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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잔소리가 싫다고 집을 나간 아이가 하루 만에 돌아왔답니다. 뒤늦게 기운을 차린 엄마, “지가 갈 데가 어디 있어?” 기세등등해서 큰 소리를 칩니다. 그 엄마가 얼마 전, 부부싸움하고 집을 나왔는데 갈 데가 없더라고 하소연하던 것이 떠올라 웃음이 납니다. 구경꾼 입장에선, 두 사람이 서로의 경험을 나누기만 해도 아이가 다시 가출을 꿈꿀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어른은 아이의 가출에 기겁을 하고 아이는 어른의 가출을 상상도 못하지만, 솔직히 애나 어른이나 살다보면 도망가고 싶을 때가 왜 없겠습니까! 집은 안식처입니다. 하지만 안식을 위해선 때로 자유를 저당 잡히는 희생도 치러야 하지요. 명절이 다가오고, 안식의 달콤함보다 희생의 씁쓸함이 커지는 이즈음, 나무 위 까치둥지로라도 가출하고 싶어집니다. 코지모 피오바스코 디 론도 남작처럼 말이지요.
나무 위로 올라간 코지모 남작 이야기는, 환상문학의 거장 이탈로 칼비노가 쓴 ‘우리의 선조들’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입니다. 칼비노가 현대인의 족보로 제시한 이 3부작에는 아주 희한한 조상들이 등장합니다. 몸이 반으로 뚝 잘라진 『반쪼가리 자작』, 갑옷만 살아 돌아다니는『존재하지 않는 기사』, 열두 살 때 나무 위로 올라가서 절대 내려오지 않은 『나무 위의 남작』. 한 분 한 분 다 독특한 인생역정을 자랑합니다만, 오늘은 그 중에서도 열두 살에 가출을 감행하신 코지모 남작 어른 얘기를 하겠습니다.
남작이 가출을 결행한 것은 1767년 6월 15일 점심 식탁에서였습니다. 표면적인 이유는 메뉴의 자유지만, 근원에는 완고하고 시대착오적인 집안 전통에 대한 저항심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남작은 달팽이를 먹으라는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하고 나무 위로 올라갑니다. 어른들은 이 어린 반항아가 하루도 못 가서 내려올 거라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남작은 자신이 맹세한 대로, 그날 이후 다시는 땅을 밟지 않습니다. 범인(凡人)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이 의지력으로 남작은 그의 가출을 출가로 전화(轉化)시킵니다.
물론, 남작이 나무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도나 닦으며 세월을 보냈단 얘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나무 위에서 누구보다 뜨겁고 열정적인 삶을 삽니다. 사냥을 하고 집을 짓고 과학을 연구하고 사랑을 하고 해적을 몰아내고 혁명을 전하고 전쟁에 가담하고… 일일이 열거하기가 숨찰 지경이지요. 나무 위에서 그게 말이 되냐고요? 남작이 어떻게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용변을 보고 사랑을 나누었는지, 칼비노의 생생한 묘사를 보면 믿으실 겁니다. 하긴 마음만 먹으면 나무 위든 지붕 위든 어디서는 못 살겠습니까.
그렇지만 코지모 남작이라 하여 나무 위의 삶이 땅의 삶보다 편안한 것은 아닙니다. 지식과 상상을 동원해 끊임없이 시설물을 고안하고 개량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불편하고 불안한 생활인 건 분명합니다. 더욱 괴로운 건 외로움입니다. 나무와 땅 사이의 거리가 빚어내는 쓸쓸함 말이지요.
“형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우리들의 생활을 잠깐이라도 그리워했을까? 불과 몇 걸음으로 인해, 그렇게도 짧고 그리도 쉽게 떼어놓았던 단 몇 걸음으로 인해 우리들의 세상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는 생각을 했을까? 난 형이 거기서 무슨 생각을 했고 무엇을 바랐는지 알 수 없다. 다만 형이… 촛불이 하나하나 꺼지고 모든 창문의 불이 다 꺼질 때까지 거기 있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스스로 떠난 집이지만 그를 향한 그리움마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남작은 그 그리움에 무릎 꿇지 않습니다. 땅에서는 보지 못했던 땅의 부조리와 땅의 아름다움이 그를 나무 위에 머물게 한 것입니다. 나무 위의 남작에 대해 묻는 볼테르에게 남작의 동생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당신 형은 왜 하늘 가까이, 그 위에서 사는 건가요?
-우리 형은 땅을 제대로 보고 싶은 사람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만 한다고 주장합니다.”
땅과 나무 사이의 거리를 통해 남작은 세상을 새롭게 보게 됩니다. 그리고 낯가림 심하던 소년은 어느새 먼저 나서서 사람들의 일손을 거들고 땅의 삶을 좀 더 풍요롭게 하기 위해 궁리를 거듭하는 지식인으로 변합니다. ‘거리(距離)’가 주는 자유와 함께 책임도 받아들이면서, 그렇게 “사람을 피하지 않는 은자”로서의 삶이 완성됩니다.
익숙한 인연이 무거워 가출하고 싶은 날, 나무 위로 올라간 우리들의 선조 코지모 남작을 생각합니다. “나무 위에서 살고 땅을 사랑하며 하늘로 올라간” 그 삶의 치열함을 되새깁니다. 땅에 뿌리내리고 하늘을 우러르는 나무들. 눈을 드니 탐스러운 열매가 주렁주렁 열렸습니다. 참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필자소개
김이경
"취미로 시작한 책읽기가 직업이 되어 출판사 편집주간으로 일했고,
지금은 프리랜서로 책을 읽고 쓰고 기획하는 일을 하고 있다.
시립도서관에서 독서회를 11년째 지도 중이며, [청소년을 위한 삼국유사][인사동 가는 길]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