포에 있다.” 라고 간단히 기록했다. 당시에 논뫼다리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기 이전에는 “논뫼”라는 지명의 존재 여부도 알 수 없다. 이후 위 답산(畓山)이 나왔던 동국여지지보다 약 100년 뒤인 영조33년(1757)~영조41년(1765)간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처음으로 論山(논산)이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은진현 화지산면(花之山面)에 내동, 관촉, 취암, 화지리와 함께 論山里(논산리)로 등장하며 민가 80호(戶)에 인구는 남자 116명, 여자 208명이고 은진 관아로부터 거리는 10리라고 소개돼 있다.

이후 영조~헌종(1724~1849)년간에 편찬된 충청도읍지가 있다. 필사본 51책이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충청도지(忠淸道誌)이다. 그런데 충청도 54개 읍 중 하필이면 단양, 대흥, 평택, 은진의 4개 읍지가 누락돼 있으니 은진에 속한 논산의 직접 기록을 확인 할 수 없어 안타깝다. 그러나 다행이도 바로 이웃인 이산현(尼山縣)-현재의 노성지역-의 읍지 도로(道路) 항목에 “남쪽으로 논산교(論山橋)까지 가는데 20리로 은진(恩津)과 경계를 접 한다” 는 기록이 있어 간접으로 이 시대에도 다리와 지명으로 논산(論山)이 쓰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철종4년(1853)~철종7년(1856)에 최성환(崔惺煥)과 김정호(金正浩)가 편찬한 여도비지(輿圖備誌)에는 좀더 발전하여 산천 항목에 시진포(市津浦): 달리 논산포(論山浦)라고도 한다.

관아 북쪽 10리에 있다. 장삿배가 모여들어 시장이 이루어진다. 라는 기록이 있으며 또 시장 항목에도 논산장(論山場): 3일과 8일에 열린다. 라고 은진현의 다른 3개 시장과 함께 소개 된다. 그리고 교량(橋梁) 항목에서도 논산교(論山橋): 논산포에 있다. 노성과 연결된다. 라고 소개 되어 한층 번창해 가는 논산의 모습을 말해 주고 있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철종14년(1863)경 김정호(金正浩)가 편찬 하였는데 논산장(論山場), 논산포교(論山浦橋)가 나온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산수(山水) 항목에 시진포(市津浦)를 소개 하면서 오늘날의 논산천의 발원지부터 흘러오는 경유지를 열거 하는데 위의 논산교(論山橋)를 황산교(黃山橋)라고 표기 하고 황산교를 거쳐 강경 북쪽을 돌아 백강(百江)-금강-으로 들어간다. 고 하여 지리지에서는 처음으로 論山(논산)을 黃山(황산)으로 표기 한다.

호서읍지(湖西邑誌): 은진현 화지산면의 다른 4개리와 함께 논산리(論山里)로 소개 된다. 특히 산천(山川) 항목에 독립적으로 산(山)의 이름으로 論山(논산)이 소개 된다. 이제까지는 다리의 이름이나 포구의 이름 등의 앞에 붙어서 그 다리와 포구가 있는 위치를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 되다가 처음으로 산(山)의 명칭으로 論山(논산): 관아의 북쪽 12리에 있다. 라고 소개 되는 점이 특이하다. 이상으로 지리지를 살펴보았다.

3. 조선시대 옛 지도의 논산(論山)

다음으로 옛 지도를 살펴보면 초창기의 동국지도, 동국여지승람 첨부지도 등에는 은진, 연산, 이산(노성)현(縣)의 명칭과 천호산 등 대표적인 큰 산 몇 곳 정도가 표시됐을 뿐 다른 지형지물들은 표시가 없다. 이후 18세기 영조(1724~1776재위)연간에 발간된 해동지도에 은진현 화지산면 지역에 論山橋(논산교))가 표시돼있으며 비변사인방안지도, 광여도, 청구도, 여지도에도 역시 論山橋(논산교)로 표시돼있다. 다만 옛 지도 중 비교적 오늘날과 가까운 철종12년(1861)에 고산자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에는 위의 지도들에서 論山橋(논산교)라고 표기했던 다리가 黃山橋(황산교)로 표기되어있다.

놀뫼의 등장

1960년대 중반 정도부터 논산에서 활동하는 문인들을 중심으로 문학작품 등에 논산을 “놀뫼” 또는 “놀메”로 표현하기 시작하여 1980년대에 놀뫼가 논산의 옛 이름, 또는 논산의 원래 이름으로 거의 보편적으로 사용된 적이 있었다.

이런 추세는 1990년대 초반 까지도 이어졌는데 이 때 문인들과 대학교수 등 학자들에 의하여 주장된 이론은 “백제시대 논산지역이 황등야산군(黃登也山郡)과 덕근군(德近郡)이었고 신라시대 황등야산군은 황산(黃山)군이 됐으며 이것이 누를 황(黃)+뫼 산(山) 즉 놀뫼였고, 이후 놀뫼가 변화를 거쳐 논산이 되었다”는 것이다.

현재도 문인들을 중심으로 놀뫼 라는 단어는 논산을 이르는 우리말 이름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으며 기관, 단체의 명칭에, 그리고 일반 시민들도 상점의 간판 등에 많이 쓰고 있다. 조선 시대 지리지의 기록에서 논산읍 지역을 나타내는 말로는 처음 논뫼(畓山)가 사용되고 중간에 논산(論山)으로 변경 사용 되다가 놀뫼(黃山)는 비교적 오늘날과 가까운 철종14년(1863)에 김정호가 지은 대동지지에 처음 등장한다. 옛 지도에서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은진현 화지산면 지역에 이전의 다른 옛 지도에 논산교(論山橋)로 표기 했던 다리 명칭을 황산교(黃山橋)로 표기 한 것이 눈에 띤다.

이는 아마도 사람들이 논뫼 라는 발음을 정확하게 하기가 어려워 일상의 대화에서는 놀뫼, 놀미, 놀메 등으로 말하고 그 것을 한자로 옮길 때 “놀”을 “노랗다”라는 의미로 받아들여 황산(黃山)으로 적었을 것으로 추정 된다.

그러나 여기서 보이는 황산(黃山) 즉 놀뫼는 황등야산군, 황산현, 연산현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며 논뫼(畓山)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동안 학자들이 주장 했던 대로 황등야산군의 황산이 변하여 놀뫼가 되고 이것이 변하여 논산이 됐다면 현재의 연산면이 그렇게 변했어야 그 이론이 성립한다. 그런데 연산현은 멀쩡하게 그냥 있는데 연산에서 30여리나 떨어져 있으며 행정구역을 달리 하는 은진현 화지산면의 일개 리(里)의 명칭으로 전이가 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무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4. 논산에 대한 새로운 주장

1990년대 초․중반부터 향토사학자 양인식(당시 논산문화원사무국장), 이철성(건양대 교수), 류제협(당시 시의원)등 지역사, 향토사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위 놀뫼에 대한 이론(異論)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즉 논산이라는 현재의 행정구역명칭은 황등야산이나 황산, 연산과는 관계없으며 구 논산읍지역인 부창동의 현재 대림아파트가 들어섰고 그 이전에 대건고등학교가 있었던 작은 산의 명칭이 ‘논뫼(畓山)’였으며, 후에 논뫼의 음(音)을 따라 한자로 적으면서 논산(論山)이 되었고, 여기에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자 논산리(論山里)가 되었다. 이후 인구가 증가하고

시가지가 형성되어 그 범위가 확대 되자 논산면(論山面)이 되었다. 그리고 1914년 연산, 노성, 은진 3개군을 통합하고 당시 군청이 논산면에 서게 되었다.

이 때 기존 3개 군에서 서로 자기들의 지명을 통합된 군의 명칭으로 사용 할 것을 주장 하자 제 3의 명칭이며 군청소재지가 된 논산면의 명칭을 따서 ‘논산군(論山郡)’으로 하여 논산(論山)이 현재처럼 논산시 전역을 이르는 명칭으로 발전 했다는 이론이다.

-은진현의 옛 지도에 현 대림 아파트 뒷산이 論山(논산)으로 표시되어있다.-
이에 따라 논산 시민 헌장에도 처음 시안(試案)에서는 논산 전체를 이르는 말로 “놀뫼” 라는 표현을 썼던 것을 시민헌장 제정위원회에서 논의를 거쳐 “논산”으로 고쳤으며. 논산 문화원에서 발간하는 모든 서책의 제목들도 “놀뫼의 문화”(1981), “놀뫼의 민속”(1987), “놀뫼의 전설”(1988), 등에서 “논산지역의 독립운동사”(1991), “논산지역의 지명유래”(1994), “논산지역의 민속놀이”(1996) 등과 같이 놀뫼에서 논산으로 표기의 변화를 보이고 있다. 요즘에는 논산의 옛 이름은 놀뫼(黃山)라는 이론은 점점 쇠퇴하고 있는 실정이며 논산(論山)의 뿌리는 논뫼(畓山)이며 이 논뫼가 발음하기 좋게 변한 것이 놀뫼 라는 이론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5. 왜 論山(논산) 인가?

그렇다면 왜 하필 의논 논(論)자를 써서 論山(논산)이라고 했을까? 한학에 아주 밝은 학자가 아닌 일반인들은 선뜻 다른 논(론)자(字)를 떠올리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상용 1,300자나 3,000자는 물론이고 7,000자 정도가 나오는 활용옥편에도 논(론)자는 의논 논(論)자 하나 밖에 나오지 않는다.

적어도 몇 만자 이상 나오는 대형 옥편을 찾아야 생각할 惀(론). 돌 떨어질 碖(론). 논 나물 菕(론)과 같은 생소한 한자가 나오는데 이런 글자들은 옛날 고서에 특별히 쓰였을 뿐 현대에는 거의 활용되지 않고 있는 희귀한 글자들이다. 따라서 처음 논뫼를 음을 따라 논산(論山)으로 옮겨 적은 사람도 일반인들이 익히 잘 알고 있고 두루 쓰이는 의논 논(論)자를 써서 논산(論山)으로 썼던 것 일 뿐 이 논(論)자에 특별한 의미는 없다.

6. 논산(論山)의 뿌리는 논뫼(畓山)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동안 논산의 지명 유래에 대한 연구들은 주로 문인들을 중심으로 문과 계통의 학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지다보니 언어학이나 음운학의 관점에서 연구되었다. 이에 비하여 이번의 연구는 향토사적인 관점에서 멀리 조선시대 지리지들의 기록을 더듬어 논산의 지명 유래를 밝힌 것이다.

결론적으로 논산의 지명 유래는 농사짓는 논 가운데 있는 작은 산을 이르는 “논뫼”에서 온 것이다. 오늘 날에도 논산은 평야지대이고 논이 많다. 그리고 논산이란 지명 유래가 된 “논산(論山)은 논 가운데에 있던 작은 동산이다.

이 동산 기슭에 사람들이 모여 살자 처음 작은 동네인 논산리(論山里)가 되었다. 여기에 시장이 서고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자 논산면(面)이 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연산, 은진, 노성군을 합해 새로운 군을 만들면서 그 이름을 ”논산군“ 이라 하여 현재의 논산시(論山市)전역을 이르는 이름으로 확대 된 것이다.

류제협(논산문화원 향토사 연구위원)

류제협위원은 논산대건고등학교 출신으로 논산시의회 제2-3대 시의회의원을 거쳐 논산문화원 사무국장을 역임하고 현재 논산시 향토사연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논산문화발전을 위한 향토사 연구 발굴과 이에 대한 저술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논산시의 독보적인 향토 사학자이다,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최신뉴스더보기
많이 본 뉴스더보기
  1. 와우 ! 대박예감... 신개념 에이스롤러장, .카페 '오슈 신장 개업 논산에  최신 시설을  구비한  대형 실내  롤러스케이트장이  문을 열었다.  롤러 스케이트  방방  키즈까페 등을    주유한 뒤  잠시 몸을  내려 쉬며 커피를  비롯한  다양한 취향의  차향 [茶香]을  함께  탐닉할  " 까페 오슈"도  함께다.  논산시 내동 아주아파...
  2. "이변은 없었다"논산농협 조합장 선거 기호 4번 윤판수 후보 당선 5월 3일  치러진 논산농협 조합장 보궐선거에서  기호 4번 윤판수 후보가  총 투표수  2.775 표중  1338표를 얻어  압승의  영광을 안았다.  조합장으로서의 경영 능력을  인정받아  이번선거에서  이변을 노렸던 기호 3번  신석순 후보는  681표를  얻어  차점 낙선의  불운을  ...
  3. 2024 화지전통시장 옛살비 야시장 개막 , , 공직사회 총출동 ,,,, 논산시가  전통시장  활성화를  위한  방편의 하나로  화지시장  상인회에  예산을 지원해  시행하는  2024년  엣살비  야시장  개막식이  5월  3일  오후 5시  화지시장  제2주차장    광장에서  열렸다. 백성현  논산시장 서원 논산  시의회  의장  최진...
  4. 창경궁 춘당지에 나타난 청룡 창경궁 춘당지에 나타난 청룡 (서울=연합뉴스) 김인철 기자 = 3일 서울 종로구 창경궁 대춘당지에서 시민들이 궁중문화축전 미디어아트 체험형 야간 관람 프로그램인 '창경궁 물빛연화'를 관람하고 있다. 2024.5.3 yatoya@yna.co.kr(끝)
  5. 제주 하늘에 뜬 햇무리 제주 하늘에 뜬 햇무리 (제주=연합뉴스) 박지호 기자 = 4일 제주시 하늘에 햇무리가 관측돼 길을 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햇무리는 햇빛이 대기 중 수증기에 굴절돼 태양 주변으로 둥근 원 모양 무지개처럼 나타나는 현상이다. 2024.5.4 jihopark@yna.co.kr(끝)
  6. 동해해경, 어린이날 기념 함정공개 행사 동해해경, 어린이날 기념 함정공개 행사 (동해=연합뉴스) 4일 동해해양경찰서가 제102회 어린이날을 기념해 동해해경 전용부두에서 실시한 대형 함정 공개 행사에 참여한 어린이들이 각종 체험을 하며 즐거운 추억을 만들고 있다. 2024.5.4 [동해해경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yoo21@yna.co.kr(끝)
  7. 초여름 기온 보인 주말, 시원한 분수에서 삼매경 초여름 기온 보인 주말, 시원한 분수에서 삼매경 (서울=연합뉴스) 황광모 기자 = 어린이날을 하루 앞둔 4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장에서 설치된 분수대에서 어린이들이 초여름 더위를 잊기 위해 물놀이를 하고 있다. 이날 서울은 29도 가까이 기온이 올라 초여름 날씨를 보였다. 2024.5.4 hkmpooh@yna.co.kr(끝)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