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중엽 관직에는 오른 적이 없지만 조선시대의 유명한 성리학자로 사실상 소론을 이끈 정치개혁의 기수였던 명재 윤증선생(1629~1714)의 생거지로 알려져 있다.
명재고택의 입지는 왼쪽(서쪽)에 노성향교가 자리잡고 있고 오른쪽에 노성 궐리사가 자리 잡고 있어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궐리사란 공자의 영정을 봉안한 건물을 이르는데, 우리나라에는 수원과 노성 두 곳에 있다. 명재고택은 18세기 초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1709년에 완공하여 1725년, 명재의 손자가 입주한 것으로 전한다.
명재고택은 ㄷ자 모양의 안채와 일자형의 중문 간채가 튼 ㅁ자 모양을 이루고 있으며 여기에 사랑채가 연결되어 있고 사랑채 후면, 높은 곳에 사당이 배치되어 있다. 명재고택은 조선시대 중기의 가장 전형적인 상류주택이라고 할 수 있다.
명재고택은 윤증선생의 사회적, 학문적 지위를 생각할 때 결코 큰 규모는 아니나, 전통한옥의 전형적인 디자인과 아이디어들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세계에서 단 하나뿐이라는 “여닫이 미닫이문”은 현대 건축가 들 조차 찬탄을 금치 못할 만큼 뛰어난 과학적 구조라는 평가도 잇따르고 있다.
명재고택은 인간적 척도(human scale)를 잘 구현하고 있어서 우리에게 편안한 느낌을 주는 한옥이다.
명재고택에는 대대로 종부들이 거주하며 주택을 잘 관리하고 있다. 그분들의 노력으로 명재고택은 아름다운 한옥의 모습을 오늘까지 잘 간직하고 있다. 명재고택은 중요민속자료 190호로 지정되어 있고 사시사철 전국에서 관광객 및 유림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