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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빠진 나라의 대통령
  • 뉴스관리자
  • 등록 2009-05-20 07:4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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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기회가 있었는데, 우리는 왜 (기후변화로부터) 우리를 구하지 못했을까요?”
기후변화로 문명이 송두리째 파괴되어버린 2055년, 지구에 홀로 남은 한 노인이 2008년의 기록을 뒤적이며 내뿜는 독백입니다.

영국에서 만든 영화 ‘바보들의 시대’는 환경 다큐 영화입니다. 기후변화의 파멸적 결과를 그린 영상으로 올해 말 교토의정서 후속조치를 마련할 코펜하겐 기후변화 당사국 총회를 겨냥하여 세계의 오피니언리더들을 향한 경종을 울릴 요량으로 만들어진 영화라고 합니다. 무려 4년에 걸쳐 제작됐고, 이 영화를 만들면서 배출된 이산화탄소의 양을 수치로 계산해내기까지 했습니다.

지난 3월 15일 영국 런던에서는 ‘바보들의 시대’의 시사회가 열렸습니다. 전 세계 관객 2억5천만 명을 끌어 모은다는 흥행목표를 세웠으나, 과문인지 모르나 한국에서도 별로 화제에 오르는 기색이 없으니 성공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직 기후변화는 현실과는 거리가 먼 공상과학(SF)으로밖에 받아들여지지 않는가 봅니다.

이 영화가 각국 정치 지도자들의 관심을 끌었다는 소식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딱 한 사람의 대통령이 예외적으로 이 영화에 매료되어 정치적으로 활용했다고 합니다. 그 주인공은 모하메드 나쉬드 몰디브 대통령입니다.

나쉬드 대통령은 ‘바보들의 시대’의 시사회가 런던에서 열리던 날 몰디브 수도 말레의 대통령궁으로 장관, 대법원판사, 국회의원 등 국가 요인 100여명을 초대하여 이 영화를 같이 감상했습니다. 영화감상이 끝나자 그는 국가 요인들 앞에서 중대 발표를 했습니다.
“몰디브를 세계 최초로 10년 안에 탄소중립국가로 만들겠습니다.”
앞으로 몰디브는 이산화탄소를 증가시키는 화석연료를 쓰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태양열, 바이오매스, 풍력 등의 에너지만을 쓰겠다는 것이니 그 실행이 정말 어려운 과제라 생각됩니다.

나쉬드 대통령이 몰디브의 탄소중립을 선언한 것은 그만큼 몰디브란 나라가 기후변화 문제를 절박한 이슈로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인에게는 해외 휴양지로 각광받는 인도양의 섬나라 몰디브 공화국은 동서 400킬로미터 남북 800킬로미터 넓이의 바다에 산재한 약 1,190여개의 산호초 군도로 이뤄진 나라입니다. 모든 섬을 합친 넓이가 298평방킬로미터로 강화도 크기만 합니다. 이 가운데 약 200개의 섬에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섬나라의 해발 고도가 2미터 내외입니다. 기후변화로 해수면이 상승하면 21세기 안에 바다에 잠겨버릴지도 모르는 나라입니다.
인구는 고작 30만 명이고 어업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다 근년에 관광지로 각광받으며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에 세계의 이목이 쏠리는 것은 바로 기후변화의 첫 희생국이 될 것이라는 예측 때문입니다.

나쉬드는 작년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하자 취임 전날 “나라를 옮길 영토를 구입하는 계획을 추진하겠다.”고 선언해서 세계 언론의 조명을 받았습니다. 몰디브가 연간 벌어들이는 관광수입 10억 달러 가운데 일부를 일종의 ‘영토기금’으로 적립하여 인근 인도나 스리랑카 또는 호주에서 땅을 사들였다가 국토가 바다에 잠기면 ‘국민과 정부’를 그 땅으로 소개하겠다는 구상입니다.

남의 나라 땅을 사서 그곳에 독립 국가를 이주시키겠다는 발상은, 그 실현 가능성은 차치하더라도, 참으로 기발합니다. 또한 처절하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나쉬드 대통령은 이런 선언을 통해 기후변화를 국가의 아젠다로 확실히 정립함으로써 정치인으로서의 수완을 발휘했습니다.

나쉬드 대통령은 분명 화제의 인물입니다. 대통령이 되자 기후변화를 자신의 정치 아젠다로 설정하는 극적 방법도 그렇지만, 대통령이 되기까지 그의 인생편력도 드라마틱합니다.

올해 마흔 한 살인 나쉬드는 20대 초반부터 압둘 가윰 대통령의 30년 독재체제에 맞서는 민주투사로서 활동합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영국에 유학하고 귀국한 후 잡지를 창간하여 가윰 대통령의 부패와 인권탄압을 폭로합니다. 이러한 나쉬드의 반정부 투쟁은 20여 년 간 계속되고 한때 국회의원에 당선되기도 하지만, 그는 가윰 정권의 미움을 사서 가혹한 탄압을 받습니다. 아홉 번이나 투옥되고 몇 차례 외국 망명길에 올라야 합니다. 그는 자동차사고를 가장한 살해음모로부터 용케 살아났고, 국제사면기구의 양심수로 거명되기도 합니다.

몰디브에도 민주화의 압력은 거세어 작년 가윰 대통령은 다당제 선거를 허용했습니다. 2차에 걸친 투표를 통해 나쉬드는 30년 권좌를 유지해온 가윰대통령을 물리치고 대통령이 되는 감격을 안았습니다.
대통령이 되고 그가 처음 밝힌 프로그램이 ‘영토구매 계획’이었습니다.

사실 가윰 전임 대통령도 기후변화 문제를 국가의 과제로 내세우고 세계를 돌아다녔던 사람입니다. 기후변화에 관심이 없던 1987년 가윰은 유엔총회에 나가 “해수면 상승이 몰디브를 세계지도에서 지워버릴 것이다.”고 경고했습니다. 1992년에도 브라질 리우 환경정상회의에 나가 “나는 멸종 인간의 대표”라고 목청을 높였습니다. 그러나 가윰은 밖으로는 환경위기를 경고하면서 나라 안에서는 철권을 휘둘렀던 독재자였습니다.

나쉬드 대통령은 기후변화에 대처하는 데 가윰보다는 더 영리한 지도자인 것 같습니다. 기후변화를 막기 위해 소국인 몰디브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니, 영토를 사들여 이사를 해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탄소중립을 선언하는 등 몰디브의 생존전략에 맞춰 기후변화 이슈를 부각하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후변화를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는 비판도 일각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권력이란 살아있는 생물과 같다고 합니다. 젊고 명석한 나쉬드 대통령이 기후변화 문제에 리더십을 보이면서 집권 연장을 시도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몰디브처럼 기후변화가 국가 아젠다로 집중되면 정치권력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녹색독재’가 등장할 가능성도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도 ‘저탄소녹색성장’이 정책 화두가 되어 있습니다만, 21세기가 깊어갈수록 기후변화 문제가 각국의 정책적 관심에서 정치권력의 핵심의제로 변해갈 것입니다. 지금은 몰디브와 투발루 정도가 이 단계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지만 해가 바뀌면 이런 나라의 숫자는 더욱 늘어날 것이고 큰 나라들로 확대될 것입니다. 세계는 바야흐로 ‘녹색정치’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말은 멋있지만 녹색정치가 세기적 혼돈의 서곡인지도 모릅니다.







필자소개



김수종


1974년 한국일보에 입사하여 30여년 기자로 활동했다. 2005년 주필을 마지막으로 신문사 생활을 끝내고 프리랜서로 글을 쓰고 있다. 신문사 재직중 신문방송편집인협회 이사와 정보통신윤리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환경책 '0.6도'와 '지구온난화와 부메랑(공저)'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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