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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핑 베토벤
꼭 보려고 마음먹었던 영화를 놓쳐 버렸습니다. 상영 기간이 너무 짧았던 탓입니다. 게을렀던 탓이기도 할 겁니다. 오늘쯤 예약이라도 해두고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더니 이미 어느 영화관에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카핑 베토벤(Copying Beethoven).’ 사실 클래식 음악을 주제로 한 영화가 크게 어필해 본 적이 없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요행 한 후배로부터 그 영화의 동영상 파일을 얻게 됐습니다. pc와 오디오를 연결해 놓고 혼자서 동영상을 돌렸습니다. 그 작은 모니터를 보면서도 벌떡이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한동안 숨을 몰아쉬었습니다. 아마도 영화관의 대형 스크린과 잘 짜인 오디오시스템으로 보고 들었다면 가슴이 터졌을 것 같습니다.
영화 자체가 예술적으로 썩 잘 된 것인지, 아닌지는 판별할 자신이 없습니다. 베토벤 소재의 영화는 거의 어김없이 그 영혼과 육신의 깊은 상처보다는 괴팍스러운 성격에 카메라를 들이댑니다. 그러니 늘 괴기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다뤄져 좀 억울하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시도 한 구절, 소설도 한 대목, 영화도 한 장면이 읽고 보는 이의 마음을 흔들곤 합니다. ‘카핑 베토벤’에서는 비엔나 숲 칼렌베르크 호수의 정경과 함께 어우러진 9번 교향곡(3악장)의 아름다운 선율이 가슴을 두들기듯 설레게 합니다.
바로 산책길에 나선 베토벤이 자연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입니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외따로 떨어진 고독한 인간. 그에게 자연은 유일한 벗이요 안식처입니다. 거기서 비로소 위안을 얻고 신과의 소통을 이룹니다.
베토벤은 자신의 악보 필사를 맡은 작곡가 지망생 안나 홀츠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공기의 떨림은 인간의 영혼에게 이야기하는 신의 숨결이야. 음악은 신의 언어야. 우리 음악가들은 신의 목소리를 들어. 신의 입술을 읽고 신의 자식들이 태어나게 하지. 신을 찬양하는 자식들을. 그게 음악가야, 안나 홀츠. 그렇게 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최초로 합창을 넣은 9번 교향곡의 초연 장면도 충분히 감동적입니다. 가공의 인물 안나 홀츠로 인해 다소 과장되긴 했지만. 여인은 영화에서 베토벤의 충실한 파트너로 임종까지 지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다지 면식도 없는 젊은 작곡가 한 사람만이 이 영웅의 마지막을 지켰을 뿐이라고 합니다.
인간애가 상실된 유럽사회를 한탄하며 위대한 심령을 가진 영웅 이야기를 쓰기로 작심한 로말 롤랑은 베토벤에게 이런 헌사를 했다지요.
“불행하고 가난하고 병들고 고독한 사람, 마치 고뇌로써 빚어진 것 같은 사람, 세상에서 기쁨을 거절당한 그 사람이 세상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자기의 불행으로써 만들어낸 환희! 그것은 인간의 정신이 싸워 얻은 가장 찬란한 승리다!”
롤랑이 의도한 대로 우리 범인(凡人)들이 베껴야 할 것은 물론 베토벤의 악보가 아니라 그 불굴의 의지일 것입니다. 권력에 아부하지 않고 꼿꼿이 자신의 정신을 지키는 용기일 것입니다.
산에 가기 좋은 때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겨울이 가장 좋고 그다음 가을, 봄 순이지만 여름 산 역시 베푸는 품이 넉넉합니다. 자연이 우리 사람에게 허락한 은혜이자 신이 주는 은총입니다.
인적 뜸한 산속 큼직한 나무 등걸에 기대어 하늘을 쳐다봅니다. 가지에 매달린 잎사귀들이 하늘을 가리고 있습니다. 더러는 홑잎으로, 더러는 무리지은 겹잎으로. 홑잎은 연초록을, 겹잎은 진초록을 만듭니다. 바람에 하늘거리며 연초록이 진초록으로, 진초록이 연초록으로 바뀝니다. 세상 아무 부러울 게 없는 행복한 시간입니다.
어느 결엔가 뻥 구멍이 뚫리고 파란 하늘이 쏟아집니다. 끝없이 투명한 하늘. 문득 저게 신의 얼굴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신이 왜 꼭 저렇게 높은 곳에 있으리라고 생각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눈을 감으면 자연의 소리가 또렷이 들립니다. 자연과 신비로운 교감이 이루어질 듯도 합니다. 오감 중 청각만큼 환상적인 감각도 없습니다. 귀 기울이면 이제껏 설었던 자신의 소리도 듣게 됩니다. 까맣게 잊고 지내던 자아가 말을 걸어옵니다.
일상에 붙들려 지내기엔 피곤하고 짜증나는 계절, 산과 들에서 자연과 인사를 나누고 잊고 있던 자아와의 대화도 나누고 자신을 충전하기 맞춤한 때입니다. 칼렌베르크 호숫가의 베토벤처럼 자연 속에서 안식과 평화를 찾고, 혹시 압니까. 베토벤도 듣지 못한 신의 목소리를 듣게 될는지.
필자소개
방석순
스포츠서울 편집국 체육부장, 부국장, 경영기획실장과 2002월드컵조직위원회 홍보실장을 역임했다. 여러 차례의 올림픽과 월드컵축구 등 세계적인 스포츠대회의 현장을 취재했고, 국제스포츠이벤트의 조직과 운영에도 참여하며 스포츠경기는 물론 스포츠마케팅과 미디어의 관계, 체육과 청소년 문제 등에 깊은 관심을 두고 이와 관련된 글들을 집필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