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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삼장군 유물전시 통해 250년만의 세상나들이..
  • 뉴스관리자
  • 등록 2007-11-13 19: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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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엽 영조조 훈련대장,포도대장 한성판윤[오늘의 서울시장급] 공조판서 병조판서[오늘의 국방장관급]를 역임한 문무겸전의 명신 이삼장군[1677-1735]의 유물전시회가 11월13일 오후2시 논산시 부적면 군사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개막기념식을 가졌다,

오는 12월 12일까지 전시될 이삼장군 유물전시회 개막 기념식에는 임성규 논산시장 송영철 충남도의원 김헌익 상월면장 이상진 부적면장 한찬동 계백장군 유적지관리소장,유병훈 전 관리소장 류제협 논산시 향토사 연구위원 등 내빈과 함평이씨 문중의 11대종손인 이신행 이계천[논산시의원]이기범[논산시 새마을운동지회장]씨를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참여한 함평이씨 문중과 시민 500여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이날 개막 기념식에서 임성규 논산시장은 함평이씨 함은군파 11대 종손인 이신행씨에 대한 감사패증정에 이은 축사를 통해

조선조 숙종과 영조 양대에 걸친 걸출한 무인이요 명신인 이삼장군을 재조명하는 특별전시회를 위해 유물과 자료전시에 협조해준 이신행종손 학계인사들의 노고에 사의를 표하고

계백장군의 무용과 명재윤증선생의 학문을 계승한 문무겸전의 이삼장군이 오늘 특별전을 계기로 논산을 대표하는 역사적 인물로 새롭게 선양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이날 임성규 시장으로부터 감사패를 수여받은 함평이씨 함은군파 11대 종손 이신행씨는 인삿말을 통해 오늘 전시회는 임성규시장의 관심과 군사박물관 관계자들의 뜨거운 열정의 소산이라고 말하고 이번 특별전을 계기로 함은군 이삼 장군에 대한 사상과 행적에 대한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신행씨는 또 자신의 선대 조상인 함은군 이삼장군의 유물중 "관서절요"등 많은 기록이나 유물들이 전시되지않은데 대해 아쉬움을 토로하고 이러한 기록이나 유물들의 귀향이 이루어지는날 제2의 특별전이 이루어질것을 기대한다며 이에 대해 문중은 물론 논산시가 적극 적인 노력을 기울여줄것을 부탁하기도 했다,
 
이날 기념식에서 내빈을 대표해 치사에 나선 송영철 충남도의원은 논산시 관내의 유명문중에서 소장하고 있는 유물과 유품들 중에는 국보급이나 보물급에 버금하는 명품들이 적지않은데도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있음은 아쉬운일이라고 말하고 효성이 지극하고 시문에 능했으며 기개높은 충정으로 후인의 귀감이 되기에 족한 이삼장군의 이번 유품 특별전을 계기로 각문중이나 개인들이 소장하고 있는 문화재급 유물들이 각급전시회 등을 통해 뛰어난 선현들의 업적이 재조명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개막기념식 에서는 함평이씨 문중으로 백제군사박물관 자문위원인 이예범씨와 국립민속박물관 이문현 연구원이 각각 "이삼장군의 생애와 업적"과 "이삼장군의 유물을 통해본 조선의 공신[功臣]을 주제로 강론을 펼쳤다,

오는 12월 12일까지 특별전시실에서 전시되는 이삼장군 유품으로는 언월도,철퇴 등 이삼장군이 즐겨쓰던 무기류와 영조대왕이 이삼장군에게 하사한 교지를 비롯한 어제 어필등 총 53건에 89점에 달한다,
 
이번 이삼장군의 유물전시회는 군사박물관의 전임 유병훈 소장 재임당시부터 기획된것으로 신임 한찬동 소장부임이후 임성규 시장의 적극적인 노력과 군사박물관 관계자들의 끊임없는 설득에 함평이씨문중이 문중 회의를 거쳐 전시회를 가지게 된것으로 알려졌고 함평이씨 문중의 일원으로 논산시 새마을 운동 지회장을 맡고 있는 이기범 회장의 역할이 컸던것으로 전해졌다
 
계룡산이 낳은 이조명장
이삼(李森) 장군의 생애를 찾아서


조선 중기에 전라좌수사, 포도대장, 훈련대장, 병조판서, 한성판윤 등을 역임한 이삼(李森) 장군은 계룡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나 명성을 날린 당대의 명장이다.

계룡산의 연천봉과 천황봉, 국사봉이 병풍처럼 펼쳐저 있는 서쪽으로 백제시대의 군사거점인 노성산성(魯城山城)이 우뚝 솟아있고 그 산아래 노성천 건너 주곡마을은 이조명장의 역사를 간직한 채 고요속에 잠겨있다.

태고의 역사를 간직한 우국충절의 마을, 그 깊은 산으로 둘러 쌓인 동네 입구에 들어서면 성황당이 버티고, 이곳을 지나면 조용한 시골마을에 고색창연한 이삼 장군의 생가(충남지방문화재 제7호)가 한눈에 들어온다. 수백년 묵은 낙낙장송과 높은 참나무가 그 옛날 용맹을 떨쳤던 무장(武將)의 기개를 보여주는 듯 우람하게도 장군의 생가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고, 말고삐를 맸던 은행나무가 문간을 지키고 서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백일헌(白日軒)(주) 이삼 장군의 업적을 곳곳에서 칭송하고 있고 임금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은 훌륭한 무인으로 기록되고 있다.

조선조 어느 장군보다도 뛰어난 용맹과 지략, 그리고 군왕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준 이삼 장군의 생애를 돌이켜보면서 선조들이 남긴 나라사랑 정신과 위대한 무인(武人)의 길을 귀감으로 삼고자 한다.
 
가계(家系)의 명장들


이삼은 그의 부친인 함평군(咸平君) 이사길(李師吉)과 모친인 정경부인 남양 전씨(南陽全氏) 사이에서 1677년(숙종 30년) 정월 6일에 충청도 논산땅인 이산(泥山) 주곡(酒谷)(現 논산시 상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났다.

이삼 장군의 가계는 5대조 이상이 무인(武人)이었고 5대조부터 부친대까지는 문신(文臣)이었다

일찍이 이삼 장군의 8대조인 이량(李良)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2년전(1490년) 전라 좌수사로서 왜구들의 노략질과 침공을 저지하기 위하여 여수 앞바다(돌산읍 우두리 백초 사이)의 바닷물을 돌로 메워 수중제방을 구축하였다. 1492년, 이량 장군은 해안에 군사들을 잠복시켜 놓고 왜선이 썰물때에 수중제방에 걸려 좌초되면 활을 쏘면서 쇠가죽으로 선체를 덮은 박치기 배를 타고 나아가 왜선들을 파괴하고 왜구들을 모조리 전멸시킨 명장이다.


이량 장군의 업적을 기린 방왜축제비(防倭築堤碑) 비문에는 수중제방 구축과 박치기 싸움배(戰船)인 “몽, 충(浙, 馴)으로 왜선들을 격파한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몽, 충은 당시 전술과 선체의 구조로 볼 때 100여년 후 이순신 장군이 건조한 거북선의 전신인 셈이다. 최초의 방왜축제비(1643년)는 현재 여수시 중앙동 장군도(將軍島)에 위치하고 있고, 1710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인 이삼 장군이 다시 세워 현재 여수 진남관(鎭南館)유적지에 이삼 장군의 공덕비와 함께 나란히 서있다.


또한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5년전(1587년), 이삼 장군의 선조인 녹도만호(鹿島萬戶) 이대원(李大源) 장군은 남해 일대에서 노략질을 일삼는 왜구들을 소탕하였다. 이대원 장군이 여수 앞 손죽도(甄竹島)일대에서 왜선 10여척과 수백명의 왜구들을 전멸시키자 조정에서는 이대원 장군의 공을 치하하고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하는 교지(敎旨)를 내려보내게 되었다.

이 무렵 다시 많은 왜선들이 몰려오자 이장군은 옷에 혈서를 써서 집으로 보낸 다음 싸움터로 나갔으나 중과부적으로 왜군에게 포로로 잡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대원 장군은 왜구들에게 칼과 창으로 난자당하고 톱으로 온몸이 썰려나가도록 항복하지 않은 백절불굴의 명장이었다.



이대원 장군의 순직으로 수군절도사에 봉직되지는 못했으나 후일 조정에서는 충열공(忠烈公), 병조판서로 추대하고 고향인 경기도에 사당과 공덕비를 세웠다.

현재 경기도 평택시에 사당과 장군상이 있고 묘소는 경기도 기념물 제56호이다.
 
젊은 무인(武人) 이삼


계룡산 아래 노성(魯城), 주곡(酒谷)마을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이삼(이원백)은 당대의 유학자 명재(明齋) 윤증(尹拯) 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명재 선생이 늘 친자식처럼 원백(遠伯)을 끼고 다니며 학문과 도량을 가르키던 중, 원백이 12살 되던 해, 그가 지은 몇 구절의 시는 명재 선생를 놀라게 하였다.



대풍기천중(大風起天中) 큰 바람이 하늘 가운데서 일어나고

낙엽만공산(落葉滿空山) 낙엽은 공산에 가득하네

월여장솔성(月如將率星) 달은 마치 장군이 별을 통솔함과 같고

성여병위월(星如兵衛月) 별은 병사가 달을 호위함과 같도다


명재 선생은 이를 크게 칭찬한 뒤 장군과 재상의 기상이 있다 하며, 당나라 사람이 쓴 시(詩) 중에 병졸들이 산림처럼 여러겹으로 호위한다는 뜻과 같으니 비로소 이름을 삼(森)이라고 부르게 하였다.


청년 이삼은 무인의 가계를 이어받은 후손으로서 학문과 무예 연마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힘이 장사인지라 큰칼 쓰기는 물론 활쏘기, 말타기에 따를 자가 없었고, 주곡마을 앞 개울에는 이삼의 입신출세(立身出世)를 위하여 부인 유(柳)씨와 동네 청년들이 거대한 암석을 손으로 운반하여 돌다리를 놓기도 했다.

이삼은 병조판서 김구(金構)가 왕에게 무관으로 추천하여 당시 극심한 사색당파싸움의 와중에서도 충성을 다하라 하여 선전관(宣傳官)의 직함을 내려주게 되었다.

1703년(숙종29년) 이삼이 27세 되던 해, 숙종임금은 대신들의 문약함을 크게 우려하면서 무관들의 무예를 직접 시험하여 장원을 가려 뽑고자 하였다.

그해 2월 그믐날, 21명의 선전관 중에서 임금의 특명을 받은 이삼은 활쏘기(柳葉箭)에서 수석을 차지하였다. 그러자 왕은 다시 이삼에게 명하기를, “그대는 무예가 비범하여 기사술(騎射術, 말을 타고 달리며 활을 쏘는 무술)에 능하다고 들었는데 실제 그러하면 지체하지 말고 행하라!”고 하였다

이삼이 어전에서 머리를 조아리면서 “신의 무예가 보잘 것 없사오나 말을 타고 달리며 활을 쏘아도 더하거나 덜함이 없사옵니다” 고 대답하자 그 즉시 어전의 마굿간에서 제일 큰 숫말을 대령하였다. 이어서 이삼은 말을 타고 달리며 다섯개의 화살을 날리니 그 모두가 적중하였고 그중 한발은 튕겨 나왔다. 숙종임금은 놀라운 재주를 가진 이삼을 크게 칭찬하면서 이삼에게 무과 장원급제(武科 壯元及第)를 선포하고, 종일토록 피리를 불며 궐내의 모든 사람들에게 장원급제의 축성을 외치라고 명하였다.

이어서 숙종임금은 장원급제자에게 장난으로, 연못으로 들어가 게 잡는 형상을 취해보라 명하였다. 이삼이 못에 뛰어들어 흙탕물 속에서 해가 질때까지 바닥을 기자 의관과 몰골이 추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자 임금은 이삼을 가까이 부른다음 허리에 칼을 차게 하고 손에는 채찍을 들도록 한 후 그 무인의 모습을 본 두 왕자들에게 큰 가르침을 하교하였다

“무릇 왕이 국정을 맡기는 신하에게는 이렇게 한 연후에야 비로소 쓸 수 있는 법이니라”

이어서 임금은 이삼에게 한주발의 향차(인삼 끓인물과 유자)를 내리시며 다시 하교하기를 “문신은 문장과 필묵으로써 취해 쓰고, 무신은 무예로 쓰니 그 뜻은 우연이 아니다. 근래 문신은 조용하고 무신은 편안하게 쉬기를 좋아하는 습관이 배어, 한번 병사를 거느리면 명령만 지키고 무술을 오로지 폐하니 내가 진실로 슬퍼 탄식하노라. 그러나 그대는 급제하여서 나태하지 말고 삼가 무예를 더욱 익혀서 관직을 맡아 그 직분을 다하여라!”고 당부하였다.

임금은 여러 선전관들에게도 상을 차려주고 술을 하사한 다음 등수를 나누어 시상하고 특히 이삼에게는 은잔에 향은주 석잔을 따라주며 큰 표범가죽 한벌을 하사하였다.

이삼은 장원급제 이후 관직에 올라 임금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아가면서 승승장구를 누렸다. 언제나 장군의 자태는 단아하고 두 눈이 빛났으며 옷은 검소하여 다소 야윈듯함이 서생(書生) 같았으나 가슴에는 만가지 무예와 재주를 감추고 있는 외유내강의 무인이었다. 이삼 장군은 기름진 국을 먹으면 살이 찌고 살이 찌면 용맹할 수 없다하여 결코 이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한번 기(氣)가 솟구치면 힘을 감출 수 없어 눈썹언저리를 상하로 움직여 주름을 지었다. 매번 말고삐를 잡고 진영에 나서면 양어깨가 우뚝 솟아나는 것 같아 보는 사람들이 두려워 하였다.

한가하게 있을 때는 자상하고 온화하게 사람을 대하고 공사를 처리함에 있어서는 사사로움에 꺾이지 않고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칼로써 자른 듯 하였다. 그리하여 장군을 모함하거나 시샘하는 관리들이 많았으나 이삼 장군은 매사를 공손히 깨닫고 민첩하게 통달하니 그를 함부로 속일 수 없었다.

1707년(숙종33년)에 창원부사로 부임하여 검소하게 생활하며 명민하게 다스리자 암행어사가 조정에 장군의 치적(治績)을 올렸으며 백성들은 사당을 지어 그 공을 축원하였다

1709년(숙종35년)에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로 제수되었을 때 간교하게 부정을 저지른 부장(副將)을 적발하여 그 죄를 엄히 묻고 극형으로 다스렸다. 그러자 그의 아들이 앙심을 품고 장군의 침소에 칼을 들고 침범하여 야밤에 칼싸움이 벌어졌다. 그러나 무공이 뛰어난 장군의 칼날 앞에 자객이 넘어지자 이삼 장군은 큰소리로 꾸짖었다.

“내가 단칼로써 너를 베어버려야 마땅하나 이미 아비를 죽였으니 또 그 자식을 죽이는 것은 차마 못하여 너를 용서하니 이는 아비의 마음이다. 너의 아비는 죄로 인하여 죽었는데 너는 어찌하여 사사로이 나를 원수로 대하느냐?”

이말에 감복한 자객은 돌로 칼을 부러뜨리고 복수의 마음을 거두기로 맹세한 다음, 이삼 장군의 휘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청렴결백한 선비


이삼 장군은 효성이 지극하였지만 평소 모친을 부양하지 못하고 있는 점을 매우 애통해 했다. 모친 생일과 집안에 어려운 일을 당할 때는 눈물을 흘리며 가슴 아파하였고, 나가면 대장군의 면모를 갖추었으나 집안에 들어가서는 모친 앞에 어린아이같이 재롱을 떨며 마음을 즐겁게 하였다.

녹봉(祿俸)은 반드시 모친과 누이들에게 먼저 보내 그들이 필요한 것을 다 가진 다음에야 처자에게 주었다. 내외 친척 중 가난한 자는 장군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집 앞에는 불쌍한 백성들이 밤마다 횃불을 들고 수십명씩 장군을 기다리기도 했다. 혼인이나 상을 당한 자 중에서 의식을 치르지 못한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녹봉을 털어 도와주었다.

일찍이 명재(明齋) 선생으로부터 유학을 공부한 장군의 지극정성은 투구 쓴 병사나 서민 백성들을 가리지 않고 언제나 깊은 예(禮)로써 이루어졌다.

자제를 가르침에 있어서도 조용히 타이르고 지나치지 않아 말을 빨리한다던가 얼굴색이 변하지 않았다. 집안에서는 유교(儒敎)의 예로써 사랑하고 엄숙함으로 화합하여 자제들도 검소하고 쾌락에 물들지 않았다.

이삼 장군은 오랫동안 육조판서에 올라 임금의 총애를 받았다. 그렇지만 그만큼 온갖 시기와 망극한 참소를 많이 당하기도 하였다. 장군의 모습은 겉으로는 동요하지 않고 편안했을지라도 하루라도 마음이 편할 날이 없었으며 언제나 가슴앓이를 했고 가끔씩 병색이 완연했다. 그 때문에 조정의 중요한 벼슬에 오를 때마다 사양하기를 거듭했으나 임금은 친히 수라간에서 만든 탕과 보약을 내리며 장군을 만류하였다.

이삼 장군이 병을 앓고 있을 때 부장들이 문안을 올리자 장군을 이르기를

“나의 기력이 매우 왕성해서 세상의 시기를 심하게 받은 것 같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매사를 삼가고, 하고자 하는 말이 있어도 하지 않았으며, 베풀고자 하는 일이 있어도 베풀 수 없었다. 이 때문에 가슴이 항상 답답하고 마음이 편하지 못하여 이 병에 걸린 듯 하다. 나의 기질을 바로잡고 병을 회복하는 것은 유학(儒學)을 섬기는 것 뿐이다. 그러나 지금 내가 평민으로 생을 마친다고 해도 어찌 이 병을 물리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탄식을 금치 못했다.

이삼 장군은 이 무렵 심한 심장병을 앓고 있는 것이 분명했으며 건강에 큰 재앙이 다가온 것이다.

이삼 장군은 휴가를 청한 후 자택에서 가료하다가 1735년 정월, 조용히 59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쳤다.

죽음에 임박하여서도 집안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도 하지 않은 채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했음을 한탄하였다.

영조(英祖) 임금은 이삼 장군의 죽음을 애도하며 장문의 애사와 함께 부의와 노역자, 석회등을 보냈다. 그리고 발인때에는 각 고을마다 조석으로 제수를 준비하라고 명했다.

많은 백성들도 장군의 영전에서 조문하면서 “그 용맹은 표범같고 기상이 송골매같은 훌륭한 장군이었다. 이제 나라와 백성들은 어찌해야 할 것인가?”라고 하며 슬퍼하였다.

영조임금은 이삼 장군을 좌찬성 함은부원군(左贊成咸恩府院君)으로 추대하며 예관을 보내 제를 올렸다. 그리고 계룡산 아래 명당자리인 공주(公州) 가좌동 (現 논산시 상월면 석종리 가재울마을)에 평생을 그리던 부인 유씨와 합장하여 유택(幽宅)을 마련하게 하였다.

장군이 타계한 후에도 영조임금은 몹시 애통해 하며 그 유족들에게 말, 달력, 부채, 산초, 유자, 귤 등을 하사하며 슬픈 마음을 달랬다.

조선왕조 역대 무인(武人)의 가계에서 태어난 이삼 장군은 임금에 대한 충성심과 장수로서의 기품을 간직한 당대의 명장이었다. 문무를 겸비한 무장으로서 군사지략과 무예, 군법, 군제에 조예가 깊었으며 군선과 무기의 제작에도 뛰어난 기술을 가졌다. 당파싸움의 혼란 속에서도 무인의 길을 지키며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였고 백성을 사랑하는 장군의 품성은 모든 이들의 칭송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청렴결백한 장군의 품성은 타계했을 때에도 수의(壽衣)와 관(棺)이 없어 조정에서 이를 마련해 주었다.

이삼 장군은 유학(儒學)과 한시(漢詩)에도 능해 많은 문학작품을 후손들에게 남겼을 뿐만 아니라 우국충절(憂國忠節)의 정신적 유산과 그 선비정신은 오늘날까지 충청인들의 자랑으로 길이 남아있다.
 
문무를 겸비한 무장(武將)


이삼 장군은 장원급제 후 문무관직 21년 기간 중 무관직 27회, 문관직 15회 문무도합 42직책을 역임하였다.

20대 장원급제, 창방, 태정훈련주부
30대 훈련부정, 창원부사, 장단부사, 전라좌수사, 총융중군, 영남좌변사, 어영별장, 정주목사, 평안병사 등
40대 양주목사, 함경도 병마절도사, 남병사, 금군별장, 수원부사, 우포도대장, 충청병사, 형조참판, 어영대장, 총융사, 등
50대 훈련대장, 좌포도대장, 훈련대장, 병조판서, 공조판서, 한성판윤, 능성부수, 특진관 등

이삼 장군이 46세가 되는 1721년(경종1년), 포도대장으로 제수되어 영남, 함안 등지에서 양민을 괴롭히는 30여명의 도적떼를 야간잠복 끝에 일망타진하였다.

1725년(영조1년)에 이삼 장군이 간신배들의 모략으로 투옥되었을 때 영조임금은 친히 의금부(義禁府)에 와서 장군의 건강을 위로하였다. 그리고 그해 11월에 영남 곤양으로 유배를 떠나자 많은 사람들이 술과 과일을 전하며 가마를 부축하기도 했다.

그러나 2년 후 이삼 장군의 무고함이 밝혀지자 곤양에서 다시 훈련대장으로 제수되었다.

1728년 3월에 이인좌(李麟佐)의 역모반란이 일어나 역도들이 관아를 습격하고 한양으로 몰려들자 이삼 장군은 그 괴수 세룡(世龍)을 체포하였다. 그리고 역도들의 본거지로 출정하고자 하나 영조임금이 종묘사직과 대궐을 호위하라고 명했다. 이삼 장군은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고 충성을 다하기 위하여 몸소 부하를 이끌고 궁궐 주변에 진을 쳤다.

장군은 주야로 갑옷을 벗지 않았으며 부하들이 잠자기 전에 눈을 감은 적이 없었다. 병졸들을 위로하고 임금의 뜻을 널리 알렸다. 그리고 한사람의 병사라도 병이 나서 춥다고 소리치면 입은 옷을 벗어 주었으며 옷을 입은 병졸들은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영조임금이 돈화문에서 군대의 훈련을 친히 참관할 때 정연한 군사들의 모습을 보고 크게 만족하여 “이삼 장군은 과연 나의 훌륭한 장수” 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왕이 대궐밖으로 행차했을 때 군사훈련광경을 구경하고자 모인 백성들이 눈에 띄지 않자 이는 역도들의 난리를 겪으면서 백성들의 마음이 흩어졌노라고 하며 가슴아파하였다. 그러자 이삼은 “오늘 훈련은 평상시와는 달라 괴수의 머리를 받치는 날이므로 신이 함부로 구경하는 것을 금지했습니다”고 아뢰니 임금이 다시 크게 만족하였다.

군사들의 야외훈련은 기마병이 여러명의 보병들을 추격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사방에서 마병(馬兵)이 돌격하니 먼지가 눈을 가리고 말울음이 하늘에 진동하였다. 이때 한 마병이 실수로 말에서 떨어지자 임금은 그 병졸이 어느 부의 병사인지 아느냐고 장군에게 물었다. 이에 장군은 “모부(某部) 모대(某隊)의 몇번 마병인 것 같습니다” 라고 대답한 즉 임금이 병사를 가까이 오라하여 물어본 결과 과연 그대로였다.

영조임금이 기뻐하며 장군에게 그 연유를 묻자 그것은 부대를 구분하는 깃발의 색으로서 알 수 있다고 대답하였다. 기마병이 맹렬히 달리면 먼지와 모래가 일어나고 대오(隊伍)가 서로 뒤섞여 비록 깃발이 있다 하더라도 서로 얽혀 혼잡했지만 이삼 장군은 잘 분별하였다.

부대를 구분하고 병력을 분배하는 이치가 분명했으며 훈련중에는 부하들도 잡담을 하지 않았고 전술연마에만 몰두하였다.

이삼 장군은 일찍이 “삼천병사가 항상 눈앞에 환해야 한다” 고 훈계하였다. 부장(副將)들이 “장군의 재주가 단지 삼천병사를 통솔하는 것입니까?” 하고 물으면 장군은 웃으면서 “삼백명으로서 중군(中軍)을 장악하고 이천 사백명으로서 8문(八門)을 벌여놓고, 삼백명은 쉬도록 해야한다. 그러면 나라를 지키고 외적을 물리칠 수 있다. 이러한 전술의 이치는 비록 십만, 백만의 병사라 할지라도 같은 법이다” 라고 하면서 부하들을 가르쳤다. 즉 이삼 장군의 기묘한 전술은 소수의 병력으로 적을 유인해 중앙부로 끌어들인 다음 주력부대가 사방에서 포위공격을 하며, 강력한 예비대까지 갖추어 놓은 빈틈없는 전술이었다.

이삼 장군은 병법(兵法)과 지리(地理)를 잘 알았다. 변방에 있을 때는 산세가 험준한 곳마다 올라 원근과 넓이를 시험해보고 지형과 도로를 살폈으며 또한 고갯길을 다스리고 성곽의 불비한 곳을 보강하였다. 장군은 무기의 제조방법과 칼, 창의 무술에 대해서도 통달하였고 이러한 모든 지략을 가르치고 후대에 전하기 위하여 관서절요(關西節要)를 지어 남겼다.

이삼 장군의 무예는 당대에 대적할만한 인물이 없었다. 이삼 장군이 연마한 이른바 “백원술(白猿術)”에 대하여 “이법(法)을 사용하는데 법도가 있으니 법을 알지 못하면 사용할 수 없고 장수인 자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그러나 손을 나는 듯이 재빠르게 사용하는 사람을 보지 못해 이법을 전할 수 없는 것이 한스럽다”고 토로하였다.

이삼 장군은 대들보에 볏짚을 수천개씩 묶어 매달아 놓고 검을 뽑아 잡고 노려보며 순식간에 휘두르면 볏짚단의 허리 아래가 모조리 잘라지는 엄청난 기력(氣力)을 발휘하였다. 이삼 장군은 임금이 하사한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와 철퇴를 보물처럼 간직하면서 무공을 익혔다.

한때, 변방지역의 한 장수가 오랜 연구 끝에 새로운 전선(戰船) 모형을 제작하여 이삼 장군에게 보여주면서 보다 가볍고 빠른 점을 자랑하였다. 그러자 장군은 이를 칭찬하면서 “중간기둥을 수리하여 양날개를 고치면 노가 요동하지 않고 서로 잘 나갈 것이다. 비록 바람이 없는 날이라 하더라도 스스로 화살처럼 질주할 수 있을 것이다”고 하며 자신의 의견을 보탰다. 과연 배를 그렇게 다시 고치니 가볍고 빠른 것이 비할 데가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배를 해당 진영의 모든 배들과 바꾸기를 청했으나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으니 때를 만나지 못함을 크게 한탄하였다.

1729년(영조5년), 이삼 장군이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올라 모든 군사권을 잡았을 때, 군대의 절약과 회계에 관심을 기울여 돈과 곡식이 창고에 남았다. 그리고 창과 검, 화살을 모두 새것으로 정비하였지만 자신의 영달을 위하여 집과 토지를 사서 자손에게 주는 일이 없었다.

장군은 부하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무분별하게 베푸는 일을 금지했다. 장수들이 대신들과 접촉하는 데는 경중을 가리고, 군대를 다스리고 사람을 등용함에 있어서 상벌을 엄격히 적용하였다. 특히 군사들에 대한 포상에 대해서는 신중을 기하면서 “평소에 후한 상에 익숙해진다면 난리가 닥쳤을 때에 어떻게 격려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삼 장군은 당쟁(黨爭)의 와중에서 “무장의 집안에 문관이 왕래할 수 없고 문관의 집에 무장이 역시 왕래할 수 없다”고 하며 무인(武人)의 길을 지켰으며 음주가무(飮酒歌舞)를 멀리했고 궁중의 행사가 아니면 함부로 궐내를 출입한 적이 없었다.

조정대신들이 이삼 장군에게 무신(武臣)으로서 군사들의 환심을 얻지 않으니 그것은 어떤 까닭이냐고 물은즉 장군은 “군대의 병사에게 상을 주고 녹봉을 내리는 데에는 그 재주를 시험하고 나서 내리는 것이 나라의 법도입니다. 높은 직위라해서 큰 상을 주는 것은 잘못된 처사이고, 차라리 군대의 불만을 초래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그 재주를 평가하고 등급을 나누어 주어야 마땅합니다. 더욱이 나에게는 세상의 시기가 심하지만 평소에 군대의 인정을 얻고자 하지 않을 따름입니다”라고 말했다.

장군이 매번 조정에 나갈 때는 삼가 몸가짐을 조심하고 앉아서 기다릴 때에도 결코 눈을 감거나 조는 일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나라와 임금에 대한 충성심이 지극하였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모두 군사와 국가의 중요한 업무이다. 임금을 섬김에 신명을 바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지극하지 않다면 어찌 나는 받아드려지기를 바라겠는가?”

이삼 장군이 궁궐의 섬돌을 오르내릴 때에는 걸음걸이가 절도에 맞았으니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장군의 예의바른 모습으로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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