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660년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7월 계백 대장군이 거느린 백제의 5천 결사대는 황산벌에 당도해 관동리 황산성을 장군 진[陳]으로 삼아 김유신이 거느린 5만 대군과 마주 대했다.
이때 신라군은 먼저 당도한 백제군에 맞서 산직산성[한민학교 뒷편]에 군영을 세우고 전열을 가다듬었다
백제 16관등 중 두 번째 품계인 달솔의 지위에 오른 문 무 겸전의 계백대장군이 이끄는 5천 결사대는 신라군과 맞서 네 번 싸움에서 이겼으나 젊은 화랑 반굴과 관창이 분전 끝에 주검이 돼오자 분기탱천한 신라군은 총공세를 펼쳤고 세궁역진[勢窮力盡]한 계백장군과 오천 결사대는 전멸[全滅]당했다고 역사서는 기록하고 있다.
이때 마지막 전투를 앞두고 계백장군이 고향으로 돌아가라며 추려낸 늙고 어린 군병들은 차마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마지막 전투가 끝나자 동료였던 전몰장병들의 주검을 수습해 지금의 연산면 송정리 1구 인근 골짜기에 묻었고 그 골짜기를 시장골[屍葬骨] 또는 군장골[軍葬骨]이라고 불렀다라고 야사[野史 ]는 기록하고 있다.
더불어 양촌면 산직리 1구 “는 백제 군병들과 싸워 목숨을 앗긴 신라 군병들의 주검을 수습해 묻었다 해서 장골 [葬骨]이라 했고 신라군이 주둔했던 신직산성 밑의 마을 이름은 지금도 "성안채" 라거나 "성안 뜸" 등으로 불리 우고 있다. 논산시가 발행한 논산시지에도 그런 설명이 있다,
계백장군의 주검은 지금의 부적면 충곡리 수락산[首落山],가장골[假葬骨]에 모셔져 오늘에 전해지고 있으며 논산시는 장군의 묘역 일원을 백제 군사박물관으로 조성하고 장군의 충의를 기리는 사당 충장사[忠壯司] 세워 매년 봄 제향을 지내고 있다.
또 양촌 쪽에서 연산면으로 향하는 길목. 지금은 없어진 구 한민학교 관계자들이 지신들이 임의로 "황산벌 전적지"라는 글을 새긴 돌비석 하나가 오가는 나그네의 눈길을 끌고 있고
십 수 년 전 논산시는 연산면 송정리에서 벌곡면으로 향하는 길목 황룡재 8부 능선쯤에 있는 자그마한 넓이의 쉼터 한 켠에 '황산벌 전적지'라는 간략한 안내판 하나를 세운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정작 당시 나라를 지키려 전장에 나서 산중고혼[山中孤魂 ]이 된 백제와 신라의 장병들, 나라를 위해 장렬히 산화한 이 충의의 혼[魂]이 깃든 역사의 현장에 충혼비 하나도 세우지 못하고 있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그 위대한 정신적 문화적 역사 문화의 귀한 자산에 대해여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 지역의 리더 들의 역사 인식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20여 년 전 2대 논산시의회가 황산벌 오천결사대 충혼비를 세우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황산벌 오천결사대 충혼비건립추진특별위원회 까지 구성해 현장 답사 등을 통해 당시 전일순 시장에게 충혼비 건립 의견을 제시했지만 백안 시 당했다,
그 후 4-5년 뒤 부여 사람들은 궁남지 남쪽 화지산에 충혼비가 아닌 오천결사대의 출정 상을 세우고 매년 백제문화제 행사 전날 그곳에서 제향을 지내고 있는 터임을 생각하면 20년 전 제2대 논산시의회에서 황산벌 오천결사대충혼비 건립추진 특별위원회 구성을 발의 했던 장본인으로서 지금이라도 논산시가 나서서 황산벌 그 역사의 현장에 나 제 전몰장병 합동 위령비를 세워야 한다고 다시 주장한다,
황명선 시장이 황산벌성역화 사업을 통해 충혼비는 물론이고 나제군 합동위령제 봉행 등을 추진하고자 하는 원대한 계획을 수립 , 충남도지정문화재 지정을 추진했으나 해당지역 주민들의 반발로 한걸음도 진척을 보이지 못하고 있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반대 입장을 표명하는 이들의 주장이라야 일반적 지역개발이 억제되고 그로 인해 재산상의 손실을 염두에 둔 것이라면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황산벌 성역화 사업의 추진과 함께 충혼비를 세우고 백제는 물론 신라군 장병까지 포함한 나제군 합동 위령제라도 매년 봉행 해 나간다면 논산시는 아니 연산면은 고질병처럼 나눠 갈린 이 나라의 동 서 영 호 남의 갈등을 봉합하고 민족 화합을 다지는 거룩한 성지요 대한민국의 정신적 중심도시로 거듭 날 것임이 분명하고 그를 운용하기에 따라서 경제적 파급 효과 또한 기대치를 훨씬 웃돌 것이라는 판단이다.
야사[野史]에 이르고 구전에 의하기를 황산벌의 마지막 전투를 앞둔 계백대장군은 따라나선 7천의 장졸들에게 “ 이 싸움에서 우리는 한사람도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아직 나이 어린이와 나이든 이는 살아남아라, 고향으로 돌아가라 ”며 3천의 노약 잔병을 골라냈고 젊은 4천의 결사대를 조직해 최후의 일전에 임했다고 했다.
전투가 끝나고 신라군이 부여를 향해 진격해 간 뒤 살아남은 3천의 백제 잔병들이 전사자들의 주검을 수습하고 난 뒤 “ 나라가 망한 터에 돌아갈 곳이 어디 있겠느냐”며 그대로 연산지역을 중심으로 눌러 앉아 오늘 논산사람들의 먼 조상이됐다 라는 내용도 있다.
말하자면 오천결사대는 오늘 논산 연산사람들의 선조들인 셈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황산벌의 성역화 사업은 논산을 우뚝 세우고 연산을 일으킬 역사 문화적 경제적 발전의 기폭제가 될 것으로 본다, , 연산사람들의 눈이 크게 떠지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