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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표 쓰고 싶을 때 -『역사 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
한 달 전 새 회사에 들어간 후배가 그새 사표를 쓰고 다른 회사를 알아본답니다. 비슷한 또래인 다른 친구도 2년간 다니던 회사를 나와 직장을 옮겼다고 전해왔습니다. 삼십대 중반이니 이제는 어디서든 자리를 단단히 잡고 경력을 쌓을 때인데 자꾸 직장을 옮기는 게 인생 선배로서 마음이 쓰입니다. 사람을 뽑는 입장에서는 이직이 잦은 친구는 아무래도 못 미더울 테니 말이지요. 이래저래 잘 관뒀다고도 못하고, 무조건 버티라고도 못하고, 싱숭생숭한 가운데 오래 전에 읽었던 책의 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나는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꺼렸다네. …나의 겁 많은 자존심과 존대한 수치심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걸세. 내가 구슬이 아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애써 노력해 닦으려고도 하지 않았고, 또 내가 구슬임을 어느 정도 믿었기 때문에 평범한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못했던 것이라네.”
나카지마 아쓰시(中島 敦)의 『역사 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이라는 소설집에 실린 「산월기(山月記)」라는 단편의 한 구절입니다. 여러 해 전 우연히 도서관에서 이 글을 읽다가 “겁 많은 자존심과 존대한 수치심”이란 구절에 한동안 아득해졌더랬습니다. 무언가를 하려니 자존심을 잃을까 겁이 나고, 독야청청하자니 세상이 알아주지 않음에 성이 나고… 딱 제 마음을 들킨 것 같아 뜨끔했지요. 그리고 어린애 같은 그 마음 때문에, 호랑이가 된 소설 속 시인처럼 저 또한 질투와 원망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 깨달음 덕에 뒤늦게 취직해서 착실하게 직장생활하며 목돈도 모았습니다만, 나카지마의 책이 없었더라면 진즉에 사표를 던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월급쟁이치고 사표 쓸 생각을 한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겁니다. 봉급이 적어서, 상사가 싫어서,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아서 등등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그 속에 담긴 마음은 하나지 싶습니다.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을 사람이 아니다, 우습게 보지마라’는 마음 말입니다. 근거가 있든 없든 그런 자부심 없이 어떻게 그 많은 일을 하고 그 많은 사람을 만나며 숱한 밤을 지새우고 쓴 소주를 마시겠습니까. 문제는 그 자부심을 흔드는 눈과 입이 너무 많다는 거지요. 그리하여 버티기가 힘들어지고 사표를 떠올리게 되는 거지요.
그러나 때론 버티는 데 온 생애를 걸어야 할 때도 있는 듯합니다. 나카지마의 책에는 「이능(李陵)」이라는 중편이 있습니다. 서른셋에 요절한 나카지마가 마지막까지 퇴고를 거듭했던 유작인데, 제게는 스스로를 버티기 힘든 이들에게 남긴 유언처럼 여겨집니다. 좀 쓸쓸하지만 가만 곱씹으면 위로도 되고 힘도 주는 유언 말이지요.
이능은 명장 이광(李廣)의 손자로 한 무제(漢武帝)의 신임을 받던 장수였습니다. 그러나 흉노와의 전투에서 패하고 포로가 되면서 그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억울한 사연이 있긴 했으나 한 나라의 장수로서 오랑캐의 포로가 된 그를 조국은 잔인하게 벌합니다. 사마천이 그를 변호하다 궁형을 당한 것이 바로 이때입니다.
이능과 함께 사마천 또한, 스스로에 대한 모든 자부를 잃었으나 그럼에도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사신으로 왔다가 흉노에 억류된 뒤 19년간 지조를 지킨 소무란 사내가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세 사람은 각각 다른 길을 걷습니다. 사마천은 수사(修史)에 남은 생을 걸고 치욕을 견디며, 소무는 조국에 충절을 다하면서 “어쩔 수 없다는” 변명 자체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능에게는 사마천이 받아들인 “숙명적 인연”도, 소무가 간직한 “순수한 조국애”도 없습니다. 그는 흉노인의 소박하고 진실된 삶을 부정하지 못하며, 조국의 매정함에 분노를 느낍니다. 하지만 자신의 선택을 변호하지도 못합니다. 말해보아야 푸념이 되어버릴 걸 알기에, 그는 금의환향하는 소무 앞에서 그저 춤을 출 뿐입니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이지요.
나카지마는 이 세 사람의 길을 담담히 그려갑니다.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 게, 웬만한 역사서보다 더 ‘술이부작(述而不作: 서술하되 꾸미지 않는다)’의 정신에 충실합니다. 하지만 이능의 이야기가 중심에 놓인 걸 보면 작가는 이능의 삶에 좀 더 관심이 있었던 듯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패자에 대한 단순한 연민일까요? 혹 세상의 눈을 의식하면서도 세상의 기준을 선뜻 따를 수 없는 사람들, 평범한 사람들의 고뇌에 마음이 쓰인 탓은 아닐까, 어쩐지 저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큰 포부가 있는 인생은 행복합니다. 하지만 때론 초라한 현실과 암암한 미래를 견뎌야 할 때도 있습니다. 불행은, 견뎌야 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견딜 수 없다는 절망에 있습니다. 그러니 “겁 많은 자존심과 존대한 수치심” 때문에 섣불리 절망을 말한 것은 아닌지, 견딜 수 없다고 소리치면서 정작 다른 이를 견딜 수 없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사표를 쓰기 전에 묵묵히 돌아볼 일입니다. 그러고서 새 출발을 결심했다면 누가 뭐라든 자신의 길을 가기 바랍니다. 삶에 정답은 없으니까 말이지요.
필자소개
김이경
"취미로 시작한 책읽기가 직업이 되어 출판사 편집주간으로 일했고,
지금은 프리랜서로 책을 읽고 쓰고 기획하는 일을 하고 있다.
시립도서관에서 독서회를 11년째 지도 중이며, [청소년을 위한 삼국유사][인사동 가는 길]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