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시 연무읍 구자곡 초등학교 후원에 모셔진 백제충신 계백대장군 동상 !
말위에 올라타 삼지창을 거머쥔 장군의 형형한 눈빛이 온몸을 전율케 한다,
장군을 등에 태우고 하늘 향해 포효하듯 두 발을 곧추세운 말은 주인의 명이 떨어지면 금방이라도 적 진을 적진을 향해 짓쳐 들어갈 기세다.
1966년도에 당시 백제중학교 미술교사이던 윤석창 선생이 제작한 것으로 알려진 이동상은 처음부터 이곳에 세워진 것이 아니다,
한 언론이 전국에 산재한 동상들을 상대로 한 작품 콘테스트에서 인천에 있는 맥아더장군 동상에 이어 2위에 오를 만큼 뛰어난 작품성을 인정받기도 한 장군의 동상은 1966년 7월 31일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까지 참석한 가운데 지금의 부여군청 앞 광장에 세워 졌었다.
그때 제막식에 참석했던 김종필 당시 총리는 장군이 든 삼지창, 활 투구 등을 살펴보고 누란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지키려는 장군의 의기가 잘 묘사된 것 같다며 크게 만족해 했다는 이야기가 뒤 따른다,
그 후 13년 동안 부여를 찾는 외국인들을 포함한 국민들의 사랑을 받던 장군의 동상은 알 수 없는 이유로 교체 지시가 내려졌고 1979년 당시 서울대 미대 김세중 교수가 제작한 현재의 동상으로 교체됐다,
일설에 의하면 장군의 동상이 크기가 작다는 이유로 교체됐다는 설도 있으나 전혀 설득력이 없는 가설일 뿐이다,
윤석창 선생이 제작한 장군의 동상에 비해 김세중 교수가 새로 만든 동상은 크기는 다소 커졌지만 창 대신 오른손을 든 모습에 말 꼬리 조차 아래로 쳐진 형상이 마치 항복하는 무기력한 항장의 모습에 다름 아니라는 혹평이 머물러 있다.
더욱 윤석창 선생이 만든 장군의 동상이 버려진 시점이 1977년 9월 1일 경주 황성공원에 세워진 김유신 장군 동상의 제막식 이후 3년여 뒤인 1980년대 초여서 박정희 대통령이 김유신 장군 동상을 좀 더 크게 만들라는 지시에 의해 김유신 장군 동상에 나섰던 제작진이 계백장군의 동상을 본 떠 만들고 그 사실이 세상에 들어나는 것이 끝내 두려워 이를 은폐하기 위해 버렸다는 설이 그럴듯한 이야기로 회자되고 있다,
계백장군의 동상은 1979년말 쯤 당시 한창 개발 중이던 호남 고속도록 연무인터체인지 부근 숲이 우거진 곳에 버려졌다.
처음에는 무심히 지켜보던 논산시 연무읍 주민들은 그 뒤 몆 년 동안 야산 속에 유기된 금속 물체가 계백장군 동상이고 이를 그냥 버려둘 수 없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특히 구자곡 초등학교 19회 동문들이 십시일반으로 이전 비용을 마련해 구자곡 초등학교로 모셔온 뒤 1985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제막식을 가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이후 2008년도 가을 이 동상에 대한 취재를 통해 동상이 모진 풍상에 시달리고 관리 소홀로 심각히 훼손되는 현상을 우려한 굿모닝논산 김용훈 대표는 당시 충남도의원이던 송영철 의원에게 복원의 필요성을 전했고 현장을 찾은 송의원의 주선으로 도비 3천 여 만원을 들여 두 달의 복원 작업 끝에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문제의 계백장군 동상의 진가가 새롭게 조망 받으면서 부여군 사람들 사이에서는 계백장군 동상을 다시 되돌려 받자는 움직임이 강하게 일고 있다,
그러나 자신들이 버린 것을 다시 되돌려 달라는 명분이 적은데다 부여가 버리고 논산사람들이 새로 세운 동상을 어떠한 이유로든 돌려 줄 수 없다는 구자곡 초교 동문들의 강경한 입장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형국 이다,
이미 독자들이 주지하는 것처럼 계백 대장군은 백제말기의 충장 으로 단순한 무인이 아닌 백제 조정의 16관등 중 두 번째 품계인 달솔 [지금의 부총리급 ]의 지위에 오른 문무겸전의 대장군으로 누란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처자의 목을 베고 황산벌 전투에 나서 5만 김유신 군과 다섯 번의 싸움 중 네 번을 이기고도 세궁역진 황산벌의 고혼이 된 충의의 표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지는 백제의 혼불이요 우리 역사의 세기적 충장[忠將]의 기상을 너무도 잘 표현해 낸 계백대장군의 동상을 어디로 모시는 것이 장군에 대한 예의일 것인가 ?를 공론의 장에 던지고자 한다
결자 해지라 했다,
차제에 한 시대를 풍미하면서 정치적으로 충청을 대변해온 김종필 전 총리께서 문제의 장군 동상을 버릴 수 밖 에 없었던 당시의 감춰진 이야기들을 이제는 솔직히 털어놓고 결코 홀대 할 수 없는 백제인의 상징성을 가진 장군 동상을 역사의 양지 그 어딘가에 잘 모셔야 할 것이다.
[이기사는 월간 굿모닝논산 2월호 메인가사로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