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암서원 /논산시 연산면 임리에 있다.사적 제383호이며 1634년 [인조 12년]사계 김장생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위해 창건 1660[현종 1년]에 왕이 이름을 지어 현판을 내린 사액서원이다.사계 김장생 선생과 그아드님 신독재 김집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 네분의 위패를 모셨으며 고종의 서원 철폐령에도 훼철되지않고 존속된 47서원중의 하나다.
지난해 7월 1일 논산시장에 취임한 황명선 시장이 고민에 빠졌다. 연 사흘 동안 수행원 도없이 홀로 운전하면서 관내 노성궐리사 및 3향교 10서원에 대한 잠행 관찰을 끝낸 뒤 이대로는 안된다는 판단을 하면서 부터 이다.
황명선 시장은 취임초부터 자애와 효도를 시정의 기본으로 삼는다는 입장을 누차 천명한 바 있다. 황시장은 그 스스로 독실한 카토릭 신자이지만 성리학을 예학으로 정립 "자애와 효도"를 사람의 으뜸 가치로 정립시킨 기호학파의 종장 사계 김장생 선생의 큰 가르침에 관심을 가져 오면서 효도를 시정의 기본으로 깔고 가겠다는 신념을 거듭 강조한바 있다.
황시장은 전국 지자체 중 공자의 영정을 봉안한 노성궐리사 노성 은진 연산 3향교와 돈암서원 노강서원 죽림서원 등 임금이 아름을 지어 편액을 하사한 3사액서원과 일곱 서원 을 모두 돌아본뒤 그가 운용하는 자문교수단에 논산시 관내 유교문화재 및 향토유적의 보존과 활용에 대한 특단의 대책을 마련할 것을 주문했다.
황시장은 조선조 관립교육기관인 3향교 및 서원들이 누백년동안 유림의 후예들에 의해서 관리되어 왔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고 겨우 1년에 두차례 춘추향사를 지내는 역사의 흔적 쯤으로 전락[?] 하면서 점점 퇴락해 가는것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했다.
지난 지방선거당시 관내에 산재한 향교 서원 등 유교문화재를 서원 스테이 등을 통해 관광자원화 하고 어르신이 자녀들을 사랑으로 감싸는 자애와 젊은이들이 어른을 공경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사회분위기 진작의 충효례의 교육도장으로 삼겠다던 황시장의 신념에 비추어 이번 황시장의 잠행{?]의 결론은 매우 참담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우선 3향교 모두 더는 두고볼 수 없는 수준으로 경내외 환경관리가 수준이하였고 논산시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를 추진하고 있는 돈암서원을 포함 10곳의 서원 모두의 관리실태가 그동안 탁상 관리에 머물어 왔다는 것을 직접 목견한 황시장은 특히 연무읍 금곡서원 앞의 조선조 충절로 이름높은 김수남의 정려 및 가야곡면 효암 서원 입구에 위치한 강응정 정려의 관리실태를 접하고 더욱 굳은 표정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황시장은 이미 논산시가 보수공사를 하고 있는 사액서원 노강서원의 본체 담에 나있는 쥐구명을 막기위해 마대포대를 둘둘말아 메운 현장과 본건물 을 둘러싼 담장 주변의 정리되지않은 모습들에 매우 실망스런 표정을 지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황시장이 논산시의 대표적 유교유적들을 둘러보고 자문교수단에 의뢰한 내용중에는 현행 문화재 관련법상 보수를 위한 절차상의 번거로움과 파손 등이 발견됐을 때 지자체 차원에서 즉각적으로 보수를 행할 수 있는 방안 강구에서 부터 서원 및 유림 관계자들과 협의 지속적이고 간단없는 관리대책 . 관광객의 유치를 위한 숙박체험구상 등이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황명선 시장은 특히 경북 영주시에 소재한 소수서원을 비롯한 유명 유교문화재의 보존 및 활용 현황을 알아보도록 지시한데 이어 조선조 당시 각 향교 서원들이 어떻게 관리되고 화단 등 당시의 조경이 어떤 형태로 꾸며졌는가에 대해서도 각 종 문헌을 통해 알아보도록 관계관에게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황시장은 사흘간의 나홀로 잠행 끝 관내 모든 향교 서원에 대한 총체적인 발전적 관리대책 마련이 시급한 것이지만 부적면의 휴정서원 강경읍의 죽림서원이 비교적 청소관리실태가 양호한 것으로 나타났다며 해당 서원 관계자들의 노고를 치하한다고 말했다.
행림서원은 고종4년(1867) 만죽헌 서익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서원이다. 본래 서익 선생은 산노리의 갈산사에 배향되었다가 현재의 위치인 행림서원으로 분향되었다.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서원이 철폐되었다가 1926년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식 건물로 사우(祠宇)를 다시 재건하고 이소선생을 추배하였다.
금곡서원/이 서원은 만치당(萬痴堂) 김수남(金秀南) 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송시열(宋時烈), 송준길에 의해 1687년 가야곡면 조정리에 금곡사(金谷祠)를 신축하고 위패를 봉안하였다가 숙종 16년 (1690)에 김수남의 유풍지(流風地)인 연무읍 금곡리에 이축하였다. 정조 5년(1781) 매죽헌(梅竹軒) 성삼문, 송재(宋齋) 조계명 양위를 추배하였다. 1868년 서원철폐령에 훼철되었고, 그 해에 단소(壇所)를 설치 운영되어 오다가 1977년 사우를 건립 복원하였다. 매년 음력 3월 3일과 9월 9일에 유림들이 모여 춘추로 제사를 올리고 있다
봉곡서원은 숙종38년(1712) 여산 공촌면 장항리에 창건하였다. 묵암 이계맹, 고담 이순인, 취은 남명한, 추당 진극효, 경재 남두건 제 선생을 모시다가 고종 5년(1868) 서원 훼철령에 의거 철폐된 후 1899년 돈암서원 유림에 의거 여산향교 유림과 여산부사 윤기진 및 후손의 협력으로 봉곡서원지에 5선생 단을 설치하여 봉곡단소로 운영되다 유림 출연금과 문교부 지원으로 1966년 3월 현위치에 사우를 건립하였다.
노강서원은 조선 숙종 원년(1675)에문곡 김수항의 발의로 창건하였으며 동왕8년(1682)에 사액받은 서원으로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속에서 철폐되지 않고 향사를 계속한 곳이다. 배향인물은 초창시 문정공 팔송 윤황과 미촌 윤선거를 배향한 이후 숙종 8년과 경종 3년(1732)에 각각 석호 윤문거와 명재 윤증을 배향하여 모두 4인에 대하여 향사하고 있다.
조정서원은 익안대군 이방의 증손자 옥계도정 이현동을 추모하기 위해 관내노성.연산.은진향교 유림들의 발의로 건립.운영되어 왔다.
충곡서원 / 논산시 부적면 충곡리에 있는 서원. 1688년(숙종 14)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계백(階伯)과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하위지(河緯地)·유응부(兪應孚) 등 사육신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효암서원/이 서원은 본래 가야곡면 두월리에 건립된 갈산사로서 강응정(중화제 : 강응정) 선생을 모시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고 한다. 조선 숙종39년(1713) 현위치인 가야곡면 산노리 22의 5번지에 재축하고 서익(萬竹비), 양응춘(道谷), 김문기(白忖), 김성휘(梧岡), 김필태, 남준(梅溪) 선생들을 추배하였다.
죽림서원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75호. 1626년(인조 4) 황산사(黃山祠)를 창건하고 이이(李珥)·성혼(成渾)·김장생(金長生)의 위패를 모셨다. 1665년(현종 6) '죽림'이라고 사액을 받으면서 서원으로 승격했으며, 조광조(趙光祖)·이황(李滉)을 추가 배향했다. 1695년(숙종 21)에 다시 송시열(宋時烈)을 추가 배향했다.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46년에 복원되었다.
휴정서원은 숙종26년(1700)에 창건하고 숙종31년(1705)에 준공하여 휴계유무 선생을 봉안하고 후에 구봉 송익필, 목사공 김공휘, 화양당 김호, 과암 이항길, 기기재 김상연, 서윤공 김진일, 구봉 김우택 선생을 추배하여 제향을 받들어 오던 중 1868년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시 철폐되었다.1919년 중건하였으나 1944년 탑정저수지가 완공되어 수물됨에 따라 현위치에 단소를 설치 단제를 지내왔다. 현재 휴정서원은 1984년 사우를 복설하고 1985년 3월 20일 구봉 송선생을 주향으로 8위의 위패를 봉안하고 음력 3월 20일과 9월 20일에 춘추 향사를 봉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