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5일 어린이날, 그날 따라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금산의 전통 식도락 "어죽"으로 점심을 하고 "칠백의 총"을 찾았다(여기서 총(塚)이란 주검을 모아 묻은 무덤을 말함).
금산 "칠백의 총"은 의병과 승(승려)군 700여명의 전사자를 추모하는 국가 사적지이다. 전북 남원에도 의병과 승군, 관군과 명나라 지원군까지 1만여명이 전사하였고 그분들을 추모하는 공간(만인의 총)을 성역화하였다. 두 곳 모두 임진왜란 당시 패전하여 전몰한 격전지이다.
우리 황산벌도 백제군 5천 결사대가 20여명의 투항자를 제외하고 전원 옥쇄하였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일가족을 멸하고 참전한 장군 계백이 전투을 지휘하였으니 삶과 죽음의 경계가 어찌 있었겠는가!
전쟁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방어진지를 구축한 적을 제압하려면 노출되어 공격하는 부대는 최소 2~3배 피해가 발생한다고 판단한다. 따라서 진영에 있는 백제군을 다섯 차례 공격하여 무찌르고 마침내 사비(부여)로 진격한 신라군은 5만명 중 1만명 이상의 전사자를 남기고 떠났을 것이다.
오죽하면 7월 10일(음력) 나당연합군이 합류하여 사비성을 공략하자는 서해 덕적도 "신라ㆍ당 연합작전회의"를 무색하게 하루 늦게 사비에 도착했겠는가! 당군 사령관 소정방은 그 책임을 물어 "신라 독군 김문영을 참하라"고 명한다.
김유신은 투구가 일어설 정도로 화를 내며 "우리가 황산벌에서 어떻게 싸우고 왔는지도 모르면서 참하라 하니 차라리 내 목을 베던지? 그맇지않으면 우리는 철군하겠다"" 라고 하며 처참했던 황산벌 전황을 설명하며 부하 장수를 살린다.
따라서 신라ㆍ백제 양군의 전사자만 족히 1만5천에 이른다고 추산된다. 여기에 장졸과 우마차의 먹이를 운반하고 등짐을 져서 급식을 지원하는 한편, 무기(활 화살 창칼)와 각종 전투장비를 운반하고 수리하는 치중대는 물론 지원인력과 근로자, 징발된 지역주민까지 족히 5천여 전사자가 추가 발생하였을 것이다. 도합 2만여명이 전몰한 것이다.
그리고 300여년 후 후백제왕 "신검"은 아버지 "견훤"을 옥에 가두고 왕권을 탈취하고는 고려 "왕건"과 대적하였다. 그 "신검"의 군대 또한 이곳 황산벌 최후의 결전에서 패하고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유폐된 김제 금산사를 탈출한 궁예는 왕건 곁에서 패륜 아들 신검이 패하도록 조언을 아끼지 않았었다. 그러나 아들 신검이 죽음에 이르고 자신이 세운 후백제가 멸망하자, 아들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이 무너져 내리면서 측은지심과 인생의 회한이 폭발하여 마침내는 등창이 터져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가 묻힌 곳이 연무읍에 있는 "견훤 왕릉"이라고 역사는 이야기하고 있다.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고려의 국태민안을 기원하기 위해 35년간 지속된 지긋지긋한 통일전쟁의 마지막 전투를 지휘한 연산에 "개태사(開泰寺)"라는 왕사를 세웠다.
(여기서 35년이란, 궁예가 태봉을 건국한 901년부터 왕건이 부하 장수로 참전하여 후백제를 멸망시킨 936년까지를 말함. 왕건은 877년 출생하여 943년 사망함)
국가 사찰 "개태사"와 "견훤 왕릉" 사이 황산벌 어디에선가 고려와 후백제는 최후의 일전을 벌였고 무수한 젊은 생명이 죽어갔던 것이다. 가히 "2차 황산벌전투"라 할 수 있겠다.
지금은 황산벌 일원에 육군훈련소가 있고, 국방대가 있고, 3군본부가 세워졌다. 국방산단이 일어나고 또다른 국가안보시설이 이전해 오겠지만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이자, 논산이말로 호국의 성지가 아니겠는가!
물론 논산에는 "백제 군사박물관"이 있고 그 영내에는 장군 계백의 묘소가 있지만 그것으로 황산벌의 웅혼한 역사를 모두 담았다고 하기에는 많이 부족하고 아쉬움이 남는다.
그 황산벌과 구천에 떠도는 2만여 영혼들에게 영원한 안식처를 제공하여 안돈케하고 나라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던진 뭇 영웅들의 호국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성역화하는 방안은 없는지? 다시 한번 생각을 가다듬고 대안을 찾아보려고 평소 이에 관련한 의견을 나누어왔던 애향심 강한 김용훈 대표와 동행하였다.
전낙운 충남 도의원 엮임. 육군사관학교 졸업, 육군 대령 전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