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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 내리던 날
가을비 내리던 날입니다. 붉게 노랗게 또는 갈색으로 물든 가로수 잎들이 비바람에 떨다가는 투두둑 떨어지고 맙니다. 세상살이가 쉽지 않아서 그런지 가을비도 예전처럼 낭만적으로 보이질 않습니다. 우산을 어깨에 걸고 공연히 고궁 뒷담 길을 터덜거리던 젊은 시절의 감정도 어쩐지 사치스럽게만 느껴질 뿐입니다.
사무실은 전철로는 세 번, 버스로는 두 번을 타야만 갈 수 있는 다소 외진 곳에 있습니다. 전철을 몇 번씩이나 갈아타는 것도 번거롭고 뜸하게 다니는 버스를 두 번씩이나 기다리는 것도 짜증나는 일이어서 벌써 몇 달째 버스 한 번 타고 두어 정거장쯤은 그냥 걸어가곤 합니다.
그나마 걸어가는 길목에 초등학교 하나가 있어 적지 않은 즐거움을 줍니다. 운동장에서 선생님들의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구령을 붙여 가며 줄지어 가는 병아리 같이 귀여운 아이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세상 도처의 성난 아우성도 머리를 어지럽히던 골칫거리도 까맣게 잊고 맙니다. 험한 세파도 비켜가는 청정지역처럼 느껴집니다.
그날은 비가 내린 탓인지 운동장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일부러 교문으로 들어서서 운동장 옆 담을 따라 걸어가 봅니다. 아마도 지금쯤 그 귀여운 아이들이 교실에서 선생님을 따라 노래도 부르고 고사리 손으로 공책에 받아쓰기도 하고 있겠지, 생각하면 절로 기분이 좋아집니다.
점심 약속을 위해 사무실을 나서려니 비가 그치고 하늘도 개는 듯했습니다. 굳이 우산을 들고 나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막 사무실을 떠나 10여 분쯤 걸어 나왔는데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집니다. 이런, 사무실에 되돌아가야 하나 그냥 걸어가 볼까, 망설이는데 웬걸, 빗방울은 점점 더 굵어집니다.
마침 늘 지나다니는 초등학교 옆길입니다. 키 큰 가로수 아래서 우물쭈물 하고 있는 동안 아마도 그 초등학교의 학생이 아닐까 싶은 여자아이 하나가 우산을 쓰고 지나갑니다. 사무실까지만 같이 가면 좋을 텐데 싶어 우산 밑에 고개를 들이밀었습니다.
“얘, 어느 쪽으로 가지?”
그 순간 그 아이의 얼굴이 험하게 일그러졌습니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이민 반대편으로 홱 우산을 제쳐버렸습니다. 아이의 너무나 격렬한 동작에 그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도 무안하고, 또 미안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 아이가 다시 우산을 받쳐 들고 저 멀리 가는 동안 비를 맞으며 그 자리에 망연자실 서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을비 내리던 그날은 하루 종일 사무실에 앉아서도 그 민망했던 순간 밖에는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 짧은 순간 솔직히 조금 서운한 마음도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 아이의 성정이 남다르게 괴팍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천사 같은 아이들의 마음에 그토록 무서운 경계심을 심어준 게 누구였던지 생각해보면 그저 미안스럽고 심난할 뿐이었습니다. 작은 탐욕 때문에 어린 꽃들을 무참히 꺾어버린 그 수많은 사건들을 생각하면 어른으로 있는 것만으로도 죄스러울 따름이었습니다.
가을비는 더 이상 낭만이 아닙니다. 어느 마음씨 예쁜 이가 천사처럼 다가와서 우산을 씌워줄 일은 천만에 없을 것입니다. 가을비 맞고 얻을 건 감기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틀리기 일쑤인 기상대 예보라도 귀 기울여 듣고 꼭꼭 우산을 챙길 일입니다. 혹시 비 맞고 걸어가는 아이가 있더라고 행여 함부로 우산을 함께 쓰자고 덤빌 일도 아닙니다. 그러니 어찌 가을비가 더 이상 낭만일 수 있겠습니까.
필자소개
방석순
스포츠서울 편집국 체육부장, 부국장, 경영기획실장과 2002월드컵조직위원회 홍보실장을 역임했다. 여러 차례의 올림픽과 월드컵축구 등 세계적인 스포츠대회의 현장을 취재했고, 국제스포츠이벤트의 조직과 운영에도 참여하며 스포츠경기는 물론 스포츠마케팅과 미디어의 관계, 체육과 청소년 문제 등에 깊은 관심을 두고 이와 관련된 글들을 집필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