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우당 이회영(1867~1932)의 파란만장했던 일대기를 방송으로 접한 바 있다. 삼한갑족이라는 기득권을 모두 버리고 전 재산을 헐값으로 처분한 뒤 만주로 망명한 그는 신흥무관학교를 세운다.
거기서 배출된 인재들은 일제에 맞서 싸워 혁혁한 무공을 세우는데 하지만 정작 그와 가족들은 헐벗고 굶주리는 간난신고의 정점에서 허덕였다. 그렇다면 조상인 백사 이항복 이래로 무려 열 명이나 되는 재상을 배출한 명문 가족의 우당은 왜 그처럼 자청하여 고행을 마다치 않았을까!
이는 과거 로마의 귀족들은 전쟁이 나면 제일 먼저 앞장섰기에 평민들은 그들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었듯,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적극적으로 실천하고자 하는 애국심이 그 발로였다. 우당의 애국심은 그의 조상인 이항복에게서도 여실히 발견된다.
임진왜란 당시 풍전등화의 위기에 봉착한 조선에 그러나 명나라의 이여송은 참전을 꺼린다. 하지만 이항복 등의 꾸준한 설득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그는 조선에 군대를 이끌고 들어서게 된다. 충남 논산에 있는 명재 윤증의 고택 역시 예사롭지 않다.
명재와 그의 후손들은 평시엔 교육에 힘써 대계의 기반을 다졌고, 어려운 시절에는 구휼 사업 등으로 굶주린 양민을 돌보았으니 말이다. 주지하듯 조선시대의 벼슬자리는 부(富)와 귀(貴)를 동시에 잡을 수 있는 자리였다.
또한 그 자리의 연속은 명문가로 가는 디딤돌이었다. 그렇지만 벼슬만 높다고 하여 아무나 명문가가 될 순 없었다. 여기엔 반드시 기본옵션의 전제가 따랐는데 그건 바로, ‘인심을 얻지 못한 명문가는 존재할 수 없다’는 어떤 불문율이었다.
또한 그렇게 철저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적극 실행은 분명 과실이 실재했다. 우선 후일 우당의 형제인 성재 이시영이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 되었다는 건 이 같은 주장의 뚜렷한 음덕이자 소득이다.
아울러 명재의 중부(仲父)되는 동토 윤순거의 종학당 건립과 같은 주변공동체의 배려는 결국 동학이나 6.25와 같은 전란의 상황에서도 피해가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 웅변하는 것이다. 날씨가 더욱 가파른 혹한의 협곡으로 들어서고 있다.
여유 있는 어떤 아줌마는 남들 다 일하는 시간에 명품이나 사겠다며 백화점을 두리번거리지만, 없이 사는 이들은 연탄 한 장조차도 아쉬운 즈음이다. 철학이 부재한 상태에서 재물만 홀로 축적하면 그게 바로 ‘졸부’이다.
있는 부자가 돈을 쓰려면 평소에 생각을 올바르게 가다듬어야 한다. 돈은 벌기보다 쓰기가 어려워서 따로 배워야 한다는 말은 그래서 나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