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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 빚, 빛
  • 뉴스관리자
  • 등록 2008-07-26 18:5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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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씨는 어젯밤에도 깊은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남편 몰래 들어두었던 1천만 원짜리 정기예금을 마침내 해지했습니다. 벌써 두 번째 해지입니다. 엊그제는 보험 하나를 해지했습니다. 3년 전 이사하면서 받은 주택담보 대출의 금리가 자꾸 올라서 가능한 한 상환해야 합니다. 암 보험 하나가 남아 있어 그런지 보험을 해지할 때는 그렇게 서운하지 않았는데 정기예금 통장에서 마그네틱 띠를 벗겨내는 걸 보자 몸의 기운이 쫙 빠집니다.

그깟 천만 원!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정연씨에겐 그게 희망이었습니다. 남편이 밉게 굴 때 “확 나가버릴까 보다” 하고 실행 못할 협박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돈이 있어서였고, 피부 관리를 받아 젊어졌다는 고교 동창을 만난 후 “나도 받으려면 받을 수 있지만 그냥 자연스럽게 늙을 거야”하고 여유를 부릴 수 있었던 것도 그 돈 덕택이었습니다.

3년 전, 여러 해 살던 집을 팔고 받은 돈에서 천만 원을 덜어내어 통장을 만들 땐 55세가 될 때까지 두었다가 옷도 사 입고 여행도 가야지 했었지만 요즘 들어 자꾸 마음을 흔드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 통장이 아니었다면 텔레비전 화면 왼쪽 꼭대기 060-으로 시작하는 기부 번호를 가끔이나마 누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일본이 교사들의 학습지도서에 독도 영유권을 명기했다는 보도를 보았다 해도 독도 지키기 운동에 돈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하진 못했을 겁니다.

잠을 설친 머리가 지끈지끈 합니다. 아침을 걸렀지만 배가 고픈 줄도 모르겠습니다. 정연씨는 목욕탕으로 들어가 빗을 집어 듭니다. 허리를 앞으로 굽히고 고개를 숙인 후 목덜미부터 이마를 향해 스윽 스윽 빗질을 합니다. 하나, 둘, 셋... 스물까지 센 후에 일어섭니다. 다음엔 이마 위로부터 목덜미 쪽으로 하나, 둘, 셋... 눈을 감고 빗질을 합니다. 숫자는 과거로 가는 암호입니다.

결혼 후 빚으로 얻은 코딱지만 한 셋방에서 3년을 살고 내 돈 반, 은행 돈 반으로 작은 아파트를 샀습니다. 빚을 다 갚을 때쯤엔 활동이 많아진 아이 둘 덕에 조금 너른 공간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아파트를 팔고 새 빚을 얻어 이사를 했습니다. 빚이 조금씩 줄어드는 동안 영원히 어릴 것 같던 아들들은 자꾸 자랐습니다. 사춘기로 접어든 아들들은 집보다 밖에서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고 남편 또한 친구들과 어울리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불혹의 언덕을 넘어서며 정연씨는 몸과 마음이 자꾸 가라앉는 것 같았습니다. 왜 이렇게 기운이 빠질까, 남은 인생을 마냥 이렇게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정연씨는 곰곰 생각했습니다.

결론은 빚이었습니다. 빚이 있는 동안은 게을러질 수도 없었고 무기력해질 수도 없었습니다. 빚은 어느새 빛이 되어 정연씨의 길을 비추었었나 봅니다. 아이들을 혼인시키려면 집이 좀 넓어야 한다고 정연씨는 그새 배 나온 남편을 설득했습니다. 살던 집을 팔고 빚을 내어 조금 큰 아파트를 장만했습니다. 남편은 호기로운 술자리를 줄였고 정연씨도 씀씀이를 줄여야 했지만 무기력증은 온데간데없이 되었습니다. 허리띠를 죄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집값은 늘 오르는 것이니 정 빚 갚기가 힘들면 집을 팔면 된다고 남편과 자신을 달랬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생각과 다르게 전개되었습니다. 대출 금리에 물가까지 자꾸 올라 생활은 갈수록 팍팍해지는데, 집값은 오히려 내려가고 다음 달부터는 이자만이 아니라 원금까지 상환해야 합니다. 대학 1년생인 큰 아들은 2학년을 마치고 가려던 군대를 1년 앞당겨 가겠다고 하고 재수중인 둘째는 가계를 생각해서 기숙학원을 그만두겠다고 합니다.

빗질이 너무 셌나 봅니다. 지끈거림은 멈췄지만 두피가 화끈화끈 합니다.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묶고 목욕탕을 나섭니다. 남편이 보다 둔 두 종류의 아침신문이 눈에 들어옵니다. 둘 중 어느 것을 끊어야 할까 생각하며 하나를 펼칩니다. 우리나라 가계부채가 640조에 달하며, 전체 은행 가계대출의 61퍼센트가 주택담보대출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이후 증권시장 침체로 개인 소유 주식과 펀드의 가치가 105조원이나 하락하여 가구당 평균 560만원의 손실을 보았다고 합니다. 또 다른 신문엔 미국의 가구당 부채가 11만 8천 달러에 달해 우리 돈으로 1억 원이 넘는다는 기사가 있습니다.

빚 때문에 고생하는 게 우리 집만은 아니구나, 정연씨는 슬며시 안도합니다.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납니다. 어머니는 배고픈 사람 많을 때 배부른 건 죄라고 했고, 결핍이 사람을 키운다고도 했습니다. 그래 어쩜 이 빚이 나를 키울지도 몰라, 정연씨는 난생 처음으로 일거리를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냉장고를 열고 주섬주섬 남편과 아들이 먹고 남긴 반찬을 꺼냅니다. 식은 밥 한 숟갈과 가지 나물을 씹으며 다시 신문을 펼쳐 듭니다.







필자소개



김흥숙


코리아타임스와 연합통신 기자, 주한 미국대사관 문화과 전문위원을 역임했으며,
코리아타임스에 "Random Walk"라는 제목의 칼럼을 연재중이다.
저서로 "그대를 부르고 나면 언제나 목이 마르고"와 "시선"이 있고,
김 태길의 "소설에 나타난 한국인의 가치관" 을 영역한 것을 비롯, 10여 권의 번역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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