靑草(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紅顔(홍안)은 어듸 두고 白骨(백골)만 묻혔는다
盞(잔) 잡아 勸(권)할 이 업스니 그를 슬허 하노라
조선시대의 문인 백호(白湖) 임제(林悌)는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해 예조정랑, 홍문관 지제교(知製敎)를 지냈습니다. 당파싸움으로 이미 나라 꼴은 말이 아니었고 그 자신 벼슬에 큰 뜻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벼슬살이보다는 주유천하(周遊天下)와 풍류가 주 전공이었습니다.
그런 白湖에겐 호기였는지도 모릅니다. 평안도 평사(評事)라는 별 볼일 없는 지방관리로 발령이 난 것입니다. 부임하던 길에 개성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호연지기의 대문장가가 일세를 풍미했던 명기(名妓) 황진이(黃眞伊)를 그냥 지나칠 수 있었겠습니까. 白湖는 한 시대 앞서 간 황진이의 무덤에 술잔을 올리고 이 노래를 읊었습니다. 그리고 그길로 벼슬서도 잘리고 말았답니다.
일개 지방관리가 기생 무덤에 술잔을 붓고 추모의 노래까지 지었으니 잘리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었을 겁니다. 사생활이 존중되는 요즘에라도 아마 자리 지키기가 힘들었겠지요.
白湖는 「화사(花史)」, 「수성지(愁城誌)」 같은 한문소설도 여러 편 남겼지만 운치 있는 시조가 더 사랑받고 있습니다. 평양 명기 한우(寒雨)와는 이런 수작도 부렸지요. 객주(客主)가 이렇듯 죽이 맞아 화답했으니 그날 밤 잠자리가 무사치는 못했을 겁니다.
北天(북천)이 맑다커늘 雨裝(우장) 업시 길흘 나니
山(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 온다
오날은 찬비 마즈니 어러 잘가 하노라-白湖
어이 어러잔고 무삼 일 어러잔고
鴛鴦枕(원앙침) 翡翠衾(비취금)을 어듸두고 어러잔고
오날은 찬비 마즈니 더옥 덥게 자리라-寒雨
풍류로 말하자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白湖가 천하의 황진이와 일합도 겨뤄 보지 못한 것은 애석한 일입니다. 출중한 시와 음률과 용모로 뭇 사내들의 간장을 녹였다는 明月. 가진 재주만큼이나 오기도 대단해 10년 수도로 무장한 지족선사(知足禪師)를 무너뜨리고 당대의 학자 화담(花譚 徐敬德)과 시담(詩談)을 나누었다니 호적수 白湖와 맞섰더라면 또 얼마나 기막힌 사연들이 쏟아졌을까요.
어떤 기록은 白湖가 구연(舊緣)이 있는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 이별을 슬퍼했다는데 徐 花譚과 황진이가 교유하던 때가 중종대인 걸로 보아서는 무리한 해석 같습니다. 황진이의 생몰연대는 확실치 않지만 徐 花譚은 白湖가 나기도 전에 이미 세상을 뜬 사람입니다. 白湖가 출사(出仕)할 때쯤 황진이는 안 되어도 환갑을 넘겼거나 이미 저 세상 사람이었을 겁니다.
白湖 林悌도 마흔을 넘기지 못하고 피폐해진 조선반도에 왜란이 닥치기 5년 전 세상을 떠나 본향인 나주 땅에 묻혔습니다. 후손들 손으로 지금은 기념관도 마련돼 있습니다.
도봉산 우이암을 돌아 원통사로 내려오다 방학동 쪽으로 길을 잡으면 의외로 호젓한 산길이 이어집니다. 평지로 내려서기 직전 남서쪽 기슭에 제법 오래된 묘지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습니다. 거의 다 십자가 표지에 세례명이 새겨진 천주교도들의 무덤입니다. 그 가운데 비석 하나에 이런 묘비명이 새겨져 있습니다.
“백파(伯坡) 선생님 여기 잠들다.
벗을 사랑하고, 술을 사랑하고, 맛과 멋을 즐기던 선생님. 당신은 언제나 따뜻함이 넘치는 분이었습니다. 하늘처럼 맑게, 학처럼 고고하게 일생을 사셨던 가슴 넉넉한 신사였습니다. 이제 이 따뜻한 언덕에 편히 쉬소서.”
6년 전 이맘때 古稀를 넘기고 세상을 뜬 백파(伯坡) 홍성유(洪性裕) 선생의 묘소입니다. 평생 벗과 어울려 맛과 멋을 찾아 주유천하하던 선생에게는 더 없이 잘 어울리는 묘비명입니다. 본인도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흡족해 할 것 같습니다. 비석을 세워준 딸, 사위, 손자에게 감사하면서.
지금보다는 마음이 여유로워서였을까요. 한동안 선후배 어울려 값싸고도 맛있는 집 찾아다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성경책만큼은 아니었어도 늘 책상머리에 꽂아두거나 여행가방에 담아 다니며 즐겨 보던 책이 바로 伯坡의 히트작 「한국 맛있는 집」이었습니다.
白湖처럼 호방한 성품을 가진 伯坡의 대표작은 「인생극장」(나중 「장군의 아들」로 개명 )이라는데 선생을 더욱 기억나게 하는 건 역시 맛 기행문입니다. 여기저기서 대접받고 마지못해 써준 맛집도 있었다고 더러 시비 거는 사람도 있지만 그래도 선생만큼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맛과 멋을 즐긴 이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겨울철 황혼은 어쩐지 더 을씨년스럽습니다. 석양에 비친 비석이 산언덕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얼핏 보기엔 황량하기만 한 이 언덕에 그래도 숨 쉬는 듯 온기가 느껴지는 것은 아마 세상 떠난 이의 따뜻한 행적 때문일 겁니다. 또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묘를 쓰는 것은 돌아가신 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아있는 자들을 위해서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 옛 시조의 표기는 청구영언(靑丘永言) 최남선(崔南善) 소장본에 기초를 둔 것이나 고어체의 표기가 어려워 부득이 현대 맞춤법에 크게 어긋나지 않게 고쳐 옮긴 것입니다.
* ‘무삼 일 어러잔고’는 ‘무엇 때문에 (추위에) 얼어서 자겠느냐’는 뜻입니다.
필자소개
방석순
스포츠서울 편집국 체육부장, 부국장, 경영기획실장과 2002월드컵조직위원회 홍보실장을 역임했다. 여러 차례의 올림픽과 월드컵축구 등 세계적인 스포츠대회의 현장을 취재했고, 국제스포츠이벤트의 조직과 운영에도 참여하며 스포츠경기는 물론 스포츠마케팅과 미디어의 관계, 체육과 청소년 문제 등에 깊은 관심을 두고 이와 관련된 글들을 집필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