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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를 말리면서
  • 뉴스관리자
  • 등록 2008-10-10 17: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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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길에서 도로 곁이나 농가의 앞마당 멍석에 깔아놓은 빨간 고추를 보는 가을 풍경은 가슴을 훈훈하게 합니다.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면서 말라가는 고추들은 가루로 빻아져 이름 모를 이들의 밥상에 오르겠지요.

6월말 풋고추는 사돈이 와도 안 준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고추는 빨갛게 익어갈 준비를 하기 때문이랍니다. 고추는 장마를 딛고 8월 중순부터 빨간 모습을 보입니다. 풋고추일 때는 그렇게 싱싱하던 것들이 며칠 새 탄저병 바이러스에 시달리는 모습으로 표변하는 것도 이 때부터 입니다. 도장밥을 찍은 듯이 하얗게, 누렇게, 때로는 검게 변해가는 모양에 하나를 따서 냄새를 맡아보면 역시 역겹습니다.

다행히 올해는 8월말부터 가을가뭄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맑은 날씨가 계속되어 탄저병이 예년처럼 창궐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랑의 간격을 1미터쯤 되게 넓게 띄워놓은 것도 주효했나 봅니다. 고랑에는 박스 포장지를 뜯어 깔거나 신문지 전단지를 스테이플러로 박아 길게 늘여 덮어놓았습니다. 잡초가 덜 생기면 통풍이 좋아져서 기온과 습도가 내려가는데다 일조량이 늘어 병충해의 발생이 줄어들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6월말부터 따지 않았기 때문인지 올해 고추는 유난히 길었습니다. 키 1미터도 안 되는 작은 식물이 어떻게 이 많은 열매를 달고 있을까? 경이롭다는 생각으로 따낸 고추는 큰 대야에 넣어 손으로 뽀드득 소리가 나도록 깨끗한 물로 세 번을 씻었습니다. 그리고 수건으로 물기를 정성스레 말린 뒤에 방수 천막지로 된 멍석에 널었습니다. 전에는 검은 망을 썼는데 그 망 밑으로 검불이나 흙이 달라붙는 게 싫어 영등포 시장에서 파란 천막지 7.2미터(8마)를 사서 반으로 갈랐더니 말리기에 아주 넉넉한 넓이가 되었습니다.

집으로 가져온 뒤에는 12층 아파트 옥상에 널었습니다. 하늘에는 김포공항에서 이륙한 여객기가 멀리 지나가는데 흰구름 밑에 널어놓은 붉은 고추는 그런대로 도심의 이색적인 풍경이었습니다.

햇볕이 좋아 그렇게 1주일쯤 말리게 되면 고추는 노란 씨앗이 투명하게 보이는 루비 보석처럼 진홍색으로 반짝이는 태양초가 됩니다. 코를 대어보면 냄새는 달콤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이때쯤 노란 씨앗을 먹기 위해 비둘기들이 달려듭니다. 수분이 증발하면서 당도가 높아져 비둘기를 유혹하는 것입니다. 비둘기를 막기 위해 멍석 위에 투명 비닐을 씌워놓습니다. 이윽고 만지면 플라스틱 조각처럼 바스락 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깨지기도 합니다. 다시 행주로 깨끗이 닦습니다. 윤기가 더욱 반짝반짝 나게 됩니다. 이젠 가루로 빻아도 됩니다. 고추 방앗간들은 아주 까다로워서 너무 말랐으면 스프레이로 물을 뿌리고 덜 마른 것은 아예 빻아주지를 않습니다.

원래 고향이 남미인 고추의 전래에 대해서는 임진왜란(1592년 발발)을 즈음하여 선조 혹은 중종 임금 시절에 일본에서 들어왔다는 설과 오히려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를 경유하여 일본에 전파되었다는 설 등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고춧가루를 빼고선 우리 음식을 논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고추 널러 가세요?” 아파트 승강기에서 그런 말을 듣기도 합니다. “요즘 세상에 아파트에서 누가 저런 걸 말린담?”하고 속으로 피식 웃을 이도 있겠지만 아파트 마당에 고추를 너는 분들이 단지 내에 해마다 한 두 분은 보입니다.

유별나다고 묻는 분들에게 되묻고 싶죠. 속칭 ‘엄뿔’이라는 드라마를 언뜻 보니 귀부인으로 분한 탤런트 장미희 씨가 아들 며느리가 주는 떡볶이를 마다하면서 “이 고춧가루에 무엇이 들었는지 모르면서 그렇게 먹어도 되는 거야?”라는 요지의 대사가 나오죠. 음식은 정성이라고 했죠. 그 정성은 재료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요.

농사를 지으면서 날씨는 기상청 사이트에 들어가 매일 들여다보는 게 습관처럼 되었지만 고추를 말릴 때에는 시간 단위의 예보를 보게 됩니다. 강수확률이 높을라치면 외출하기 전에 얼른 거두어 전기 장판 위에서 말리고 날씨가 다시 좋아지면 옥상에 너는 것이지요. 때로는 집에 아무도 없을 때 아파트 경비 분들이 빗방울이 듣는다고 옥상의 고추를 거둬 놓기도 했습니다. 비가 계속 올 때에는 희나리를 방지하기 위해 배를 반으로 갈라서 말리기도 합니다. 몇 년 전엔 관리실에 신고하여 옥상에서 고추를 못 말리게 한 각박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약 20일간의 ‘고추 말리기 전쟁’도 추석 직후에 끝났습니다. 지금도 밭에는 빨간 고추를 달고 있는 그루들이 더러 보입니다. 붉은 고추를 다 땄는데도 녀석들은 하얀 꽃을 활짝 피우고 벌과 나비를 꾀고 있습니다. 무얼 더 달고 싶어하는 것일까요?

구정이 지나면 농민들은 고추 모를 붓습니다. 비닐하우스에서 자란 이 고추들은 4월 하순내지 5월 초순에 밖으로 나와 밭에 ‘아주 심기(정식)’하게 되는 것이지요. 염천을 이기며 열매를 맺은 고추들은 온갖 정열을 다해 빨간 고추를 한껏 만든 뒤에도 부지런히 새로운 풋고추를 만들어갑니다. 11월 초중순경 서리가 내려 잎이 시들 때까지.

고추대가 바짝 마르면 초겨울에 불을 놓아 태웁니다. 혹시 내년에 살아남을지도 모를 병균을 미리 죽이자는 것이지요. 이것이 고추의 일생입니다.








필자소개



김영환


한국일보 기자로 입사, 각부를 거치면서 우리나라 정치 경제 사회 각 분야의 개량을 지고의 가치로 삼아 보도기사와 칼럼을 써왔다. 그는 동구권의 민주화 혁명기에 파리특파원을 역임했으며 신문사 웹사이트 구축과 운영에서 체득한 뉴미디어 분야에서 일가견이 있다. 저서로는 병인양요 시대를 그린 편역서 '순교자의 꽃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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