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말하거니와 우리 논산은 누가 뭐래도 위대한 선유[先儒]의 말씀 [論]이 산[山]을 이룬 명예로운 고장이다,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논이 많고 산이 많아서 논산이라고 이름 지었을 것이라는 논리대로라면 논과 산들이 즐비한 대한민국 그 어느 땅인들 논산이 아니겠는가 ?
논산[論山]이라는 지명은 일제 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을 통해 노성 ,은진, 연산 3현[縣 ]에 부여 석성면 일부지역을 포함해서 논산[論山 ]으로 명명했다,
당시 일본이 이 땅을 강점한 시기였지만 당시 지명을 정한 이들 가운데 그 누군가 우리 논산이 조선조 성리학을 사람의 도리를 밝히는 예론으로 재정립, 예학의 학문적인 체계를 바로 세운 사계 김장생 선생을 필두로 그 문하의 아드님 신독재 김집,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 등 명현 거유의 말씀이 무성했음을 간파했을 수 있다,
또 천하의 영재들을 불러 모아 나라 경영의 치도를 비롯한 다양한 학문을 익히던 돈암서원을 비롯한 10개의 서원과 은진 노성 연산 3향교 그리고 이 나라에 두 곳뿐인 공자의 영당을 모신 궐리사가 노성에 있음도 고려됐을 수가 있겠다.
더욱 조선 8대문장가인 구봉 송익필선생과 그 수제자 사계 김장생, 또 그를 우러르는 수제자 우암 송시열 선생의 3대 사승 관계가 빚어내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얽혀 있는 강경 임이정과 팔괘정이 갖는 유가의 문화적 가치를 꿰뚫어 봤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기록을 더듬어 봐도 우리 논산을 말씀의 고장이라는 의미를 담아 논산[論山]으로 명명했다는 근거를 찾지못하고 있다,,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또 논이 많고 산이 많아서 논산으로 정했다는 근거 또한 애매모호하다..
양 편 모두 그럴 것이다, 그랬을 것이다 라는 가설을 내세울 뿐이다,.
이쯤이면 논산시민의 이름으로 논산[論山] 은 말 그대로 말씀[論]이 산[山]을 이룬 위대한 고장이라는 의미를 담아 지명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자는 주장이 그럴법해 보인다. ,
중산국의 동북공정을 보라 저들은 고구려 발해 역사도 저들 것 이라고 억지 주장을 해대고 있고 일본인들은 우리고유의 영토인 독도마저 저들 거라고 우겨대고 있잖은가?
이런 시점에서 논산시민의 이름으로 우리 논산은 위대한 선현들의 말씀이 산을 이룬대서 붙여진 “말씀의 고장” 이라 선언한대서 그 누군들 딴지를 걸어올 이유가 있을리 없다.
누가 뭐래도 이 문제를 푸는 첫걸음은 지방자치단체장의 결단에 있어 보인다,
유형은 다르지만 비슷한 사례가 있다,
논산시 부적면 충곡리 수락산 가장골에 잠든 계백대장군의 묘비에 대한 일화다
전일순 전시장의 재임초기 전일순 전 시장은 계백장군 묘역에 세워진 묘비의 “백제 계백장군 묘” 글자의 앞에 새겨진 “傳” 자에 대해 불만을 제기 했다.
장군의 묘소가 당국의 고증을 받은바 없어 “ 전해져 내려오는 바에 의하면 ” 이라는 뜻을 담은 “傳” 자 한자가 장군을 모독하는 것이고 참배객들의 발길을 주춤하게 한다는 논리를 펼친 끝에 전일순 시장은 자신의 책임아래 傳 자가 새겨진 묘비를 파묻어 버리고 지금의 온전한 묘비를 새로 제작해 세우도록 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별소리 다해도 전일순 시장의 당시 결단은 잘한 일로 회자 된다. 그 뒤에 그 누구도 이 문제와 관련해 딴지를 걸어왔단 소리를 들어본 일이 없다.
그렇게 보면 당시 고 전일순 시장의 고집이 논산인 들의 자존감을 세우는데 일조한 터이다.
바라거니와 논산의 지명유래와 관련해서 황명선 논산시장의 결단을 요구해 마지 않는다.
억지 춘향격으로 없는 이야기를 새롭게 꾸며내자는 것이 아니다,
논산의 지명이 “ 위대한 말씀의 고장 ” 이라는 그 논리를 찾아내 논산시민 스스로의 지존감을 되찾자는 것이다, 필요하다면 스토리텔링 팀이라도 가동할 일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논이 많고 산이 많아 논산이라 했다면 그런 논리라면 그것은 대한민국 전체를 일컬음이다.
누가 뭐래도 우리 논산 [論山]은 성현 선현의 말씀이 무성한 데서 비롯된 위대한 말씀의 고장이다.
황명선 시장의 적극적인 괸심과 지역 역사학자 향토 사가들의 천착과 성찰이 있기를 고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