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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입니다. 그토록 기승을 부리던 더위가 조금씩 물러가면서 아침 저녁으로 제법 가을기운을 느낄 수 있습니다.
9월은 가을의 문턱에 서 있긴 하지만 더위가 남아 있는, 이른바 殘暑之節(잔서지절)이라는 애매한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날씨의 변화와 함께 하늘과 물은 여름의 그 열정과 감정소비로부터 벗어나 이제는 좀 차분해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연과 생명과의 친화 속에서 자신들의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켜온 북미 원주민, 즉 인디안을 생각하게 됩니다. 인디안을 가리켜 지상에서 가장 점잖고 시적인 사람들이라고 말한 작가도 있지만, 그들은 1년의 각 달에 독특한 이름을 붙였습니다.
인디안의 여러 부족은 9월을 ‘사슴이 땅을 파는 달’, ‘풀이 마르는 달’, ‘검정나비의 달’, ‘작은 밤나무의 달’, ‘옥수수를 거두어 들이는 달’이라고 각각 불렀습니다. 사슴이 땅을 파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지만, 이름마다 계절의 변화와 직결되는 그들의 삶이 잘 담겨 있습니다.
그들의 사고와 삶의 방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삶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하고 새로운 영감을 불러 일으키곤 했습니다. 프란츠 카프카의 <인디안이 되고 싶은 욕망>이라는 글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인디언이 되었으면! 질주하는 말 잔등에 잽싸게 올라 타 비스듬히 공기를 가르며 진동하는 대지 위에서 거듭거듭 짧게 전율해 봤으면, 마침내는 박차를 내던질 때까지, 실은 박차가 없었으니까, 마침내는 고삐를 집어 던질 때까지, 실은 고삐가 없었으니까, 그리하여 눈앞에 보이는 땅이라곤 매끈하게 풀이 깎인 광야뿐일 때까지, 이미 말모가지도 말대가리도 없이.’ 이것이 그 글의 전문입니다.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영혼, 하늘과 자연에 순응하며 인간의 가치를 구현하며 살아가던 사람들, 그들이 박해 받고 절멸의 길을 가게 된 것은 인류역사의 큰 비극이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매사에 지나치지 않는 그들의 삶이 제대로 인정 받거나 이해되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이 안타깝습니다.
우리 사회로 눈을 돌리면 모든 일에 너무도 극단적이고 끓고 넘치고 공격적입니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편 가르기, 관용과는 거리가 먼 적대적 이분법 논리가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過猶不及(과유불급)의 극단적 논리와 행태가 사회 구성원들을 숨 막히게 만들고 있습니다.
국가 지도자나 각 기관ㆍ사회 단체의 간부들은 “이건 아닌데…”하는 국민의 생각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가령 미국산 쇠고기문제로 촉발된 촛불시위에 동의ㆍ동조하면서도 그것의 지나침과 비뚤어짐에 대해 염증을 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소설가 박완서씨는 월간 <현대문학> 9월호에 실린 ‘8월의 단상’이라는 글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되자마자 뽀르르 미국 먼저 달려간 것부터 시작해서 도무지 마음에 안 드는 것 천지였기 때문에 촛불시위도 속으로 박수쳐 가며 지켜볼 수 있었다. (그러나) 촛불시위의 축제 분위기 속으로 다른 욕망들이 섞여 드는 걸 보기 괴로웠다. 이게 아닌데 싶어서 이제 그만했으면 싶었다. 보수세력들이 배후의 불순세력 운운하는 소리를 들으면 지금이 어느 때라고 저 낡은 수법을 또 써먹나 울컥 혐오스럽다가도 이 정부를 흔드는 시위대에 싫증을 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는 요지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민의가 반영되는 선거로 대통령을 뽑게 된 역사는 실상 얼마 되지 않는다. 흔들고 싶으면 흔들되 아직 어린 나무이니 뿌리까지 흔들지 말았으면 싶은 것”이라는 말도 했습니다. “그만큼 의사표시를 했으면 나머지는 국회에 맡겨야 되지 않을까 한다”는 그의 말은 말없는 다수의 생각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 한창 시끄러운 종교 편향문제와 불교계의 항의에 대해서도 양쪽이 다 지나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같다고 봅니다. 이명박 정부는 분명 잘못했습니다. 이 정부의 공직자들이 의도적이든 아니든 불교계를 차별한 사례를 죽 훑어 보면 정말 무심하고 성글고 허술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을 생각하며 정치를 하고 행정을 하는지 의아합니다. 8월 27일 열린 ‘헌법 파괴ㆍ종교 차별 이명박정부 규탄 범불교도대회’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정부는 지나가는 말처럼 미안감을 표시하지 말고 불교계의 요구를 들어주어 이 문제를 서둘러 해소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요구는 이 대통령의 사과, 어청수 경찰청장 파면, 조계사 내 불법 시위 수배자 면책, 종교차별 금지입법 등 네 가지입니다.
그러나 이 요구 중에서 불법 시위로 수배되자 조계사에 들어가 농성 중인 사람들에 대한 면책 조치는 지나친 주장입니다. 종교차별 금지 입법에 대해서도 이미 헌법 20조에 종교의 자유, 국교 불인정, 종교와 정치의 분리에 관해 규정돼 있는데 새삼 무엇을 입법하라는 것이냐는 반론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종교 편향 방지를 위한 입법문제는 담당 장관이 약속한 바 있으므로 지켜볼 따름입니다.
불교계의 불만과 요구사항은 이미 충분히 표현되고 전달됐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좀 차분하게 지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8월 30일에는 한 스님이 혈서를 사전에 배포하고 정부에 항의하는 자해행동을 조계사에서 했는데, 아무리 격분했다 하더라도 지나친 일입니다. 일반 시민들과 종교인이 다르기를 바라는 사람들로서는 “이건 아닌데...” 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베이징 올림픽의 쾌거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현상에 대해서도 염증이 커져가고 있습니다. TV의 온갖 오락 프로그램이 앞 다투어 메달리스트들을 섭외하고 출연시켜 망가지는 모습을 보게 하고, 한 메달리스트와의 토크 쇼를 두 방송이 동시에 방영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습니다. 모두가 지나친 일입니다.
그들만 탓할 것도 아닙니다. 제의를 다 받아들이는 선수들과 그 주변의 관련자들에게도 문제는 있습니다. 수영의 박태환처럼, 10여 년 전의 축구스타 홍명보처럼 “나 그런 데 안 나갑니다”하고 선언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의 <與隋將于仲文詩(여수장우중문시)>에 知足願云止(지족원운지)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제 만족할 줄 알고 그만하라는 뜻입니다. 사실은 우중문을 놀려 주어 격동시키기 위해 보낸 것이지만, 그 시를 읽으면서 무엇을 하는 것보다 멈추고 그치는 일이 참 어렵구나 하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