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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추석
  • 뉴스관리자
  • 등록 2008-09-08 19: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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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추석은 아직도 눈에 선해 잊히질 않습니다.

아내와 단 둘이 나선 산행 길은 그만 등산로 초입에 숨어 있던 산밤나무 덕에 엉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눈 밝은 아내가 등산로에 떨어진 밤송이를 발견한 것입니다. 처음엔 그저 재미로 몇 개 줍다 말겠지 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수풀을 헤치며 이리저리 살피더니 잠깐 사이에 양손 수북이 주운 밤을 자랑하는 게 아닙니까.

아이구, 오늘 산행은 틀렸구나. 안 그래도 산길에만 올라서면 이런저런 핑계로 거북이걸음을 걷던 아내는 아예 본격적으로 밤 줍기 작업에 들어간 것입니다. 이젠 배낭을 벗어놓고 같이 줍자고 성니다.

우선 맛이 어떤지 먹어나 보고. 나무 밑에 배낭을 세워두고 밤톨 하나를 까서 입에 넣었습니다. 알이 좀 잘아서 그렇지 의외로 달콤한 맛이 혀를 간질입니다. 어, 이거 괜찮네. 이래서 둘의 밤 줍기 내기가 벌어진 겁니다.

원래 아내의 전공은 나물 캐기나 뜯기였습니다. 이른 봄 둔덕에서 어디 박혔는지 보이지도 않는 냉이를 용케도 찾아냅니다. 또 야산에 올라 나뭇가지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 고 귀여운 고사리 손들을 어찌나 잘 찾아내는지요. 참취, 곰취, 개미취, 미역취, 참나물은 아내의 밥입니다. 눈에 띄는 놈치고 그 모진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걸 못 보았으니까요.

이번은 밤 차례인가 봅니다. 털 가시투성이인 밤송이의 벌어진 틈을 양 발로 살짝 밟아 누르면 알밤들이 쏘옥 튀어나옵니다. 도저히 감당 못할 아내의 기세에 눌려 있다가 깜짝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계곡 흐르는 물속에서 널린 알밤들을 발견한 것입니다. 따가운 밤송이와 씨름할 필요도 없고 얼씨구나 건져 올렸습니다. 물속에서 건진 밤은 싱거워 맛이 없다는 핀잔을 들은 건 한참 나중이었지만.

그렇게 해서 점심때쯤에는 거의 배낭 하나를 채웠습니다. 둘은 산꼭대기에 오르는 일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배낭에 두둑이 채운 알밤에 흡족해서 물이 졸졸 흐르는 계곡에 앉아 도시락 까먹고 늘어지게 놀다 돌아왔습니다.

그날 저녁 늦게 모처럼 식구들이 빙 둘러 앉았습니다. 식구라야 달랑 셋밖에 안 되지만. 마침 추석이 댓새 뒤였고 아들 녀석도 요행 직행으로 일찍 귀가한 날이었습니다. 널찍한 종이 위에 쌀가루 반죽과 콩, 깨, 대추, 그리고 부부의 노작(勞作) 산밤 등 소가 나란히 놓였습니다. 이제부터 각자 요령껏 송편을 빚는 겁니다.

한 줌 떼어내 처음 만져보는 쌀 반죽의 느낌이 참 묘했습니다. 갓난아기의 보드라운 손을 만지는 느낌, 젊은 여인네 넓적다리를 만지는 느낌, 뭐 그런 거였습니다. 그것도 오물락조물락 많이 만질수록 송편 살이 차지고 맛있다니 재미있는 일이었습니다. 동그랗게 반죽을 펴 소를 넣습니다. 한번은 콩, 다음번은 깨, 그 다음번은 밤...

그리고 반죽을 아물리는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주둥이가 벌어지지 않게 해야 하고, 적당히 모양도 내야 하고. 거기서 비로소 송편 빚는 진짜 실력이 판가름되는 것입니다.

그 지난한 작업을 계속하는 동안 셋은 서로 흉도 보고 칭찬도 하고 배꼽을 잡았습니다. 아, 추석을 맞아 식구들이 모여 앉아 송편 빚기란 이렇듯 큰 즐거움을 주는 것이로구나, 난생 처음 깨달았습니다. 쪄서 먹어보기도 전에 식구들은 모두 포만감을 느꼈습니다.

드디어 추석날. 여자 동서들끼리 의논하고 정한 대로 제각기 준비한 차례음식을 들고 큰집에 모였습니다. 근엄한 빛으로 차례를 올리고 다음은 물린 음식을 먹을 차례. 전, 적, 나물, 탕 가운데 큼직한 접시에 송편도 올라왔습니다.

큰집, 둘쨋집, 작은집 식구들 이 사람 저 사람 송편을 집어 들더니 낄낄거리기 시작합니다. “야, 뭐 이렇게 생긴 송편이 다 있냐?” “어, 이건 진짜 작은아버지 닮았네요.” 이래서 온 가족이 모인 가운데 또 한바탕 웃음바다가 벌어졌습니다. 사연이 있어 그런지 특히 밤이 든 송편이 더 맛있게 느껴졌습니다.

상을 물리고 나면 으레 밤잠 설쳤다며 잠자리를 찾는 축, 고스톱판을 벌이는 패, 술상을 끼고 앉는 무리로 쪼개지던 게 관례였습니다. 그러니 가족들이 여기저기 따로 앉아 쑤군쑤군 누구 뒷얘기나 하고 키득거리기 일쑤였지요.

그날은 누구의 제안이었는지 서랍 속에 잠자던 윷판을 꺼냈습니다. 세 집 식구들이 각각 팀을 이루어 밑돈 2천 원씩을 묻었습니다. 팀마다 네 마리의 말을 띄워 먼저 나는 팀이 4천원, 두 번째 팀이 2천원을 먹고, 꼴찌는 잃는 것입니다.

윷이 한 번 공중을 날아 떨어질 때마다 희비가 엇갈립니다. 개, 걸로 잔걸음하다 그때마다 뒤 팀에게 붙잡혀 앞밭도 벗어나지 못하고 되돌아올 때의 실망과 한숨, 다른 팀은 뒷도가 나와서도 지름길로 가는데 말을 잘못 놓아 윷이 나와도 뒷밭을 다 돌아 먼 길로 가야할 때의 안타까움, 여러 말을 한데 업어 잘 나가다가 덜컥 덜미 잡힐 때의 속 쓰림, 날밭을 겨우 세 걸음 앞두고 붙잡혔을 때의 좌절과 분노와 복수심, 뒤에 처져 쩔쩔매다가 용케 앞선 말을 징검다리삼아 먼저 났을 때의 그 환희와 감격...

끝날 때까지 포복절도, 박장대소하는 게 바로 윷판입니다. 2천 원짜리 윷놀이가 한 판에 수만 원씩 오가는 고스톱, 카드, 그 어떤 놀이보다 더 간 졸이고 짜릿하다는 것도 그해 추석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올 추석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이 험하고 어수선한 세상 온 가족이 한데 모여 물질보다는 마음이 더욱 풍성한 한가위를 맞으시기 바랍니다.








필자소개



방석순


스포츠서울 편집국 체육부장, 부국장, 경영기획실장과 2002월드컵조직위원회 홍보실장을 역임했다. 여러 차례의 올림픽과 월드컵축구 등 세계적인 스포츠대회의 현장을 취재했고, 국제스포츠이벤트의 조직과 운영에도 참여하며 스포츠경기는 물론 스포츠마케팅과 미디어의 관계, 체육과 청소년 문제 등에 깊은 관심을 두고 이와 관련된 글들을 집필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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