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즈칸의 몽골제국은 역사상 존재했던 가장 큰 제국이었다,
1271년 원나라가 세워지고 1368년까지 현재의 중국영토를 점령했기 때문에 몽골젝구을 원나라와 동일시하기도 하지만 몽골제국은 현재의 중국영토 보다 훨씬 광범한 지역에 영향을 미쳤다,
영토가 너무 넓어 나누지 않고는 다스릴 수 없어서 제국은 넷으로 나눠 다스렸다,
징키스칸의 위대성은 자신에게 없는 다른사람의 재능을 존중할 줄 알았다는 점이다,
그는 몽골제국이 유지되는 이유가 씨족내부의 단결과 부족들의 협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유언으로 “ 형제들끼리 친목하고 벗들을 존중하라” 는 유언을 남겼다, 형제끼리 친목하라는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지만 벗들을 존중하라는 유언은 대강 지켜졌기 때문에 원나라는 그의 사후 150년간 유지되었다,
징키스칸은 후계자로 첫째아들이 아닌 셋째 “우구데이”를 택했다, 우구데이가 도량이 가장 넓다 ‘는 이유였다,우구데이는 현명하고 판단력이 뛰어나며 너그러웠지만 술을 좋아 했다,
징키스칸은 술을 좋아하는 그를 꾸짖기도 했지만 몽골제국이 가진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지도자 감으로 우구데이의 느긋한 성격이 후한 점수를 줬다는 이야기다,
우구데이이에 대한 일화는 많다,
그중 하나만 소개하면 몽골의 관습법에 따르면 흐르는 물에 몸을 씻으면 안되었다,
징기스칸도 이를 엄격히 금했다,
그런데 우구데이가 형 차가타이와 함께 사냥을 하고 돌아오는데 누군가 물가에서 몸을 씻고 있었다,
차가타이는 금률에 엄격했기 때문에 부하들을 시켜 그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우구데이가 말했다,
형님 , 오늘은 너무 늦었고 우리도 피곤하니 오늘밤에는 그를 구금 했다가 내일 심문해서 처형합시다,차가타이는 그렇게 하지고 말했다,
그런 뒤 우구데이는 몰래 은화 한 잎을 물에 빠뜨리고는 그 사람에게 일러주었다,
“심문할 때 저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얼마 안되는 재산이 물에 빠져 그것을 건지려고 물에 들어갔습니다, ‘ 라고 말하라
과연 심문을 받을 때 그는 그렇게 말했고 우구데이는 이렇게 그를 변호 했다,
금률을 어길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 불쌍한 사람은 극도의 절망과 곤경에 빠져 이 보잘 것 없는 것 때문에 자신을 희생한 것이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를 용서해주고 또 그에게 물에 빠트린 것의 열배에 달하는 은을 주어 돌려보냈다,
그후 우구데이가 전장에 나서 적들과 싸울 때 기습에 걸려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을 때 한 병사가 우구데이의 몸을 향해 날아드는 독이 묻은 화살을 대신 맞아 우구데이의 목숨을 살려 냈는데 이 병사는 금률을 어겨 사형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 우구데이가 관용을 베풀어 돌려보낸 그 병사였다는 것
사관은 우구데이를 평하여 이렇게 말했다,
이런 까닭에 세상의 자유인들은 그의 품성에 노예가 되었다, 그의 관대한 심성은 풍부한 재물보다 더 나았기 때문이다,
우구데이의 이런 품성은 징키스칸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또 우구데이가 아버지의 총신 야율초재를 끝까지 중용하여 정주민들을 다스리는 전통적인 도덕률을 받아들인 것도 보통의 군주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참으로 뛰어난 사람이란 자신과 다른 사람을 용남 하는 것이 아닐까? 참으로 뛰어난 인재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처한 입장을 헤아리는 것이 아닐까 ?
징키스칸이 술꾼 우구데이를 후계자로 삼은 것은 몽골제국의 조직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 넣었다고 사관들은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굿모닝논산 대표 김용훈
자랑하지 않는 것이 자랑하는 것이고 명리를 다투지 않는 것이 명리를 얻는 것이다, 상대에게 양보하는자가 이기고 ,남보다 낮추는 자가 결국 남위에 오르게 된다, 군자가 다투는 길의 험난함을 아음 깊이 알아서 홀로 현묘한 길에 높이 오르면 고아채가 빛나고 날로 새로워져 덕성이 옛사람의 반열에 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