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덕빈 도의원 시장출마 고심 중 [?]
논산시의회 2,3,4대의원을 지내면서 부의장 의장을 역임하고 도의회에 진출 8,9,10 대 , 내리 6선의 진기록을 세우면서 시민 머슴을 자임해온 송덕빈[72] 도의원이 내년 6월에 치러질 지방선거를 앞에 놓고 고민에 빠졌다.
세상의 나이로 미루어 어쩌면 마지막 봉공의 기회 일 수도 있는 터에 그치열한 봉사의 자세로 논산시 살림을 아우르는 시장 직에 도전하라는 지지자들의 거센 압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송덕빈 의원은 연산면 오산리 태생으로 그럴듯한 농뙈기 한 평 없는 빈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다섯 남매의 삼남인 송덕빈 의원은 말수가 적고 유순하면서도 동기들과 우의는 깊고도 깊었다, 가난했던 그 시절 송의원의 부모님은 지긋지긋한 가난의 대물림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기 위해서는 자식들에게 공부를 시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안간힘을 썼지만 아들 셋을 모두 진학 시킨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렇게 속앓이 하던 어느 겨울날 아마 크리스마스 였다고 했다, 교회에서 나눠주는 빵 한 개를 받을 욕심으로 교회에 가서 목사님의 설교를 듣던 중 “ 섬김 받는 자 되려거든 섬기는 자 되라 ” 는 한 말씀이 뇌리에 큰 울림으로 둥지를 틀었다고 했다.
그 뒤로 의 생활은 오직 공 [恭]과 검[儉] 의 나날이었다,
사위의 모든 것들을 사람이나 심지어 길거리의 작은 돌맹이 하나도 공경의 대상으로 삼았고 부지런히 일하는 대신 허튼짓은 하는 법이 없었다.
그렇게 근직한 삶을 살다보니 얼마간의 돈을 모았고 송의원은 70년대 초 논산시 반월동 [지금의 논산시네마 옆] 으로 이사한 그는 조그만 빵가게를 열었다.
근면 성실한데다 고객을 섬기는 마음으로 빚어내는 빵들은 잘 팔려나갔다.
수년 후 얼마간의 안정을 이룬 그는 그때 모은 돈으로 지금의 주택을 구입했다, 명당[?]으로도 소문난 송의원의 집은 스레트 기와에 전형적인 시골농가 모습 그대로 인 채 농사꾼으로 다시 변신했다. 천직이 농부처럼,, 부지런한데다 친절한 그는 취암 1동의 일원이 되면서 더 빛났다, 사람들은 예의바르고 붙임성 있는 그를 이장으로 내세워 마을일을 맡겼다,
송의원은 자기 일은 물론이지만 이웃들을 내 부모처럼 섬겼고 한집도 빠짐없이 찾아다니며 방역 소득을 해주는가하면 작고 큰 아파트 물탱크 청소 등을 도맡아 했다.
그러다 논산시로 승격이 되고 1996년 제2대 시의원 선거 때 그는 주변사람들의 성화에 못 이겨 당시 두 사람을 뽑는 논산읍 선거구에 입후보 했다. 송의원은 당시 현직의원이던 송상현 의원을 아주 근소한 40여표 차이로 누르고 김용훈 후보와 함께 동반당선의 영광을 누렸다.
그리고 내리 논산시의원 3선 ,, 부의장에 의장까지 역임 했다. 그후 오늘 3선 도의원이 되면서 도의회 부의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의 의정스타일은 언제나 현장 제일주의이다, 누구든지 내 시민이 부르면 아무리 급한 일도 제쳐놓고 달려간다
한번 송의원에게 제기한 민원은 어떤 방식이든지 결말이 난다는 게 시민사회의 중론이다, 최선이든 차선 아니면 차 차선이든 ,, 민원인이 제기한 내용은 꼭 풀어낸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며 실제로 의정생활 20여 년 동안 그는 99%의 작고 큰 민원을 폴어 냈다고 말하기도 했다.
웬만해선 화내는 법도 없다, 나이기 위면 형님이고 나이가 한살이이도 아래면 아우님이며 나이든 이들에겐 어르신으로 부른다,
근검 절약 하면서도 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보면 무심히 지나치지 않는 속정[?] 깊은 송의원, 그는 교육의 마스터 코스를 받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워 비정규 학습 배양 과정은 적극적으로 참여해 오면서 쌓아진 내공은 의정단상에서 그가 토해내는 질의를 통해 지방경영의 현실과 주민들의 바람을 잘 조화해 낸다는 평가도 받는다.
부 지런한 이가 부를 축적하는 것은 세상의 당연한 이치 , 상당한 자신가로도 알려진 그는 70년대 지어진 전형적인 시골농가의 모습 그대로 간직한 전원의 삶을 즐기고 있다,
번듯한 책상과 의자 하나도 없다 평생의 반려인 부인 문정자 씨 또한 새마을 부녀지도자로 봉사의 삶을 살아오면서 변변한 화장대하나 없이 수더분한 삶을 영위한다,
송덕빈 의원은 내 스스로 시민들의 머슴으로 생각하고 살아온 삶이며 앞으로도 그런 정직한 머슴으로 살고 싶다고 했다,
송의원은 20년 넘게 몸담아온 시 도 의정생활을 통해서 주민들의 고충을 해소해 오는데 전심전력해 왔고 큰 보람으로 여기는 일들도 적지 않지만 시정발전을 위해 더 큰일을 해 달라는 시민들의 지상명령 앞에서 고민은 크고도 크다고 복잡한 심경의 일단을 내비쳤다.
송의원은 인터뷰를 마무리 하면서 각기 소속정당이 다르다고 해도 시장이나 도의원간의 유기적인 협력관계가 구축돼서 힘을 모아나갈 때 시정발전의 시너지 효과가 큰 것은 더 물을 나위가 없는데도 황명선 시장 재임 중이던 지난 8년간 시 도정 협력을 위해 머리를 마주 대한 일이 거의 없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라고도 했다.
또 자신이 시 도 의정 활동을 하면서 2대 시의원 시절 논산시를 분리해 계룡시로 승격시키는 것을 막지 못한 것은 제일 부끄럽고도 가슴 아픈 일일 것이라고 당시의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송덕빈 의원은 부인 문정자 씨와의 사이에 두 딸 윤희 [47] 현아 ]46] 씨와 두 아들 용욱[42] 용석[41] 의 4남매를 두고 있으며 논산시의원 역임 시 바로 윗 형 중빈 씨가 충남도의원 맏형인 재빈 씨가 충남도교육위원으로 동반 당선돼 화제를 낳기도 했다. [이기사는 월간 굿모닝논산 메인 기사로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