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레의 시민
조각가 로댕의 유명한 작품 중에는 ‘칼레의 시민’이 있습니다. 19세기 칼레시의 위촉을 받고 제작한 이 조상(彫像)은 등신대의 나이 든 남자 여섯 명이 무엇인가 심각한 표정을 한 채 몰려 서 있는 모습입니다.
통합민주당 박 재승 공천심사위원장이 손 학규 박 상천 대표, 정 동영 강 금실 전 장관 등 당내 실력자들에게 4월 총선에서 수도권에 출마하도록 압박하고 있다고 합니다. “칼레의 시민처럼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라”는 촉구와 함께.
칼레의 시민 조각상에는 절대절명의 절박한 사연이 담겨 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 왕실은 11세기 이후 늘 영토 다툼을 벌여 왔습니다. 특히 모직물공업이 발달한 프랑스 북부 플랑드르 지방은 양국의 이해가 엇갈려 충돌이 잦았습니다.
14세기 이 지방에 내란이 일어나자 두 나라 사이에 드디어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백년 전쟁(1339-1453)입니다.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전쟁 초기 단연 우세를 점했으나 잔 다르크의 출현 이후 전세가 역전되어, 영국은 플랑드르의 중심 도시인 칼레시 이외의 프랑스 안 영토를 모두 잃고 전쟁은 끝났습니다.
이 전쟁 초기인 1347년 칼레시는 영국군에 포위된 채 시민들은 끝까지 저항 하였습니다. 하지만 중과부적의 상황에서 항복 교섭을 벌였습니다. 에드워드 3세의 항복 조건은 매우 가혹 했습니다. 칼레 시민들은 그의 조건을 모두 수락했습니다.
칼레시의 ‘유력한’ 시민 여섯 명이 머리를 빡빡 깎고 목에는 밧줄을 감은 채, 시의 중요한 모든 열쇠를 가지고 맨발로 영국 왕 앞에 출두하라는 것입니다. 혹독한 항복 조건 이면에는 예부터 도버해협의 해적 근거지였던 칼레 근해에서 영국 상선들이 가끔 약탈을 당한 과거가 깔려 있었습니다.
칼레시는 도시의 운명을 구할 자발적인 희생자를 모집 하였습니다. 돈 많은 상인과 법률가들이 앞장서 나섰습니다. 몸을 바쳐 동포를 살육에서 구하러 나선 여섯 명의 유력자들은 의연한 자세로 적진을 향해 걸어 갔습니다. 흔히 말하는 살신성인의 각오를 한 것입니다.
에드워드 3세는 이들 여섯 명을 처형할 생각이었으나, 소문을 들은 왕비가 간절히 말려 구명이 되었다고 합니다. 1914년에 발표된 독일 극작가 게오르그 카이저의 희곡에는 처형 직전 영국 왕이 진중(陣中)에서 왕자가 탄생하자 그들의 희생을 면제해 주었다고도 합니다.
살 길만 찾다 보면 죽고, 죽음을 각오하면 살 길이 열린다고 합니다. 전쟁은 물론 정치 외교경영 입시 바둑에 까지도 적용되는 말입니다. 말은 쉽지만 실행하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명예와 부 그리고 생명까지 걸어야 하는 결단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선거전에도 과연 목숨을 던지는 결단이 통하게 될까요. 전쟁은 지략과 힘이 가장 큰 변수지만 ‘피를 흘리지 않는 전쟁’인 정치판에서 선거는 유권자의 선택에 따라 승부가 엇갈리게 됩니다. 얼핏 사생 결단과 선거와는 무관하게 보입니다.
칼레의 여섯 시민은 목숨을 구하고도 700년 가까이 국민의 추앙을 받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왕권을 지킨 잔 다르크는 비록 이단으로 몰려 화형을 당했지만, 뒷날 ‘오를레앙의 성녀’로 불리는 성자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생사를 떠나 도시와 나라를 구한 고고한 정신에 대한 평가 입니다.
총선이 한 달 앞으로 다가 왔습니다. 상대방 물어 뜯기에 혈안이 되는 선거판에 익숙해진 우리나라의 여 야 유력자들에게 칼레 시민과 같은 애국심을 기대할 수 있을 지는 두고 볼 일 입니다. 다만 명리를 얻고 명정(銘旌)이라도 장식하려고 벌이는 이판사판 선거는 없어졌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