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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連山의 光山金氏와 陽川許氏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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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 2017-02-08 20:00:20
  • 수정 2017-02-08 20:0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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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김 중흥 허씨 할머니 , 친정서 시가 연산 천리먼길 범이 호위

連山의 光山金氏와 陽川許氏 이야기
                             김선의 사)기호문화유산활용진흥원 이사장
우리나라 성씨는 가(賈)씨에서 황보(皇甫)씨에 이르기까지 2,766성(姓)이 존재한다. 논산시의 경우 152여개의 성씨가 있으며, 이 가운데 하나가 바로 광산 김씨이다. 일명 ‘광김(光金)’이라 불리는 광주의 김씨들이 연산에 정착하게된 것은 오래 전의 일이다.

 


원래 김씨는 신라의 왕족이었으나, 신라 말에 광산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신라 말에서 고려 초는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사상적으로는 선종이 유행하고, 각지에서 호족이 등장하면서 반독립적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고려의 후삼국통일은 신라 말의 개별적 가문에 있어서도 시대정신과 성향이 반영된 결과였다.

 

 

이른바 ‘호족의 시대’에 광산 김씨는 고려의 왕건을 지지하여 개국공신의 자격으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였다. 골품제 체제로 유지되었던 혈연 중심적인 신라 사회를 타파하고, 정치·사회적 개혁과 과거제 도입을 통해 개인의 능력이 중시되는 사회로 진입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개국공신의 후손들은 과거와 음서를 통해 중앙 정계로 진출하거나 지방의 향리로 분화하였다. 광산 김씨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체로 과거를 통해 중앙정계에 진출하였는데, 여러 대에 걸쳐 급제자를 배출하면서 명문 가문으로서 사회개혁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광산 김씨의 연산 입향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신독재 김집이 쓴 「정경부인 양천허씨 묘갈명」에는 허씨가 남편과 사별하고, 어린 아들을 업고 연산의 시가(媤家)로 들어왔다고 한다.

 

 당시 허씨는 17세였고, 죽은 남편 김문(金問)은 21세였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겠지만, 친정에서는 개가할 것을 독려하였다. 실제로 재혼 상대와 날짜까지 정해 놓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허씨는 친정의 뜻을 뿌리치고, 시댁이 있는 연산으로 들어왔다

 

. 남편을 먼저 보낸 열일곱의 어미가 어린 자식을 등에 업고 시가로 들어가 여생을 마쳤다는 사실은 조선 초기에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세종은 전국의 효자·절부·의부·순손(順孫)을 전국적으로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하였는데 양천 허씨의 행적은 당시에도 귀감이 되었다. 『세종실록』에 입전되고 정문(旌門)이 내려졌다.

 

 



양천 허씨의 절행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여지도서』·『사찬지리지』, 『동국신속삼강행실도』 등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찾을 수 있다. 다만, 『세종실록』에는 20세에 남편을 잃었다고 하여 김집의 기록과는 차이가 있다.


허씨 부인에 관한 이야기는 지금도 이야기 형태로 구전되고 있다. 호게촌(虎憩村)의 지명 유래와 조상의 은덕에 관한 내용이지만, 본질은 유교적 가치를 충실히 이행한 허씨의 마음자세와 수절을 픽션화한 것이다. 그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김문이 죽자, 친정과 시댁에서는 허씨와 어린 아들의 장래를 걱정하여 개가 시키고자 하였다. 하지만 허씨는 수절을 결심하고, 계유년 늦은 가을 남몰래 연산의 시댁을 찾아 나섰다.

 

 몸종이 얻어다주는 거친 음식으로 주린 배를 채우며 시댁으로 향하는 길은 그리 순탄하지 만은 않았다. 어느 날 깊은 산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덩치 큰 호랑이와 마주쳤다.

 

 허씨 일행은 노랗게 질렸지만, 호랑이는 묵묵히 숲길을 헤치며 길을 인도하였다. 허씨 일행이 연산의 김 관찰사가 사는 고을에 당도하자 호랑이는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 후 이 마을을 호게촌 또는 범넘이라고 불렀다. 허씨가 간신히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시부모에게 찾아와 인사하자, 시아버지는 친정으로 다시 돌아가라는 명을 내렸다. 며느리의 뜻을 모르지 않았지만, 시아버지 입장에서는 사돈과의 선약도 지켜야 했다.

 

허씨의 의지도 만만치 않았다. 시댁에서 쫓겨난 며느리는 시댁이 보이는 산기슭에 움막을 짓고, 어린 아들과 거처하였다. 어느 날 매서운 초겨울 날씨에 밤에는 눈까지 내렸다.

 

허씨 일행이 걱정된 시어머니는 이른 아침 하인을 시켜 며느리가 있는 곳으로 서둘러 가보게 하였다. 하인이 한 걸음에 달려가 보니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움막 주위에만 눈이 하나도 쌓이지 않았으며, 지열(地熱)의 온기가 감싸고 있었다. 하인이 돌아와 보고하자 시어머니는 조상의 은덕이라고 여겼다.

 

허씨는 험난한 고생 끝에 시가에 들어 올 수 있었던 것이다. 연산의 시댁에서 제 2의 인생을 살게 된 허씨는 시부모와 가족들을 잘 봉양하였고, 아들 김철산을 정성껏 훈육하였다. 그 결과 연산의 광산 김씨는 대대로 현달한 인물이 배출되었고, 가문이 번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김문의 처 양천 허씨의 절행은 연산광김의 형성에 지대한 공헌이 있을 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 세종의 효열 표창을 받은 인물로 기록되었다. 이는 광산김씨 가문의 차원을 넘어 오랫동안 조선시대 여인의 도덕적 귀감이 되었던 것이다.

 

 

구체적인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양천 허씨의 절행을 가능하게 하였던 정신적인 신념체계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남편을 여의고, 젊은 나이에 수절하며, 집안일과 가정교육에 헌신할 수 있었던 추동력은 유교적 가치의 실천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허씨의 절행은 가문적 자부심과 실천적 가치로 인식되어 후손들에게 전승되었다.

 


김철산은 홀어머니 슬하에서 엄격한 훈육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출세하여 고위관직에 오르는 것보다 덕행을 쌓고 4남 2녀를 훈육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의 자녀들은 모두 신망을 받았으며, 연산의 명문가로 부상하게 되었다.

 

허씨의 손자 김국광(金國光)과 김겸광(金謙光)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가문이 현달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김국광은 1441년(세종 23)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여러 관직을 거쳐 정승의 반열에 올랐다. 세조 때 총애를 받아 사지제일(事知第一)이라는 어서(御書)를 받았다.

 

 명의 사신도 김국광에 대해 “일 처리가 치밀하고 명료하다”라고 평가하였다.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좌찬성이 되었고, 광산군(光山君)에 봉해졌다. 최항(崔恒)·한계희(韓繼禧)·노사신(盧思愼)·서거정(徐居正)·강희맹(姜希孟) 등과 더불어 『경국대전(經國大典)』 편찬에 적극 참여하였다.

 

 

예종 때 우의정, 성종 때 좌의정에 올랐으며, 순성명량경제흥화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의 칭호를 받고 다시 광산 부원군에 봉해졌다. 시호는 정정(丁靖)이다. 김겸광은 1453년(단종 1)에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성종 때 검열을 거쳐 우참찬(右參贊)·좌참찬에 올랐으며, 예조판서를 지냈다. 1471년(성종 2)에 순성명량좌리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 3등에 책록되고, 광성군(光城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공안(恭安)이다.

 


 그 후 김국광의 손자는 진산군수를, 증손자 김호는 지례현감을 지냈다. 이들의 관직은 높지 않았지만, 김호(金鎬)의 자손들인 김계휘(金繼輝)-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과 김반(金槃) 형제에 이르면 학문과 벼슬로 일세를 울리게 되었다.

 

 

이들이야말로 양천허씨 이후 연산지역 광산김씨 집안의 표상이며, 자부심의 원천이라 할 수 있다. 김계휘는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호는 황강(黃崗)이다.

 

 

 심의겸, 박순, 기대승, 이이, 성혼, 정철 등과 친교를 맺으며 이러한 넓은 교우관계는 훗날 김장생의 삶과 학문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김장생은 율곡 이이의 적통을 이어받아 조선 예학을 정비하였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이른바 ‘국가재조론’의 사상적 근거와 방향성을 정립한 장본인이다. 1548년에 서울의 황화방 정릉동(지금의 서울 중구정동)에서 태어났으나, 오랜 시간을 보내며, 학문연구에 몰두한 곳은 충청도 연산이었다. 김장생은 송익필, 이이, 성혼 등으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나, 과거에는 응시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의 학문은 조정에까지 알려져 국왕으로부터 여러 번 출사 요청을 받았다. 김장생은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고향에서 학문과 저술활동 및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발발하였을 때에도 연로하여 전장에 나아갈 수는 없었지만, 백성들을 돌보며 군량미를 조달 하였다. 양란 이후 조선의 피해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하였다. 전근대사회의 경제적 기반인 농경지가 황폐화 되었으며, 인적 피해는 말할 수도 없었다.

 

 

 전쟁의 피해복구와 재건을 위해서는 ‘국가재조’의 사상적인 기반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이에 김장생은 예학을 재정립하여 무너진 나라의 기강을 바로세우고자 하였다. 당대의 문헌과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예학연구에 몰두하였다. 정묘호란 때에는 80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충청도와 전라도에 격문을 보내어 양호(兩湖) 호소사(號召使)의 자격으로 의병을 지휘하고 군량과 병기를 모아서 세자에게 전달하였으며, 강화도에서 국왕을 알현하였다.

 

 

 전란을 겪으면서 국기를 바로잡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심리에 대한 깊은 자기성찰과 타인에 대한 배려가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교육을 통한 개혁은 단기적인 성과를 보기 어렵고, 가시적인 효과가 더디지만, 원칙적이고 근본적인 해결방안이다.

 

 

 김장생은 조정의 출사요청을 끝내 거절하고, 여생을 교육과 집필에 전념하였다. 예학과 관련한 저서로는 『상례비요(喪禮備要)』 4권을 비롯하여 『가례집람(家禮輯覽)』·『전례문답(典禮問答)』·『의례문해(疑禮問解)』 등이 있고, 이밖에도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경서변의(經書辨疑)』 등이 있으며, 시문집을 모은 『사계선생전서(沙溪先生全書)』가 전해지고 있다. 김장생의 문하에는 아들인 신독재 김집을 비롯하여 동춘당 송준길, 우암 송시열, 초려 이유태 등 당대의 명유가 망라되어 있다.

 


돈암서원은 연산의 양천 허씨에서 사계 김장생과 그의 제자들에 이르기까지 응축되어 계승된 실천적 예학정신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연산은 ‘예학의 고장’이자 ‘충청도하면 양반’을 떠올리는 조선후기 이래 상투적인 표현의 발원지가 되었다. 이러한 연산의 예학정신을 현대에 재발견하고 활용하는 것이 앞으로 돈암서원이 나아가야할 길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인성교육진흥법이 만들어지고, 전국의 초등학교, 중·고등학교에서 ‘바른 인성’을 강조하고 있다. 20세기는 인류 역사상 가장 비약적인 발전과 변화를 가져왔지만, 무분별한 개발과 남용으로 인해 적지 않은 부작용과 문제점이 양산되었다.

 

 지면관계상 21세기의 시대적 과제를 모두 열거할 수도 없겠거니와 전 지구적 차원의 문제의식과 총체적 성찰이 요구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우리 사회가 직면한 문제의 진단과 처방은 여러 분야에서 시도되고 있다. 무엇보다 근본적인 개선의지와 다각적인 치유노력이 필요한 상황이다. 이에 인성교육진흥법(법률 제14396호)이 제정되어 작년부터 시행되고 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인성교육의 부재에 따른 사회문제가 법률제정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바른 인성’은 더불어 사는 사회의 필수 아이템이자 최근 글로벌 인재의 자격요건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요건이기도 하다.

 


돈암서원은 양천 허씨의 실천정신과 사계 김장생의 예학정신을 되살리고, 현대의 교육과 윤리의식에 맞게 재구성하여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 나갈 것이다. 실제로 돈암서원은 신개념 인성교육기관으로서 거듭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 결과 2014년에는 문화재청의 ‘살아 숨쉬는 향교서원 만들기’ 사업에서 우수기관으로 선정되었고, 2016년에는 충남교육청의 ‘인성교육우수민간단체’에 선정되었다. 또한 2017년에는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의 ‘문화유산 방문교육’사업 과 톡톡 이순신, 충무공탐험대에 시행 단체로 선정되어 청소년의 인성교육과 문화유산 교육을 병행하여 수혜계층을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또한 더나아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많은 관심과 질정을 부탁드린다.

 

  김선의 사)기호문화유산활용진흥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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