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추(晩秋)의 단상
만추의 계절입니다. '만추'하면 이만희 감독과 문정숙 주연의 영화가 생각납니다. 큰 눈망울과 우수(憂愁), 바바리코트. 가석방된 여죄수가 낙엽이 딩구는 공원 벤치에서 오지 않는 남자를 기다리죠. 내용은 이제 가물가물한데 우리나라 영화사에 남을 대표작의 하나랍니다.
만추는 아파트 단지에도 어김없이 찾아왔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보면 큰 플라타너스 낙엽이 문득 얼굴을 스치며 떨어졌습니다. 아파트 경비원들에겐 큰 일거리입니다. 새벽부터 낙엽을 쓸어모으느라 바쁜 비질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그냥 놓아두면 하수구를 막기 때문에 쓸어 담아야 한다고 합니다.
성남시의 청계산이나 인천시 문학산의 등산로에도 낙엽이 수북히 쌓였습니다. 낙엽들은 인간의 거친 발길로 덧난 상처를 보듬듯이 품고 있습니다. 길이었던 곳일수록 낙엽은 더 많이 쌓여있습니다.
낙엽 하면 떠오르는 것은 이브 몽땅이 부른 샹송 '고엽(les feuilles mortes)', 차중광이 부른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입니다. 모두 별리의 슬픔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고엽'은 프랑스감독 마르셀 카르네가 1946년 만든 '밤의 문'이라는 흑백 영화에 등장하는 노래입니다, 영화 속에서 몽땅이 직접 부르지요. “삭풍은 망각이라는 차디찬 밤 속으로 추억과 회한들을 가져가 버렸지.… 인생은 소리 없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갈라놓았고 바다는 모래 위에 헤어진 연인들의 발자국을 지워버렸어….” 그런 대목이 나옵니다. 자크 프레베르의 시입니다.
가을이면 으레 에프엠 방송에서 들을 수 있던 이 노래도 올드 팬들의 신청이 없는지 올해는 듣지 못하던 차 병원 물리치료실에서 피아노와 칼 연주로 들었습니다. 유튜브(youtube) 닷컴에서 고엽의 다운로드 수는 보첼리가 높지만 그의 노래는 팝송화되어 샹송보다 서정성이 많이 감쇄된 느낌을 받습니다.
이런 늦가을 타령은 사실 음풍농월(吟風弄月)입니다. 늦가을이 되면 서글퍼지는 사람들이 늘어납니다. 무엇보다 처량한 게 추운 겨울을 나야하는 서민들입니다. 정치인들이 선거철이 되자 입으로 아무리 행복을 외쳐도 추운 겨울이 쉽게 따뜻해지지는 않습니다.
며칠 전 싼타페 차에 경유를 넣는데 1리터에 1,399원이었습니다. 처음 차를 사서 탈 때는 600원 선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정말 5년만에 살인적으로 치솟았습니다. 그런데 고유가 대책이랍시고 세금은 등유와 LPG 등 난방연료를 고작 몇 십원 내리는 알량한 정부입니다. 세계에 유례없는 고유가 세금인데도 "유가 오른다고 세금 내려 대처하는 나라는 없다"고 강변하고 있지요. 그런 나라들은 우리나라같이 기름 값이 적정수준이니 내릴 필요가 없겠지요. 장관들이 자기 돈으로 기름 넣은 차를 타고 다니겠습니까. 차가 아무리 막혀도 다 국민들이 세금으로 내주니 기름 값 걱정 안 하는 검정색 대형차를 타고 거들먹거리니 민생고를 알 턱이 없지요. 대형차부터 소형화하여 기름 절약에 모범을 보이시죠.
국가가 주는 행복의 원천은 세금입니다. 얼마 전 부하에게 상납 받은 혐의로 현직 국세청장이 구속되는 사상 초유의 일이 터졌습니다. 대선을 앞두고 반부패연대라는 것도 생겼는데 옛 부패는 반부패연대가 파헤친다 치고 새 부패는 어떤 반부패연대가 고칠지 걱정입니다.
12월19일은 대통령선거일이고 내년 봄엔 총선거가 있습니다. 선거는 가장 일을 많이 해야할 심부름꾼, 공복(civil servant)을 뽑는 것입니다. 그러니 요즘 후보마다 점퍼를 입고 마치 바닥이라도 길 것 같은 저자세로 저자거리를 누비고 있고 대통령 아닌 '중통령'이 되겠다는 사람까지 등장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표를 구걸하기 위해 입으로 "민생, 민생"외치지만 고유가 세금인하는 왜 이렇게 힘든가요. 세금 매기는 것, 본질적으론 정부 일이 아닙니다. 세법은 국회가 만드니 국회가 고치면 됩니다. 입 따로, 행동 따로 노는 사람들을 국민들이 세금으로 월급 주면서 뽑아줄 이유가 없습니다. 주권자들이여, 입으로 정치하는 자들은 추풍낙엽으로 만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