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 안과 검진을 받던 날, 두 눈을 감고 앉아 있다가 여러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간호사는 안약을 넣어 주면서 눈을 감고 있으라고 했습니다. 15분이 지나자 또 한 번 안약을 넣어 주더군요.
그렇게 눈을 감고 앉아 있는 동안 불현듯 노산 이은상의 「소경 되어지이다」라는 시조가 떠올랐습니다. ‘뵈오려 안 뵈는 임 눈 감으니 보이시네/감아야 보이신다면 소경 되어지이다.’ 노산이 고안했다는 양장(兩章)시조입니다.
정지용의 시「호수 1」에서도 이와 비슷한 감각을 볼 수 있습니다.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밖에’라는 시 말입니다.
맨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 그런 표현은 유행가에도 흔합니다. 눈을 감으면 저 멀리서 다가오는 다정한 그림자, 눈을 감아도 그대가 보여 귀를 막아도 그대 숨결이 내 가슴 속에 메아리치듯 들려오죠, 이런 것들 말입니다.
눈을 감으면 많은 생각이 떠오르고, 안 보이던 것이 새로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연암 박지원의 유명한 글 「답창애(答蒼厓)2」에는 눈먼 사람과 화담 서경덕 선생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화담이 집을 잃고 길에서 우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이유를 물으니 다섯살 때 눈이 멀어 20년이 지났는데, 오늘 아침 밖에 나오자 갑자기 눈이 뜨이고 천지만물이 맑고 밝게 보여서 기쁜 나머지 집으로 돌아가려 하니 길은 여러 갈래요, 대문도 서로 비슷해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화담은 “너에게 집에 가는 방법을 알려 주겠다. 도로 눈을 감아라”고 했고, 소경은 다시 눈을 감고 지팡이를 두드리며 집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무슨 일에든 갈피를 잡지 못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람들이여, 도로 눈을 감고 가시오, 그러면 새 길이 열릴 것이니-이것이 연암의 충고입니다. 내 집을 찾지 못하는 열린 눈은 망상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눈은 빛이고 믿음입니다. 인간은 원시시대 이래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만들어 두려움과 궁금증을 해소하면서 마음 속의 믿음을 형상화해왔습니다. 예수의 초상, 만리장성, 피라미드 모두 다 눈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인류문명이며 예술 아니겠습니까.
최근 뉴욕타임스가 영화 「밀양」의 이창동 감독을 소개하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묘사하는 재능이 있다고 평했습니다. 이 감독 자신도 “나의 최대 관심사는 눈으로만은 볼 수 없는 것을 그려내는 방법을 찾는 것이며, 믿음도 그 중의 하나”라고 「밀양」의 제작의도를 밝혔습니다.
1998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포르투갈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는 한 사람만 빼고 모두가 눈이 멉니다. 우리는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것, 가진 것을 잃고서야 그게 무엇인지 알게 된다는 것, 도시가 그곳에 그대로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눈을 다시 뜨고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 .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그것을 잘 보아야 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통해 널리 알려진, 조선 정조 때의 선비 유한준의 말입니다.
도종환의 시 「배롱나무」도 사랑함으로써 알게 되는 것들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배롱나무를 알기 전까지는/많은 나무들 중에 배롱나무가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가장 뜨거울 때 가장 화사한 꽃을 피워놓고는/가녀린 자태로 소리없이 물러서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남 모르게 배롱나무를 좋아하게 되었는데/그 뒤론 길 떠나면 어디서든 배롱나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지루하고 먼 길을 갈 때면 으레 거기 서 있었고/지치도록 걸어오고도 한 고개를 더 넘어야 할 때/고갯마루에 꽃그늘을 만들어 놓고 기다리기도 하고/갈림길에서 길을 잘못 들어 다른 길로 접어들면/건너편에서 말없이 진분홍 꽃숭어리를 떨구며 서 있기도 했습니다//이제 그만 하던 일을 포기하고 싶어/혼자 외딴 섬을 찾아가던 날은/보아주는 이도 없는 곳에서 바닷바람 맞으며/혼자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꽃은 누구를 위해 피우는 게 아니라고 말하듯//늘 다니던 길에 오래 전부터 피어 있어도/보이지 않다가 늦게사 배롱나무를 알게 된 뒤부터/배롱나무에게서 다시 배웁니다/사랑하면 보인다고/사랑하면 어디에 가 있어도/늘 거기 함께 있는 게 눈에 보인다고//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는데, 눈을 뜨든 감든 대체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진정한 사랑은 눈을 뜨든 감든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그/그녀는 항상 그녀/그의 곁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나 말입니다. 그리움 때문에 눈을 감는 것까지는 좋지만 소경이 된다는 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눈이 멀면 과연 그/그녀가 소경이 된 그녀/그를 좋아하고 사랑해 줄까요? 시를 쓰는 사람들은 언제나 이렇게 비현실적인 과장과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합니다.
릴케의 「내 눈을 가리세요」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눈을 가리세요 그래도 당신을 볼 수 있어요/내 귀를 막으세요 그래도 당신을 들을 수 있어요/발이 없어도 갈 수 있고/입이 없어도 당신을 부를 수 있어요/내 팔을 꺾으세요 그래도 나는 당신을 잡습니다/손으로 잡듯 내 심장으로/심장을 멎게 하세요 그러면 뇌가 고동치겠지요/당신이 뇌에 불을 지르면/내 피가 흘러 당신을 실어 나릅니다.’-사랑의 자해공갈과 ‘날 죽여라 죽여’ 수준의 협박이 겁날 정도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죽고 싶어, 죽고 싶어” 그럴 때 냅다 물에 빠뜨려 보십시오. 그러면 “아이고, 안 그래도 죽고 싶었는데 잘 됐네, 안녕!” 하고 물 속으로 쏙 들어가겠습니까? 살려고 발버둥치고 개헤엄을 치면서 난리법석을 부릴 것입니다.
그날 검진을 받은 이유는 당뇨 합병증 여부를 알기 위해 안압을 잰 것입니다. 검사를 마친 뒤에도 약기운에 한동안 눈이 침침했습니다. 병원에 올 때 차를 몰고 오지 말라고 한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중요한 문제는 바로 이런 것들이지 임 그리워 소경이 되겠다는 엄살이나 응석, 그런 게 결코 아닙니다. 현실은 문학이 아니라 가혹한 것입니다. 하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